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큰 사건을 일으킨 아들의 부모로서 세상 사람들한테 사죄할 입장에 있는 거 아닌가요?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 사람들한테 사죄하기 위해서도 취재에 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그렇게 엄하게 꾸짖자 마음 약한 도시코는 이제 더 이상거부할 수가 없었다.
"일단 호적도 조사했으니까요"라고 했을 때 도시코는
"어머"라고 놀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낸 채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온몸에 오한이 엄습했다.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마사시가 내 친아들이 아닌 것과 범행을 저지른 것을결부시킬 생각이라면 그건 어처구니없는 오해예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도시코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수화기를 들고 숨을 삼키고 있었다. - P48

《하라하라 시계》의 기술에는 종래의 좌익 또는 신좌익의 이론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우선 글 어디에도 마르크스, 레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본의 노동자 계급 자체도 제국주의 본국인으로서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늑대‘가 유일하게 연대를 표명하는 노동자는 산(山) 등 인력 시장의 유동적 노동자(그들은《하라하라 시계》에서 사용한 유민=날품팔이 노동자를 나중에 이런 표현으로 바꿨다)뿐이다. 나아가 자주 나오는 것은 아이누이고 오키나와 인민이며 조선 인민이다. 이것들이 《하라하라 시계》를 아우르는 키워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P58

"‘그들은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도 한 구절, 한 마디 변하지 않는 수업. 희망도 없고 분노도 불안도 없는 곰팡이 핀 사무로서의 - P125

교육. 그들의 교육은 체제가 정성껏 다듬어 준, 자신의 복사판을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놀람이 공포로 바뀐 것은 그때다. 우리가 추구한 인간상은 지금 칠판 앞에서 마른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그런 사람의 축소판이 아니다. 그런 자(또는 물건?)가 되기 위해 우리는 대학에 온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대학도 그런 곳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도쿄대 투쟁에 전력을 기울인 것은 바로 진실의 추구, 성실을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노래하면 그저 달콤한 말의 낡아빠진 어수룩한콧노래 따위를 노래하고 있던 우리들 어린 양은 묘지 위에서 미친듯이 타오르는 파란 도깨비불을 보고 난생처음 활시위를 잔뜩 잡아당겼던 것이다. - P126

하지만 이제 세상의 격렬한 움직임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격렬한 삶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나처럼 살아온사람은 거세당한 자이고 겁쟁이이며 무사안일한 가족중심주의자로서 규탄당하는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역시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밖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솔직한 고백은 그것뿐이다.
경멸당해도 내게 침을 뱉어도 나는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설령 주의(義) 달성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나는 남에게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를 수는 없다. 자신은 부상을 당해도 남에게 한 방울의 피도 흘리게 할 수 없다. 이는 겁쟁이인 내가 절대 굽힐 수 없는 신조다. 나의 반전 사상의 뿌리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이라서 남을 다치게 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세상에 단 한 번밖에 태어나지 않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 P138

‘인민‘이나 ‘대중‘이라고 해버릴 때 개별 생활자의 특수성 같은 것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운동의 역학이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선거 같은 것에서 무장투쟁까지 집단(mass)으로서의 ‘대중‘이든 ‘인민‘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알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 그 ‘대중‘이든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특수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완전히 인간성을 결여한 것이 됩니다. - P140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호칭은 일찌감치 정해져있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이름은 전쟁 전부터의 제국주의적 체질을 그대로 질질 끌며 지금도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에 경제 침략을 계속하는 일본을, 침략당한측의 인민과 연대하여 이 나라 내부에서 타도해 가자고 결의한 그들의 사상과 의지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호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 P177

늑대라는 호칭에서는 아직 누구의 손때도 묻지 않은 고고한 울림이 느껴졌다. 타협도 공모도 세차게 거절하고 싸우는 짐승이 늑대다. 인간에게 막다른 곳으로 몰려 사라진일본 늑대를 떠올려 보면, 늑대를 부대의 이름으로 함으로써 자신들 역시 억압받은 사람 쪽에 있다고 선언하게 될 것이다. - P178

1974년 8월 10일, 미쓰비시 폭파=다이아몬드 작전을 결행한 것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다. 미쓰비시는 구식민주의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일제의 중추로서 기능하며 장사라는 가면 뒤에서 송장을 뜯어 먹는일제의 기둥이다. 이번 다이아몬드 작전은 미쓰비시를 보스로 하는 일제의 침략 기업 식민자에 대한 공격이다. ‘늑대‘의 - P212

폭탄으로 폭사하거나 부상당한 사람은 ‘같은 노동자‘도, ‘무관한 일반 시민‘도 아니다. 그들은 일제 중추에 기생하여 식민주의에 참여하고 식민지 인민의 피로 살찌는 식민자다.
‘늑대‘는 일제 중추 지역을 끊임없는 전장으로 만들 것이다.
전사(戰死)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제의 기생충 이외에는 신속하게 그 지역에서 철수하라. - P213

새로운 뉴스가 들어올 때마다 상상을 뛰어넘은 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자신들이 설치한 폭탄에 의한 것임은 이제 틀림이 없었다. 이미 사망자는 여섯명이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가타오카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그렇게 계속 말하면 사태가 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중얼거림을 되풀이했다. 이대로 차를 무언가에 부딪쳐 죽고 싶은 절망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도 그는 멍한 상태로 기계적으로 운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기 전에 미나미센주에 있는 마사시의 주차장에 차를 돌려놓았다. 그의 임무는 예정했던 대로 끝났으나 불안은 한층 심해졌다. - P205

청산가리를 가지는 것은, ‘늑대‘들 사이에서 미쓰비시중공업 빌딩 폭파 직후부터 이미 여러 번 의논한 일이었다. 미쓰비시중공업 이후사망자의 존재는 마사시 등을 무겁게 덮쳐 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엄연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죽은 자에 대한 속죄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이상, 적어도 자신들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면서부터 그들은 청산가리를 지니기로했다. 경찰에게 체포당했을 때는 결코 입을 열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휴대해야 했다. - P227

7월 말에는 무지개 작전의 최종 계획을 확정했다. 그 계획에 따르면 기폭 조작을 하는 장소는 아라카와 철교에서약 700미터 하류에 있는 자동차도로인 신아라카와대교의첫 번째 교각 아래였다. 마사시가 망을 보고 가타오카가 기폭 장치의 스위치를 누른다. 아마 폭발로 선로는 휙 날아가고 열차는 탈선하여 강물로 떨어질 것이다. 현장에서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도주하기로 했다. 아카바네역에 방치된 자전거 두 대를 훔쳐 자전거 보관소에 맡겨둔다. 한편 양동작전으로 현장 근처의 이와부치 파출소 뒤의 풀숲에 소화기 폭탄을 설치한다. 이는 시한장치로 황족 전용 특별열차를 폭파한 후인 11시 5분에 폭발하도록 설정해 둔다. 사사키는 경찰에 얼굴이 드러났을 염려가 있기에 이날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고 이와부치 파출소 앞의 주유소에 예고 - P270

전화를 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야코도 당일에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그날 아침 일찍 구로이소역으로 가서황족 전용 특별열차의 출발 시각을 확인하고 전화로 마사시에게 알려주는 역할이다. 마사시와 가타오카는 이 전화를 받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네 사람에게 무지개 작전은 완벽한 계획으로 보였다. - P271

왜 이 나라에서는 반권력 투쟁이 지속하지 못하는지 논의했습니다. 확실히 소수의 투쟁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적 - P281

으로 지속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압도적으로 젖어 있기 때문이고 또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가운데 싸울 상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천황을 공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지요. - P282

늑대들의 범죄 - 그 미워해야 할 소행은 오로지 시민을살상했다는 것에 있는 듯하다. 귀신의 목을 따는 것처럼 우선 그것으로 그들은 귀축(鬼畜)처럼 비난당하고 그것으로모든 행위는 덮이고 말았다.
그들은 폭파로 시민을 휘말리게 했지만, 그들이 한 것은반일 투쟁- 기업에 대한 공격, 일제와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 초기, 예컨대 사이공의 레스토랑이시한폭탄으로 파괴되어 다수의 시민이 휘말려 죽은 사건과성격이 다르지 않다. 우리 대부분은 늑대들이 시민 사망자 - P289

를 낳은 것만을 끄집어내 탄핵하지만 해방전선 게릴라의 그것은 사이공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으로 지지하고 쾌재를 부르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그런 수단을 본인은 취하지 않는다, 취할 수 없다 해도 늑대들의 ‘국가 기업과 직접적으로 싸운다‘는 자세는 많은사람이 베트남 해방군을 지지하고, 게다가 끝내 승리한 것을 기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지지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 P290

"언제부터 그 한 발짝을 내디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항소심이 시작될 무렵부터일 거예요. 집회 같은 데 참가 - P371

해서 모두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나서지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마음의 고통은 결코 사라지는 게 아니고 또 지워도안 되지만 거기에 계속 머문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들이 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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