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우리의 "다른 반쪽을 재평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바를 밝히는 작업은 모두 우리 정착민들이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며, 우리가 협력에서 얻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가볍게, 그리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갔다는 점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행동할때 기민함과 유연함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자연계와 지속적으로 균형을 맞춰갔다는 점에서삶의 또다른 방식, 인류의
"다른" 반쪽이 먼 과거의 비옥한 정원에서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시대 이후로 줄곧 유지해온 삶의 방식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P23

지표 투과 레이더로 탐사한 결과, (테베) 유적지에는 170여 개의 돌기둥들이 있었다. 현재는 그 유적지가 수백 년 동안 사용되다가 버려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 기념물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곳을 계속 사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긴 쓰레기와 파편들에 기둥들이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훗날 그곳에 다른 주요 정착지가 세워지지않아서, 채석되어 잘라진 기둥들을 재사용하려는 사람이 없었으리라는점도 유적이 남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 P38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질 당시 에덴을 벗어난 강의 동쪽, 그러니까 그곳의 주변 경관은 오늘날보다 비옥했다. 야생풀, 밀, 보리가 자라는 초원을상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나무, 그리고 이제는 그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는 아몬드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들의 관목숲에 흐름이끊기기도 한 그 초원은 가젤과 오록스의 터전이었고, 이주하는 거위들,
식용 가능한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 그리고 유적지에서 나온 뼈의 퇴적물로 드러났듯 인간을 위협한 일부 동물들의 서식지였다. 슈미트 교수도한 차례 이상 말했듯이 그곳은 "낙원과도 같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풍요로움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멀리까지 방랑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배회할 필요 없이 성역을 개발하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들이 살고 죽은 곳이었다. 정착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양식을 가져다주었다. - P40

우리는 멸종을 우리 시대에우리가 야기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지구상의 대형 짐승들 중 절반 정도를 차지했던 거대한 검치호랑이와 우람한 땅늘보는 괴베클리 테페에동물 조각 기둥이 세워질 무렵에 이미 사냥으로 멸종된 상태였다. 그곳의 성역도 어쩌면 돌에 새긴 일종의 회한문悔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농업은 인류에게 거대한 도약이 아니었을 소지가있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거둔 성공으로 식량 공급이 대폭 줄어든 수렵채집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필사적인 위기관리였을지도 모른다. - P55

문자가 발명되고, 산처럼 거대한 지구라트가 처음 지어지며, 최초로 원통인장이 사용되고, 오늘날 우리가 시간을 측정(초와 분)할 때에 사용하는60진법 숫자 체계, 각angle, 지리 좌표가 창안된 곳이 우루크였다. 또한 우루크에는 자연계가 제압되고, 하천이 통제되어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며, 삼림이 베어지고, 야생동물과 야생인간들이 길들여지거나 살해되거나 추방되던, 기원전 2500년 이전에 우루크를 다스렸던 길가메시라는 역사상의 왕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가메시가 느꼈을 비통함도 어느정도는, 그와 그의 백성들이 세계를 바꾸고 있고, 그리하여 이제는 아무것도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데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길가메시 왕과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도시와정착에 대한 욕구 그리고 자연계와의 접촉의 상실이 조화를 이루기가 매 - P71

우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 P72

유목민과 정착민, 옥토에 사는 사람들과 황무지에 사는 사람들의 투쟁, "최초의 형제 살해"를 범한 오시리스와 세트,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투쟁 사이에는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세트와 카인에 대한 평가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카인은 추방된 반면, 세트는 수천 년간 이집트인들의 숭배를 받은 것이다. 이는 이집트인들의 숭배가, 그 투쟁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만 이해했던 로마와 기독교 시대보다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며 미묘한 반응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그보다 1,000년앞선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강력한 왕 길가메시와 그를 억제할 야생의 인간 엔키두가 모두 필요하다고 인식했듯이, 초기 이집트인들도 비정착민들의 창의력과 땅의 경작자들이 가져온 질서와 다양성이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경작자와 목축인, 정착민과 유목민. 이집트인들이 직면했던 중요하고 영속적인 도전은 이 둘 간의 균형을 어떻게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 P92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낙원을 뜻하는 파이리 다에자pairi-daeza, 아버지와 아들이 오래 전에 심은무화과와 포도 나무들 사이에서 오디세우스의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은막을 내린다. 유목민의 스텝 세계 쪽을 돌아보는 대신에 인도유럽인의신념과 관습이 지중해 세계로 흡수되는 정착적 미래, 유목민과 정주민이조화와 결합을 통해서 우리가 고대 그리스 문화와 현대 서구 세계의 토대라고 알고 있는 세계를 고대하면서. - P105

페르세폴리스는 제국 문화의 다양성을 돌로 찬양한 곳이었고, 그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이나 수사와 같은 제국 도시들은 온전하게 남겨두고 페르세폴리스만 확실하게 파괴한 이유일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세폴리스의 기단에 깃든 신성함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니 그것의 중요성 역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방 원정에 나서기 전 올림포스 산의 낮은 경사면에 페르세폴리스와 흡사하게조성된 기단의 성소에서 제우스 신에게 희생 제의를 올렸다. 그 시대에는가장 웅변적이고 설득력 있게 취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상징이었고,
그랬던 만큼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것은 아케메네스왕조와 그들의 낡은 세계질서에 사망 선고를 내린 행위였다. - P117

유목민, 즉 바르바로이barbaroi(이어족異 혹은 야만족)에는 도시 밖에서 충일하지 않은 삶을 사는 "열등한 종족"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은 접근하기 어렵고 극한의 경관과 기후를 가진 외딴곳이었다. 그들에게는 읽고 쓰는 능력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플라톤의 견해로는 도시 성벽 내 사람들이 거둔 위대한 두 성과, 즉 예술과 산업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때와 우리 시대에도 일어난 일이듯이, 그러한 성과가 정신에는 만족감을 주었을지언정, 그 진보를 이루기위해 치른 대가에는 예전의 순수했던 생활 방식, 자연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살았던 삶을 희생시킨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꺼림칙한 우려가 항상함께했다. 19세기 초에 윌리엄 블레이크와 20세기에 브루스 채트윈이 그랬듯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성벽 너머의 잃어버린 황야, 아르카디아,
보다 순수하고 무구했던 먼 옛날 우리의 상태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지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 P124

흉노와 서쪽에 있는 그들의 짝 스키타이인은, 헤로도토스와 사마천이 말하는동과서의 세계를 연결하면 혜택이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텝 민족은 사치품 교역을 이끌어간 초기의 견인차였다. 성벽 내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국민 위주로 유대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주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불 말 타기의 명수가 되고 수레와 전차를 발명했던 스텝 민족은방대한 거리를 횡단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을알고 있었고, 낯선 것에도 편안해했다. 또한 생소한 관습을 용인할 줄 알았고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이 볼 때 - P152

그리스인, 로마인, 중국인, 그리고 심지어 페르시아인은 자연계를 외면하고 성벽 너머에 사는 사람들, 하늘에 버림받은 종족이었다. 신이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 채찍(아틸라)을 보낸 이유도, 동쪽에서 다가오는 로마인들에 대해서 우려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우리의 사치품과 우리 여인네들이 지불한 대가에 대한 대플리니우스의 탄식도 무의미해 보였다. 실크로드 무역은 제국으로서는 사소한 문제였기때문이다. - P153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 다시 말해서 역사의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원전 1만 년의현저한 업적 모두가 정착민들의 성취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괴베클리테페의 건설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훈족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그 밖의 종족들 역시 최초의 석조기념물을 세운 것에서부터 말을 길들이고, 그 말과 연결해 수레 및 전 - P168

차를 만든 것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진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알고 있다. - P169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할리드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지 1세기가조금 지난 700년대 중엽에는,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의 일부 지역과발칸 반도의 오지로 규모가 축소된 반면, 아랍의 지배권은 인더스 강에서부터 대서양까지 뻗어나가 이전의 어느 제국보다 커졌다. 하지만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핵심 측근과 장군들의 대다수는 도시 정착민이었지만, 아랍인의85퍼센트와 8세기 무슬림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삶을 살거나 유목민의전통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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