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절멸 일보 직전까지 밀어붙인 강대국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오쩌둥은공산군에, 만주로 이동해 납작해진 일본인에게서 최대한 많은 영토를 빼앗으라고 지시했다. 공산당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태세였다.
그런데 모든 게 공산당에 불리하게 바뀌었다. 미국이 중국의 광대한 지역을 여전히 틀어쥔 일본에 장제스 군대에만 항복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장제스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중국 정부 수반이라는지위를 활용해 스탈린과 거래를 했는데, 국민당은 소련이 향후 만주에서 경제·군사 활동을 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만주 지배권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동부 해안 지대-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전쟁 중에 일본에 점령된한 곳이다에 사는 중국인이미군 수송기를 타고 들어온 장제스 군대를 해방의 영웅으로 환영했다. 마오쩌둥은 어느 모로 보나 패배할 듯 보였다. - P205

냉전 때문에 원유공급이 한층 더 중요해진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온건한 민족주의자에게 권력을 넘겨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 현지 왕실 출신인 그들에게 의지해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한편, 외국 석유 회사와 계속 협력해서 원유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렇게 협조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크도 약속했다. 둘다 보수 군주가 이끄는 나라였다. 하지만 시리아와 이집트 양국이 친서방 방향으로 이동하는 듯 보였음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충돌이 벌어지자 중동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위험에 빠졌다. 파키스탄의 무슬림이 전해에 그런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도 1948년 독자 국가를 선포했다. - P222

트루먼은 대외정책 보좌관 대부분의 생각과 달리 냉전을 위해서나 국내 정치적 이유에서나 이스라엘을 서둘러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트루먼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련이 이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생기고 가을에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손해 볼 수 있음을 우려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자마자 아랍 각국 군대가이 나라를 공격했다. 팔레스타인 내전은 국제전이 되었고,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 P223

중국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집권당은 경제적·사회적 진보와 관련해 소련이 이룩한 업적에 큰영향을 받았다. 국가 계획, 국유 산업, 집단 농업 등은 아시아 전역의정부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 P226

반식민주의 유산을 종종 과시하는 나라로서는 모순적이게도, 전후 역대 미국 행정부는 대체로 냉전의 관심사보다 반식민주의를 우선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인도네시아에서 손 떼게 한 것처럼, 유럽 열강을 탈식민화로 밀어붙일 때도 주된 동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냉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는 우려였다.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유럽인을 최상위에 두는 인종적 위계 인식이 미국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종교관도 마찬가지였다. - P227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과 그 여파는 아마 냉전에서일 사건으로 가장 커다란 재앙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한 나라를 폐로 만들고 한 국민을 사슬로 묶었다. 그 직접 결과는 오늘날에도 두리 옆에 있으며 미래에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사이의 격렬한 이념 대립과 초강대국의 개입을 가능케 한 냉전의 틀이 낳은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가장 소름이 끼치는 냉전의 충돌을 상징했다.
극단적이고 야만적이며, 언뜻 끝없이 이어질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황무지가 되었고, 세계 곳곳의 사람은 자기 나라가 다음 차례에 재앙을 맞을지 궁금해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냉전을 전 지구적 규모로강화하고 군사화했다. - P231

대통령은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미군에 지시했다. 또한 북한의 공격을 비난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제출하고, "평화를 파괴한 행위"로 규정했으며, 즉각 철수할 것을 주문했다. 결의안은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이유로 소련이 이사회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안보리는 후속 결의안을 통과시켜 모든 유엔회원국에 "대한민국이 무장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제공할 것"을 호소했다. 결의안에 따라 통합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에설치되었고, 미국이 이끌기로 했다. 유엔 결의안은 트루먼 행정부의대승리였다. 두 결의안 덕분에 한반도에서 유엔의 공세가 정당성을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작전을 지원할 것을 요구받았다. - P246

노동자의 억눌린 요구를 충족하느냐, 사회주의 국가를 방어하느냐 하는 문제가 스탈린 이후 소련의 새로운 지도부가 맞닥뜨린 도전이었다. 집권 세력-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ii Malenkov 각료회의 의장, 라브렌티 베리야 Lavrentiy Beria 비밀경찰국장, 니키타 흐루쇼프 당서기장, 야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 니콜라이 불가닌Nikolai Bul-ganin 국방장관-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만큼이나 공산당의통치가 붕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스탈린은 잔인한 성품과 그가 강 - P279

요한 존경을 통해, 공산당 지배의 보증인이자 모든 정치적인 문제의심판관 노릇을 했다. 그가 사라지자 크렘린의 후임자들은 소비에트국가와 그 동맹자가 심각히 위협받지 않으려면 긴장을 낮추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 P280

헝가리 혁명을 진압한 후과는 유럽인에게 짙은 암운을 드리웠다. 혁명을 통해 유럽 대륙이 두 세력권으로 나뉜 현실이 여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이따금 "공산주의를 물리치겠다"라고 요란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동유럽을 "해방"하기 위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소련 내부와 외부에서 자유화를 이루려는 흐루쇼프의 시도는 바로 그 자신의 손에 큰 타격을 입혔다. 헝가리인20만 명이 서구로 도주하고, 2만 명이 체포됐으며, 너지 임레 총리와그의 측근 몇 명을 비롯한 230명이 처형되었다. 서유럽에서 헝가리사태의 직접 결과로 각국 공산당이 힘을 잃었다. 몇몇 공산당은 이후다시는 힘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동구에서 대다수 체제 반대파는 모스크바에 맞선 공공연한 반란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P295

공산주의가 서유럽에서 하나의 정치 대안으로서 손해를 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냉전이 격화함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일터와 - P315

사회 양쪽에서 모두 박해를 받았다. 스탈린 일파가 저지른 범죄가 널리 알려졌을 때, 특히 1956년 헝가리 봉기 이후 각국 공산당은 당원수가 줄었다. 국내의 불공평이 해외의 소란을 가려 버린 이탈리아를제외하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더는 그렇게 매력적인 대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 공산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주된 이유는정치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것이었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가 시민을위한 사회복지를 극적으로 확대하자 대다수 노동계급에게 혁명의 필요성이 한층 더 흐릿해졌다. - P316

20세기 중국에는 기묘한 대칭이 존재하는데, 그 대부분은 이데올로기적 냉전과 연결된다. 세기 초에 중국에서 일어난 신해혁명은 공산주의 및 충돌로 변했다. 세기말에 공산주의는 자본 및시장과 맞닥뜨렸다. 그 사이에는 파괴와 재건, 열정과 냉소, 거의 끝없이 흐르는 피의 강으로 점철된 끔찍한 시대가 존재했다. 이와 같은중국의 두 혁명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 그 유혈성이다. - P335

1956년 가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벌어진 위기는 마오쩌둥을움직였다. 마오쩌둥과 많은 보좌관은 동유럽의 노동자들이 반란을일으킨 이유가 공산당이 지방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동유럽 공산당들은 노동자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선진적 형태의 사회주의를 제공하는 데 너무 더디고 미적지근했다. 다시 말해, 헝가리에 대한 답은 사회주의를 완화하는 게 아니라 강화하는 것이었다. - P346

모스크바가 우려한 핵심 이유는 중국이 소비에트권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통합되기를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다. 1958년까지 이런통합을 촉구한 것은 바로 중국이었고, 소련은 이를 저지하는 상황이었다. 중국의 거대한 인구가 소련과 동유럽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것을 두려워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1958년 여름 소련 국방부가 소련이 중국에서 운용하는 조기경보 체계와 해상 통신용 송신기 등 비교적 일상적인 군사 조정을 몇 가지 제안했을 때, 마오쩌둥은 격분했다. - P350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의 위에서 보느냐, 아래에서 보느냐에따라 다른 모습이었다. 위에서 보면 동유럽이나 소련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숙청이었다. 지도자들이 권력에서 제거되고, 의식을 통해 모욕을 받았으며, 살해되거나 추방당했다. 하지만 아래에서 보면 긴장이 풀리는 사육제, 즉 수십 년에 걸친 격렬한 변화 끝에 개인적 원한과 열망을 풀어내는 살풀이 판이 되었다. - P361

제3세계 운동이 탄생한 것은 바로 신생 독립국을 세우는 과정에 서방이 개입하면서다. 반식민 활동가는 점차 이 용어를 사용했는데, 마르티니크의 활동가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이 1961년 《대지의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저서로 대중화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훨씬전부터 드러나 있었다. 이제 비유럽인이 자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미래도 주된 책임을 진다는 인식이었다. 새롭게 탈식민화한 국가 사이의 연대가 세계 다수 민중을 바탕으로 세력권을 탄생하게 한다는 관념이기도 했다. 또한 냉전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책임하며 세계의 발전 상황과 동떨어져 있는지가 드러났다는 사고였다. 소비에트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제3세계의분노의 화살을 정면에서 맞은 것은 바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였다. - P385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해인 1961년, 광범위한 국가들이 연합해훗날 비동맹운동으로 발전하는 협의체를 형성했다. 이들 나라는 모두 냉전이 자국의 국제적 이해관계를 위협하고 국내의 발전 계획에방해가 된다고 느꼈다. 6년 전 반둥회의에 참가한 나라 대부분 창립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비동맹운동은 반둥의 후속 기구만이 아니었다. 민족 사이의 연대, 특히 인종 연대가 부재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대신에 회의는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와 외국의 개입을 철폐하기위해 각국의 주권과 국제 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반둥 의제의 일부에 선결 조건으로 초점을 맞췄다. - P404

쿠바미사일위기는 냉전 시기에 미소 간에 벌어진 가장 위험한핵 대결이었다(유일하지는 않다). 역사학자는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놓고 입씨름했다. 물론 진짜 답은 핵전쟁을 피했으니까 모두가 승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공공연히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흐루쇼프가 가장 두드러진 패자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는 왜 물러섰을까? 그는 핵전쟁이 벌어지면 소련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임을 알았다. 미국에 피해를 줄 수있는 능력이 반대일 때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벌어지면 과연 정권이 생존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일 것이다. 흐루쇼프는공산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상승 일로를 달리고 있으며, 자신의 역사적 역할은 소련이라는 함선을 조종해서 역사 자체의 법칙을 통해 글로벌 세력의 균형이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시기를 헤쳐 - P437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핵전쟁이 벌어지면 이런 역사적 성취가 파괴될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의 화장용 장작더미를 칭송하는게 아니라, 공산주의의 승리를 찬미하기를 원했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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