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에서 근대 개념은19세기 말에 공통된 출발점을 가졌고, 냉전 시기 내내 많은 공통점을유지했다. 두 나라는 모두 과거 세 세기에 걸쳐 전 지구적 차원에서이루어진 유럽의 팽창 및 유럽적 사고방식의 팽창에 그 기원이 있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 중심-유럽과 그 파생물이 세계를 지배했다. 유럽인이 세운 제국들은 점차 지구 대부분을 손에 넣었고, 이제국들은 자국민을 세 대륙에 정착하게 했다. 이는 독특히 펼쳐지는 - P22

과정이었기 때문에 일부 유럽인과 유럽계 사람은 자신들이 발전시킨이념과 기술로 세계 전체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 P23

미국과 러시아가 세계 무대에 진입한 방식은 각국이 19세기 말을 지배한 세계 강대국 영국과 어떤 식으로 경쟁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미국인은 영국의 해외무역 특권에 분개했으며, 영국이 공언한자유무역과 투자의 자유 원리가 자기 잇속만 차리는 겉치레라고 보았다. 미국의 많은 엘리트가 영국 방식을 찬양하기는 했지만, 1890년대에 이르러 미국과 영국은 점차 영향력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특히미국이 세계적인 강국으로 처음 등장한 남아메리카 대륙이 경쟁 무대였다. 러시아도 영국의 세계 체계가 자국이 떠오르는 것을 가로막는 주요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 P33

나중에 냉전을 형성한 것이 바로 이 제1차 세계대전 세대다. 대전쟁의 모든 요소가 그 안에 있었다. 공포, 불확실성, 무언가를 믿을 - P45

필요성,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라는 요구 등등. 유럽의 총력전이 낳은절망과 그 전쟁이 지구의 많은 지역에 퍼뜨린 공포는 전쟁을 겪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담겼다. 어디서 전쟁을 경험했든 상관없었다. 훗날영국 총리가 되는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소령은 튀르키예와이라크에서 싸웠다. 해리 트루먼 대위는 중요한 뫼즈-아르곤Meuse-Argonne 공세에서 싸웠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위는 전선에 나가는 병사를 훈련했다. 후에 서독 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독일 제4의 도시 쾰른의 시장이었다. 소련을 창건한이오시프 스탈린은 시베리아의 혁명 유배지에서 전쟁을 혹평했다.
베트남의 냉전 시대 혁명가 호찌민은 프랑스가 쇠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조국의 첫 번째 독립운동을 결성했다. 그들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에서 성장했다. - P46

테러와 정복에 바탕을 둔 소비에트 체계가 어떻게 세계 곳곳의수많은 사람에게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대공황이 기회를 제공했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형편없이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가모든 곳에서 헌신적이고 지적인 수많은 사람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이가 볼 때, 자본주의는 이미 전쟁과 식민지 노예화를 초래한 바 있었다. 1929년 주식시장 대폭락 이후, 자본주의는 가장 발전한 산업 국가에서도 빈곤을 낳았다. 체제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소련인도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는 1930년대에 자멸을 작정한 듯 보였다. - P59

새로운 일당 국가들은 자본주의 이상에 대한 집단주의적 도전을 형성했다. 이 나라들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실천, 부르주아지,
사회민주주의 대중 정당을 모두 경멸했지만,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여겼다. 왜냐하면 각국은 자국 영토에서 어떤 경쟁 이데올로기도 절멸하기를 바랐고, 대체로 각국의 민족주의는 이웃 나라의 민족주의에 반대해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후자의 예외가 있다면 소련인데,
스탈린이 다스리는 소련은 매우 독특한 형태의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면서, 소비에트 국가를 모든 나라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조국"으로 이상화하는 동시에 국내에서 지지를 얻기 위해 과거 러시아의 여러 상징에 의존했다. - P60

스탈린은 소련 체제가 외국의 지원을 받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기습 공격을 받은 뒤 소련 전역에서 자기의 독재에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듯이, 영국과 미국이 자국 방어에 집중하면서 러시아를 운명에 맡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견해는 놀랍지 않았다. 일찍이 스탈린은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조약의 보호를 받는 가운데 폴란드 동부를 침공하고, 발트3국을 점령하고, 핀란드를 공격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정점에 이른 소련의 테러에 대한 유럽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고, 소련이 1939~1940년에 독일에 연료와 석유를 공급했다는 기밀정보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P75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이발표한 대서양헌장은 일부 비유럽 민족주의자가 보기에, 우드로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내세운 이상주의와 너무도 흡사했다. 물론 그 이상주의가 다른 나라에 영감을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양국은헌장에서 "모든 민족이 자신이 살아갈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이 강제로 빼앗긴 주권과 자치권을 다시 누리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약속했다." 인도, 인도네시아, 알제리 민족주의자는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덴마크, 프랑스 같은 유럽 백인 나라와 똑같이자국에도 이 약속이 유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미국인에게 대서양헌장은 그들이 지키기 위해 싸운 원칙을 요약한 것이었다. - P91

토레즈나 톨리아티와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처음에 서유럽에서 혁명적 행동이 일어나면 공산당이 파괴되고, 그렇지 않아도 비틀거리는 소련과 미국, 영국의 연합에 조종이 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와 충돌이 벌어지고 결국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소련자체가 폐허 상태였다. 스탈린은 소련이 약한 시기에 연합국과 대결 - P116

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과 영국의 제국주의자가 전리품을 놓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동안 미래에 협력하기를 희망한다는 표현을 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소련의 최대 위협은 제국주의 국가가 소련을 상대로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전후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초기 정책은 이렇게 적이 단합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 P117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몇 명이 붉은군대의 행동에 불만을 토로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전쟁터만 3000킬로미터를 거쳐 온 병사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병사는 자기가 영웅이고, 모든 게 허용되며, 어떤 일이든 해도 된다고, 오늘 자신은 살아 있지만 내일이면 죽을 수도 있으니 용서받을 거로 생각해요. 병사들은 지쳐 있고, 기나긴 어려운 전쟁을 치르느라 나가떨어진 상태요. ‘점잖은 지식인‘의 시각에서 보면 - P121

안 됩니다."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도 유럽 전쟁이 끝나는 순간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수백만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미래세대에게도 증오의 유산을 남긴 소련의 행동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뿐이다.
그리하여 동유럽 공산주의자는 어려운 상황에서 전후의 선동을시작했다. - P122

스탈린이 통일 독일을 원한 이유는 1947년에 이르러 미국이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유와 똑같았다. 워싱턴이 판단할 때, 독일 국가가 - P164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서유럽에 통합되어야 했고, 독일 전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 그런 결과를 이룰 수 없었다. 이는 안보와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었다. 경제 진보의 문제이기도 했다. 마셜플랜은 시장을 통합함으로써 서유럽의 성장을 자극하려는 구상이었고,
독일 서부의 점령 지구는 이 기획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그렇다면 동부 지구(그리고 그에 따른 소련의 압력)를 고려 대상에서제외하는 게 더 나았다. - P165

나토가 유럽에서 처음 미친 효과는 군사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효과가 컸다. 비공산주의 서유럽국민은 미국이 조만간 유럽 대륙에서 철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믿었다. 이는 유럽이 여전히 분열된 채로 남는다는 의미였다. 그뿐만아니라 소련의 공격에 대항하는 안보를 의미했다. 나토 창설은 유럽의 핵심을 문명적으로 정의하는 문제가 아니었다(그리스가 1952년까지합류하지 않았을지라도-누군가 "플라톤에서 나토까지"라고 말했듯이). 그보다한 세대가 넘는 동안 지옥을 경험한 한 대륙의 안정에 관한 문제였다. - P176

생활을 재건하느라-살 곳을 마련하고, 아이를 먹이고, 일자리를 찾느라 분주한 가운데 사람들은 점차 자기가 냉전이 규정한 틀 안에서이런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 또한 냉전 충돌의 일 - P187

부라고 느끼지 못했겠지만, 냉전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냉전은 전시에든 평시에든 사람들이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여러 제한과 기회를만들어 냈다. 그리고 점차 냉전은 과거에는 뚜렷하지 않았던 방식과목적에 따라 세계의 각기 다른 지역을 연결했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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