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다국화 시대의 유교 특히 강북에서의 유교는 ‘유교의 쇠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며, 심지어 유교의 역사를 다룬 저작들에서 아예 배제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유교 ‘철학‘이 쇠퇴한 시대일지언정 유교사상더 좁게는 유교적 ‘실천‘이 쇠퇴한 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시대는 유교 본래부터 존재론/인식론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윤리학/정치철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사상가 자신의 타자, 그것도 도교와 불교와 같은 사상의 테두리 자체 내에서의 타자가 아니라 아예 이 테두리 바깥에서 밀려온 절대 타자와 마주침으로써 행하게 된 독특한 역사실험/정치실험의 시대였다고 보아야 한다. - P621
강남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은 강북이 혼란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밀려들기 시작하면서이다. 이 과정에서 강북의 선진문화는 강남의 지방문화를 압도했고, 강북의 인사들이 점차 강남의 인사들을 아래로 밀어내면서 상층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 P622
도교는 현실의 개혁과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포함했다. 현실의 개혁이라는 얼굴은 민중봉기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고, 현실로부터의 초월이라는 얼굴은 양생술 여기에서는 불로장생술, 방중술, 연단술, 신선술 등 갖가지 형태들로 구체화된 ‘술‘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의미에서의 양생술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 P636
강남의 문사- 귀족들은 강북에서의 옛날을 그리워하면서도, 자신- 들의 정치적 지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바로 이런 노력이이 시대를 ‘빛나는 암흑시대‘로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유교 지식인들의 정체성은 후한 정부에서 형성된 청류, 명사, 일민 등에뿌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은 혼란의 시대인 위촉오 시대에 오히려 꽃을 피웠으며, 예전보다는 퇴락된 형태이긴 했지만 서진·동진 시대 - P622
에까지도 이어지고 6조 내내 강남의 귀족제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단지 유교 지식인들 내면의 정체성 유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은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준 구품중정제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었던 데에 있다. 이렇게 ‘기득권‘과지식인들 자신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이 선순환을 이루면서 6조의귀족사회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무에 대한 문의 우위‘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관들도 이 귀족사회에 끼지 못하고서는 출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P623
도교적 초월은 내재적 초월, 들뢰즈식으로 말해 ‘내재면‘으로의 초월이다. 도교는 생명, 신체, 욕망 등 내재적 차원을 자체로서 긍정한다. 아니 이 내재적 차원을 극한적으로 뚫고 나간다. 방중술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욕망의 긍정은 결국 욕망의 정화 과정 이외의 것이 아니다. 개체에게 주어진 불길을 남김없이 태움으로써 오히려 불길 전체즉 도의 차원으로 합일되어 들어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태움은소진이나 고갈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보존과 합일의 이미지를 통해서이해되어야 한다. 태워지는 것은 피상적 욕망이고, 그러한 연소에 반비례해서 보존되는 것은 도와 합일해가는 기ㅡ 개별화를 통해 생겨난, 그러나다시 도와 합일해 들어가는 기이다. 이것이 곧 욕망 정화의 과정이며, 이는 곧 삶과 죽음을 즉 존재와 무를 근본적인 무=존재 속으로 합일해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 - ‘임‘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님‘으로의 이행이지만, 또한 이 아무것도 아님은 모든 것‘이기도 하다. - P638
다국화 시대는 동북아문화가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간 시대이다. 이런 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삶 곳곳에서 볼 수 있거니와, 특히 뛰어난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자연에 대한 애호는 뛰어난 ‘산수문학‘과 ‘산수화‘를 낳은 것이다. - P645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방식은 북조의 경우와 남조의 경우가 달랐다. 북조의 경우 핵심적인 것은 왕들과 승려들의 관계였다. 왕들은 사분오열된 군사봉건제의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불교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호의적이었고, 승려들은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또광범위하게 포교하기 위해 왕들의 후원이 필요했다. - P652
북조의 불교가 왕과의 관계와 기층 민중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다면, 남조 불교에서의 중요한 문제는 귀족들과의 관계였다. 왕권이약한 귀족제 사회인 6조에서 승려들은, 강력한 군인-왕들에게 종사하면서 이들을 어떻게 전륜성왕으로 만들까를 고민했던 북조의 승려들과는 달리, 남조 귀족들의 문화와 어떻게 어울릴까를 고민했다. 이는 곧 이들이 남조 왕족들의 불안을 해소해주고, 귀족들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했음을 뜻한다. 남조의 도가적 유교 지식인들과 서역에서 건 - P653
너온 또는 중국에서 불교로 개종한 인물들을 이어주는 끈은 ‘청담‘이었다. - P654
동북아세계의 국가들은 지중해세계와 대조적으로 유교, 도교, 불교를 모두 포용코자 했다. 그 결과 국가가 종교에 휘둘리기보다 종교가 국가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울러 세 종교 또한대립보다는 융해의 양상을 띰으로써 지중해세계와는 판이한 과정을 연출하게 된다. 또 결과적으로, ‘국교‘ 개념도 생기지 않았고 한 국가 내에 이원적 권력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지도 않았다. - P667
긴 시간이 흘러간 후 이제 유·불·도 세 종교/사상의 통합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신교세계에서는 통합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각각에서의 신은 최고의 원리이며, 따라서 통합을 위해 그 이상의 원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그중 어느 한 신으로 통합되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각 일신교가 숭배하는 신이 최고의 신이기에 어느 한신으로 통합되는 경우란 다른 한 문명이 아예 절멸되는 경우에나 가능할것이다. 일신교‘들‘의 세계는 서로 대립하는 세계, 동일률. 모순율 • 배중율이 지배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북아의 유·불·도는 이런 구도와는 다른 구도 위에서 공존했고(不二‘, ‘ㅡ多多‘의 세계), 그렇기 때문에 삼교의 통합은 시도될 수 있었다. - P6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