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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ㅣ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십자군 이야기 3권은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면서 3차 십자군부터 마지막 십자군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기간도 길고 무척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 때문에 특히나 3권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많이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재미롭게 읽었다.
3차 십자군에서 살라딘에 맞섰던 리처드. 4차의 엔리코 단돌로, 6차의 프리드리히 2세, 7차의 루이 9세, 8차의 메메드2세까지. 여기에 2차부터 참여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에 이어 소년 십자군이 새롭게 등장한다.
1, 2차 십자군때까지 영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 뿐 집단으로 출병한 적이 없었다. 이는 프랑스와의 영토 이권 다툼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위한 세금을 거두고 전쟁을 준비했으나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반기를 들면서(당장 떠나기엔 자금, 병력이 부족)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리처드가 승리한 뒤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고 1년 뒤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가 참여했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가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참여한다.
1189년 8월 28일 십자군은 아코 성벽에 이른다. 아코는 항구도시로 출입구는 항구 밖에 없으므로 성벽이 뚫리면 아코가 함락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아코 방어군을 지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리처드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보급선을 중간에 가로채는데 성공하고 아코에 도착한 뒤 십자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리처드는 사령관에 올라 투석기를 성벽을 향해 쏘지 않고 성문을 향해 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성문은 목재로 되어 있으므로 돌로 된 성벽보다 무너뜨리기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전선을 방어선과 공격선으로 분리하여 병사들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니 어떻겠는가. 살라딘은 그에게 휴전을 요청한다. 십자군의 협상 조건은 포로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모든 이슬람교를 퇴출하며 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지불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이슬람교도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으로 하고 기한은 한달로 정했다. 아코 공방전은 2년 만에 이렇게 종료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1세의 최후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시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병사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1191년 9월 7일 십자군 대 이슬람군의 1차 격돌인 아르수프 전투가 시작된다. 아르수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항구도시였기에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곳을 먼저 수중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리처드의 별명이 ‘사자심왕’이 된 것은 상대측인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서다(그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지 않고 언제나 앞선 지휘로 용맹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맞수가 인정하는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전투는 아르수프 바로 아래에 자리한 야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이슬람 기병수는 2천명이었으나 십자군 수는 기사가 불과 17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적인 불리함을 뒤집고 야코에서도 리처드를 위시한 십자군은 승리하고 야파를 탈환했다. 살라딘 측과 리처드 측은 강화 협약에 성공한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화 협상은 무려 이후 26 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성공한 회담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부하에게 걸리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귀국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노리는 동생 존이 있었다. 담판 승부를 벌이려 했던 존은 이미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는데 리처드는 그럼에도 프랑스까지 쫓아가서 그와 화해한다.
이후 리처드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데 전념한다. 그러다 전선에서 석궁을 맞아 41세 나이에 사망했다. 리처드 뒤를 이은 것은 자연스레 존이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후계자 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이슬람 측으로 인해 이집트가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수송을 위해 이탈리아 해상국들을 물색하는데 최종 선택은 베네치아가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하던 최고 지도자인 도제는 엔리코 단돌로였는데 그는 협상에 응하면서 얻은 땅 절반을 받아내고 수송을 돕기로 한다.
비잔틴제국도 당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황제인 알렉시우스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놓이고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에 새로 등극한 황제는 두카스 무르주풀루스, 십자군의 항전이 거세자 그는 단돌로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단돌로가 이를 거부하자 자국의 시민으로부터도 인기가 없던 그는 나라를 팽개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공석이 된 황제 자리로 십자군은 쉽게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제5차 십자군은 중근동의 그리스도들을 주력으로 하고, 해군 및 수송은 제노바, 목적지는 이집트 항구인 다미에타로 정해진 채 시작되었다. 13세기 초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모두 이집트 술탄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쪽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수중에 넣었으나 이후 나일강 부근에서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이집트 술탄이 군대를 보내자 더는 싸움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 병사들을 철군시키는 대신 다미에타는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강화 협상은 총 3차례에 이어 싸움을 지속하면서도 이루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는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종용에 십자군을 출발시켰으나 역병이 돌아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자 출발을 연기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6차 십자군은 소수 정예집단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이탈리아 해상에 도움을 얻지 않고 직접 해군을 꾸렸으며(수송용 배도 직접 제작), 지휘 계통을 일원화시켰다. 이때 술탄 알 카밀은 동생 알 무아잠이 죽자 또 다른 동생인 알 아슈라프에 의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아코에 십자군이 당도했을 때 교황의 칙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는 싸우지 않고 공생 관계를 맺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파라딘을 협상자로 내보내 협상을 성공시킨다. 교황이 이를 가만 두고 볼리가 없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프리드리히였는데 이 일로 인해 프리드리히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잘못되었나?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협상자였던 알 카밀은 10년 간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놈의 명분을 위해 전쟁터에 병사들을 내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유럽의 그리스도 세력은 10년이 지난 뒤 전쟁으로 기존 영토를 수복하자는 흐름이 대세를 이룬다. 그런 만큼 유럽의 왕실과 제후, 기사 세력들이 전폭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주력군은 프랑스 군이었는데 왕은 루이 9세였다. 왕이 직접 십자군을 이끄는데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수송 및 해군은 제노바 선단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십자군 목표는 이집트에 일격을 가하여 이슬람 세계를 흔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미에타는 이번에도 공략에 성공하였으나 나일강이 문제였다. 십자군은 결국 나일강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고 대패한다. 그들은 카이로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하는데 되돌아가다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고 왕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카이로로 연행되는 굴욕을 당한다.
1258년 바그다드(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왕조가 멸망한다.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을 꾸린다. 이번에도 유럽 각지의 왕족이 참여했고 로마 교황이 도장을 찍으면서 출발한 군대였다. 그러나 리더인 루이 9세가 튀니지아의 카르타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슬람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다. 이후 십자군과 이슬람 간의 강화 협상이 이루어졌고 십자군이 스스로 철수하기로 하면서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린다.
장장 2백 년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성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교황이 승인, 기사들이 모이고 왕과 황제가 자금과 병력을 모았으나 피해를 본 것은 이름 모를 사상자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해상 이용 능력을 가졌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해상국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신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도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