아냐델로 전투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전투가 이루어진 방식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입은 패배로 베네치아가 한 세기 넘게 이탈리아 본토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공화국 역사에서 가장결정적인 순간의 도래를 알렸기 때문이다.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베네치아군의 주력이 온전히 남아 있었으나 사기가 크게 저하된 탓에, 베네치아는 주력부대의 보전을 위해 동쪽으로 퇴각을 명령했다. 이들은 시민들의 반대로 테라페르마의 주요 도시로부터 주둔을 거부당하다가 마침내 석호 지대에 있는 메스트레에 베네치아시를 방어하는 진지를 구축했다. 메스트레에 도착하는 동안 부대 병력은 탈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P197
그들은 종속 도시들의 방어를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하기보다는 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베네치아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을 우선했다. 또한 10년 전 밀라노공국의 도시 엘리트층이 그랬던 거처럼 1509년 당시 베네치아 종속도시들의 시민들도 외국 군주가 멀리서 종주권만 행사하고 자신들은사실상 자치를 누리는 특히 중요한 것은 자기들도 주변으로 확장하여 속지를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99
새 교황은 레오 10세로 불리게 될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율리우스 2세보다 훨씬 젊었던 레오 10세는 그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았으며, 외교 문제에 훨씬 더 미묘하고 가변적이었다. 그를 상대할 사람들은 그의 확고부동한 목표가 메디치 가문을 군주급 왕조로 격상시키는 것임을 곧 알게 되는데-피렌체를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점을 제외하면 그는 의중을 읽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가 교황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당연히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외교 정책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다. - P252
베네토에서는 전쟁의 어느 단계에서든 전투로부터 직접적인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영토가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대의 주둔을 경험했고, 어떤 곳은 해마다 겪기도 했다. 비첸차의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아냐델로 전투가 벌어진 1509년부터 1517년 사이에 비첸차 정권은 36번이나 교체되었다. … 베네치아인들에게 전쟁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경험이었다. 그들은 전쟁 자금의 압박 때문에 공화정에 자부심을 가 - P282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식에 의존해야했다-실제로 그들은 정부 관직과 상원 의원직을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판매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해상 제국에 점점 더 큰 위협을 가하는 튀르크 세력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관건은 그들이 어디로 더 확장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가진 것을 계속 지켜낼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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