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문학 선집 1 -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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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식과 문화의 유입은 여성들의 삶과 지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학교를 비롯한 근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자각한 여성 주체들의 움직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신여성의 등장, 개화 계몽의 열기로 꽉 찬 공론장의 부상은 여성의 읽기와 쓰기를 이끈 요인들이다. 이 시기 공적 담론은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 매체를 통해 유포되었고, 이와 같은 공론장에 글 쓰는 여자가 출현한 것은 여성문학사의 기원을 이루는 중요한 장면이다. 특히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의 강제 해산을 반대하며 대중들이 광장에서 연설의 장을 열었던 사건은 집 안의 여성들이 ‘소문’이나 ‘신문’이라는 간접화된 통로로나마 공론장의 열기를 경험하고 광장의 목소리를 내도록 촉발했다. <여자계>(1917), <신여자>(1920), <신여성>(1923) 등 여성 매체는 논설, 독자 투고뿐 아니라 수필, 소설, 시 등 문학적인 글쓰기를 훈련하는 장을 마련했다. 여성의 권리와 각성, 자유연애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이 시기의 작품들은 민족이나 가부장적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개인의 목소리를 근대적 문학 양식에 담은 신여성에 의한, 신여성에 대한 글쓰기다. - P15~16


한국 여성문학 선집 시리즈는 남성 중심의 문학사 중심으로 이루어져온 한국문학(사)에 여성문학을 여성의 관점으로 서술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그동안 여성문학 선집이 출간된 이력이 있으나 대부분 시기가 1960년대 이전으로 한하고, 장르도 소설로 편중되어 있었다. 이번 한국 여성문학 선집은 여성 연구자들이 20년 정도를 투자하여 특정 시기,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근현대 시기 여성 문학 텍스트를 엄선해 골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펀딩하기 전에 어떤 텍스트가 실릴지 감이 오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막상 작가의 목록을 보니 아는 작가의 이름도 있지만 알더라도 이름만 아는 경우,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구입하기를 잘했다 생각한다. 시리즈는 총 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98년 무렵부터 1990년대 이후까지 넓은 시기를 아우른다.


1권은 한국 여성문학이 탄생한 시점인 독립협회 활동 시기인 1898년부터 1920년대까지를 다룬다. 


성상 폐하의 외외탕탕하신 덕업으로 임어하옵신 후에 국운이 더욱 성왕하여 이미 대황제 위에 어하옵시고 문명개화할 정치로 만기를 총찰하시니 이제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가 성의를 효순하야 전일 해태한 행습은 영영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준행할 새 사사이 취서되어 일신우일신 함을 사람마다 힘쓸 것이어늘 어찌하야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빠져 있나뇨. 이것이 한심한 일이로다. 혹자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가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야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 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남의 절제만 받으리오. - 여학교설시통문, 이 소사 김 소사 , P36~37


이 글의 주인공은 두 ‘소사’다. ‘소사’는 결혼한 여성을 일컫는 말로 이 소사는 양성당 이씨로 왕가 종신 출신이었고, 김 소사는 양현당 김씨로 순성여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인물이다. 양성당 이씨는 찬양회 회장이었기도 했다. 찬양회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 여기고 순성여학교 설립을 후원하는 역할을 한 모임이었다. 찬양회는 이후 나오게 되는 여성 단체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글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당시는 대한 제국이 있던 때로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새울 취지를 남긴 글이다.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는데 남자가 주는 것만 받아 먹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 것이 눈에 띈다. 


길바닥에, 구을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도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 저주, 김명순, P53




아랫목 벽에 걸린 로댕의 ‘다나이드’를 사진 박은 그림이며 머리맡에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란 영시를 흰 비단에 옥색으로 수놓은 족자며, 또 이름 모를 물새가 방망이에 붙들어 매이어서 그 자유인 오 촌 가량의 범위를 못 벗어나고 애쓰는 그림이 어느 것이나. 자유를 안타깝게 바라는 소련의 취미가 아니랴. 이런 것들을 뒤돌아 보는 소련의 마음이 어찌 대동강의 능라도를 에두른 이류가 합쳐지지 않기를 바라랴. 흐름은 제방을 깨뜨린다! - 도라다볼때, 김명순, P123


1권에 등장하는 작가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이가 김명순이다. 일단 생각이 깨어 있다는 것에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글을 정말 유려하게 잘 쓴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을 보면 평소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경험하는지 절로 알게 된다. 

그녀는 특히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다. 김명순은 매일신문사 기자로도 활동했고 개인 시집을 내기도 했으며 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발간된 조선 시인 선집에 여성 작가로 유일하게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저주>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이 얼마나 덧없고 유한한 감정인지 알 것이다. 이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도라다볼때>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 여자의 감정을 잘 묘사한 소설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박사가 된 여성의 설정은 당시 신여성의 트렌드를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어쨌든 지금 생각하니 내가 생각하는 이성은 그이와 같은 이는 아니었나이다. 남성답지도 못하고 줏대가 없고 여자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이왕 상당한 아내를 둔 이상 절대로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는 자각이 없는 그이었나이다. 

내가 처음에 그를 사랑한 것은 이성이라고는 도무지 접촉해보지 못하다가 부모의 명령으로 눈감고 시집을 가서 친절하게 구는 이성을 대하니 자연 정다워진 데 지나지 않는 것나이다. - 자각, 김일엽, P223


우리의 조선 여자 사회는 아직도 유치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 이때는 어느 때입니까? 세계는 바야흐로 개조가 되려 하고 새 문명의 서광은 훤-하게 비치옵니다. … 몇 세기를 두고 우리를 냉혹하게도 압박하고 우리를 극심하게도 구속하던 인습적 구각을 깨뜨리고 벗어나서 우리 여자가 인격적으로 각성하여 완전한 자기 발전을 수행코자 함이외다. 남자들은 이를 이르되 파괴라, 반항이라, 배역이라 하겠지요. 고래로 우리 여자를 사람으로 대우치 아니하고 마치 하등 동물같이 여자를 모두 몰아다가 남자의 유린에 맡기지 아니하였습니까? -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김일엽, P232~233


김일엽은 이화학당 출신으로 잡지 <신여자>를 창간한 주인공이다. 이후 입산 후 수계를 받았다. 시나 소설보다는 논설이나 수필을 많이 썼다. 

<자각>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간 남편이 결국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뒤 여자가 모진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게 되는데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지만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서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은 자각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환경이 바뀌어도 본인이 깨닫지 않으면 결국 변할 수 있는 기회는 없으니까. 

수필이나 논설을 많이 썼다고 하더니 역시 달랐다. 소설보다 아래 논설문의 글이 훨씬 좋았다. 읽고 있으면 절로 손목을 불끈 쥐게 된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 인형의 가 제3막, 나혜석, P240


나혜석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글(이는 그림도 마찬가지)을 발표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작품들이 적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그녀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했고 매일신보에 만평을 연재하기도 했다. 삼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다른 독립 운동가들을 돕기도 했다. 화가로서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꾸준히 입선하는 등 그녀는 참으로 귀재였다. 

<경희> 등 여러 소설을 남겼다. <인형의 가>는 조선판 노라를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지 않겠다는 주체성의 포효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글들을 만날 수 있다. 앞에는 원문, 원문이 끝난 뒤에 현대어를 실어 두어서 보기가 좋았다. 원문이 해석이 어렵지는 않지만 단 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아무래도 오늘날과 다른 철자의 표기, 띄어쓰기가 적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능한 원문으로 읽어보고 뒤에 현대어로 변경된 부분을 읽는다면 비록 그 시기를 경험하지는 못했더라도 작품을 통해서 그 시간을 더 잘 경험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한다.


2권은 1920년부터 1945 해방 이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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