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들이 십자군 원정을주도하겠다는 샤를 8세의 생각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는, 중세 말에 십자군 원정이라는 생각이 실효적인 지지를 불러일으킬 만큼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어느정도 달려 있다. 또한 나폴리 왕국이 정말로 강력한 튀르크 정벌군의출발지로 최상의 기지였느냐에 대한 평가에 달려 있기도 하다. … 그러나 그를 이탈리아로오게 한 것은 나폴리 왕위에 대한 관심이었지 십자군 원정을 떠난다거나 샤를마뉴를 모방하겠다는 환상은 아니었다. 또한 샤를 8세는 자신의 군대와 귀족들을 이끌고 적극적인 군사작전에 나설 기회를 무척이나 열망했다. 그는 군사 문제와 전쟁의 - P40
조직 및 수행에 관해 상당한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원정이 야기할 문제들을 과소평가했으며, 보고받은 여러 상반된 의견들을 고루 검토했을 리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탈리아 문제에 대한 샤를의 관심을 부추긴 조언자들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에반해 다수의 대신들은 나폴리 왕국 침공을 위한 어떠한 군사 원정도, - P41
특히 왕이 직접 통솔하는 원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반대했다. 오랜 준비와 논쟁을 거친 후, 최종적으로는 샤를 8세의 결단으로 원정이 단행되었다. - P42
전투는 중기병의 주도로 치러졌고, 이탈리아군은 수적 우위를 이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곤차가는 프랑스군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의 명성은 적극적인 자기 미화로 점철된 이야기를 통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공식적으로는 포르노보전투를 승리-프랑스인들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게도로 기념했지만, 사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확신하지 못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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