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는 우리를 브라흐만(한정적 브라흐만)으로 인도하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핵심은 결국 욕망/욕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사유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르타‘와 ‘카마‘를충족시켜야 그 후 ‘다르마‘와 ‘모크샤‘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욕망/욕심 - P512

은 끝내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욕망은 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역시 사라지지 않으며, 업 또한 욕망이 있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윤회란 결국 욕망과 업의 윤회이다. - P513

힌두교는 브라만적 우주관을 다시 세우고 ‘범아일여‘의 사유를 다시 다듬었다. 세계는 주기적 해체와 재창조를 계속한다. 해체는 브라흐만이 세 현현을 거두어들이는 과정이고, 재창조는 다시 세 현현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 P524

붓다의 가르침은 ‘사제(四)‘라 불린다. 처음에 붓다 사유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고‘라는 ‘고제(苦諦)‘였다 일체개고. 그리고 삶의 고뇌가 어떤 이치로부터 생겨나는가를 12연기설을 통해 통찰하는 것은 ‘집제(集諦)‘이다 제행무상. 그리고 고뇌로부터의 벗어남을 12연기를 거꾸로 생각해봄으로써 이해하는 것은 ‘멸제(滅)‘이다-제법무아. 마지막으로 멸제를 이룰 수 있는 길로서 제시된 8정도가 ‘도제(道)‘를 이룬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붓다의 이 4제는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그리고동시대에 나란히 등장한 지중해 문명에서의 소크라테스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동북아 문명에서의 노자 · 공자의 가르침과 더불어 고대세계의가장 위대한 가르침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 P541

업과 윤회의 사유에서, 붓다의 사유와 플라톤의 사유는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이다. 붓다와 플라톤은 공히 이승과 저승을 연속으로 보았다. 윤회와상기설은 삶의 차원과 죽음의 차원에 연속성의 가교를 놓는다는 점을 공유한다. 플라톤에게 이 연속성은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오히려 해방으로,
"영혼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이지은 업에 입각해 육체의 감옥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붓다에게도 역시 개아는 업의 상태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윤회의 고리를 따라 다시 생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연속성의 끈은 정확히 반대의 뉘앙스를 띤다. 붓다에게 윤회의 고리는 어떻게든 끊어야 할 끈이며, 이런 해탈은 업을완전히 씻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반면 플라톤은 삶은 ‘고‘라는 붓다의 직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는 그가 곧 윤회를 고통으로만 보지 않음을 함축한다. - P544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근본 실체들을 분석해내고 현상을 그 실체로 환원해 현상에 대한 집착,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그런 벗어남을 위해 교단을 조직하고 일정한 계(戒). 정(定)·혜(慧)를 닦아열반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다. 아비달마불교는 여러모로 에피쿠로스학파 - P556

를 연상시킨다. 또, 세계를 그 존재요소들로 세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에 근접하고, 현상세계를 환(幻)으로 보고 그 너머의 실재를 강조했다는 점에서는 베단타 - 미맘사 학파(특히 샹카라학파)에 근접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는 세계의 존재론적 층위들(ontologicallayers)의 복합성이나 존재론적 분절(ontological articulation)의 상대성 등에관련해 현대 존재론의 시선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의 환원주의로 보인다.
또 불교 자체 내에서 볼 때, 후대 불교 학파들이 비판했듯이 실체주의를 벗어나려 했던 붓다의 본지에 거슬러 실체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고 그들이 실체로 지목한 일부는 다른 학파들의 관점에서는 사유의 산물일 뿐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즉, 아비달마불교는 6경 중의 ‘법‘에 속하는 것들을 실재로서 본 것이다. 그러나 아비달마불교는 경험세계를 꼼꼼하게 분석해 ‘무아‘를 집요하게 증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시 불교적 사유의한 핵심 갈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 P557

나가르주나는 우리가 실체화하는 이원성은 착각임을, 진상(tathatā)은 ‘불이(不二)‘의 차원 즉 ‘공‘에 있음을 역설한다. 이는 아비달마불교의 ‘아공법유‘에 대해 ‘아공법공‘을 분명히 하는 생각이며, 사실 바이셰시카 - 니야야학파를 포함해 세계와 자아 그리고 경험에 대한 ‘분별‘을 위주로 하는 모든 학파들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공 자체의 실체화를 포함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분석적 사유의 원초적인 한계를 논파하려 한다. 그에게 이런 논파는 ‘공‘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고, 붓다의 가장 위대한 설법인 연기설이 그리고 그가 제시한 중도의 길이 다름 아닌 ‘공‘임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 P564

세계를 ‘전개‘의 측면에서 본다는 것은 상키야학파를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와 구분해준다. 물론 어떤 사유에서나 그렇듯이 양자에는 모두 구조와 생성의 측면이 존재하지만, 니야야 - 바이셰시카 학파가 구조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상키야학파는 생성에 무게중심을 둔다. 바이셰시카학파가무수한 원자들이 집적되어 사물들이 생겨가는 인중무과론적 사유를 펼쳤다면, 상키야학파는 단 하나의 원질(原質)인 프라크르티가 계속 전변해 세계를 만드는 인중유과론적 사유를 펼쳤다. - P580

굽타 왕조(4~6세기)는 인도의 고전 문화를 완성했으며, 이 시기에 마하바라타』, 『마법전』, 『바가바드기타』 등이 대성되었다. 그리고 6파 철학이그 온전한 형태로 구축되었다. 산스크리트어가 문화언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며, 불교학자들도 산스크리트어로 저술 활동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힌두교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굽타 왕조는 이미 5세기 말에 사실상 저물게 되고, 이후 10~11세기에 무슬림들이 쳐들어오기전까지 인도 아대륙에는 굽타 왕조에 비길 만한 왕조가 들어서지 못했다.
이 혼란기에 인도에서는 상업이 크게 위축되었고, 상인 계층의 비호를 받던 불교와 자이나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농촌 중심의보수적 성격의 힌두교는 이 혼란기에도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나갔다. - P589

특정 교리를 떠나서 힌두교를 핵심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아바타라‘
의 사상이다. 아바타라의 존재론은 개별자들의 동일성이 간단히 타자화됨으로써 세계의 존재론적 분절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고 유동화한다. 개별자들이 서로 전변하는 세계에서는 어떤 동일성도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본질들의 위계를 틀로 하는 지중해세계의 일신교들과 대조적이다. 이슬람교가 인도를 600년간 지배했음에도 종교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두 종교의 이러한 이질성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은 전변의 세계는 개별화의 원리를 무력화함으로써 모든 것을 ‘두루뭉실하게‘ 만들어섞어버리며, 이 때문에 보다 철학적인 힌두 사상가들은 분명한 존재론적분절을 긋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도 사유의 근저에서 작동하는 아바타라의 사유. 차라리 이미지는 타자를 그 또한 전변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자체 내에 녹여버리는 독특한 속성을 유지했다. 바로이런 이유에서 힌두교는 한편으로는 전변의 사유의 대척에 있는 이슬람교같은 절대 타자와는 결코 섞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체내의 다양한 사상들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양극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볼 수 있지 않을까. - P607

일찍 잡아도 4세기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전에는 왜 불교의 서진(進)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이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헬라스문명의 힘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독선적인 유대교조차도 그리스화되는 세계였던 지중해세계에, 또 정치적으로 "오리엔트"
쪽을 얕보던 헬레니즘세계에 불교가 쉽게 스며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방의 환경은 달랐다. 동방 특히 동북아는 ‘종교‘의 문명이 아니라 ‘정치‘의 문명이었다. 기성의 종교가 불교를 강고하게 막아설 수는 없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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