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가 멸망한 후 중국은 청 제국의 강역을 계승했고 만주족은 중국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사의 영역은 중국 내지China proper를 넘어 청 제국이 지배한 광활한 공간을 포괄한다. 중국은 만주 지역을 동베이東北라고 부르며 중국사가 포괄하는 공간으로 편입시켰다. 반면 한국에서 만주 지역은 한국 고대사의 공간으로 간주된다. 두 나라는 만주 지역에서 태어난 국가를 각자 ‘국사’의 일부에 배치했고,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자의 역사 공간은 충돌한다. 양자의 사이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조상이 영유했던 그들만의 역사와 그들만의 공간은 실종되어 갔다. 이 글은 만주족이 살았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으로 서술했다. 한국과 중국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 데 이 글이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건주여진의 조상인 오도리부는 무단강의 하류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회령에서 거주하다가 서진하여 압록강의 북방에 자리 잡았다. 해서여진의 기원인 훌룬은 동류 송화강의 지류인 훌룬강 유역으로부터 서진하여 송화강 만곡부에서 거주하다가 남하하여 북류 송화강의 중류역에 정착하여 울라와 하다로 발전했다. 여진의 주요 부족의 인구 이동이 일단락된 것은 16세기 초중반이었다. 이 시기에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으로 구분되었다.

한국인은 이 지역을 ‘만주’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청대에 만주인은 ‘만주’를 지명으로 쓴 적이 없다. 만주인에게 ‘만주’는 족명일 뿐이었다. 청대 만주인은 만주 지역을 행정적으로 성경盛京, Mukden·기린吉林,Girin·흑룡강黑龍江, Sahaliyan ula으로 분할하여 불렀다. 때로는 이를 합쳐 불러야 할 현실적 이유 때문에 동북東北, dergi amargi ba이나 관외關外, furdan i tule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은 중국 내지의 동북쪽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고 ‘관외’는 산해관의 밖에 있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둘 다 만주 지역 자체의 단일한 정치적인 속성에서 도출된 이름이 아니고 수도인 북경北京을 기준으로 한 방위적 성격을 지닌 명칭이었다.

훗날 청대에 만주족 황실은 조상인 몽케테무르의 거주지를 만주어로는 ‘오모호이Omohoi’라고 쓰고, 한자로는 오막휘鼇莫輝, 아막혜俄漠惠, 악막휘鄂謨輝 등으로 다양하게 음사했다. 오모호이의 위치에 대해 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아막혜라는 지명이 있는 현재 길림성 돈화敦化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모호이는 돈화가 아니고 오음회, 즉 조선의 회령이었다. ‘회령’이란 지명은 김종서가 육진을 설치하던 시기인 1434년(조선 세종 16)에 오음회에서 ‘회會’ 자를 취하고 거기에 ‘안녕하다’는 의미의 ‘령寧’을 붙여 만든 이름이다. 따라서 회령은 오모호이의 ‘호이會’를 계승한 지명이다.

1432년 몽케테무르가 북경에 조공하고 있는 때에, 조선은 여연閭延과 강계江界를 약탈한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여연을 약탈한 여진족은 파저강의 건주여진이 아니고 훌룬 우디거였다. 그러나 조선은 약탈자가 건주위의 이만주라고 오판하고 그를 공격 목표로 결정했다. 이때 북경에 있던 몽케테무르가 문제가 되었다. 세종은 정벌군이 출정하기 전에 사령관인 최윤덕崔閏德에게 비밀 지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조선군이 건주위와 전투할 때 북경에서 돌아오는 몽케테무르가 이만주에 조력하면 ‘모르는 체하고’ 그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종의 밀명은 사후에 명의 문책이나 여진인의 반발 등을 피하기 위해 의도된 오살誤殺을 하라는 것이었다. 몽케테무르는 조선군과 길이 엇갈렸고 이만주를 지원하지도 않아서 의도된 오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최윤덕이 받은 비밀 지시는 세종의 인자하고 온유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마키아벨리적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북방 변경 지역의 개척을 준비하던 세종에게 명의 정1품 우도독 지위와 수천 명의 직속 백성을 보유하고 변경에서 거주하는 몽케테무르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보여 준다.

1427년(조선 세종 8)에 몽케테무르는 큰아들 권두와 손자 마파馬波를 조선에 파견했다. 권두는 세종을 알현하여 그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심하여 나라를 받들라’고 당부한 뜻을 전하고 그 자신은 한양에서 시위로 종사하겠다고 밝혔다. 세종은 그의 충성은 알겠으나 그가 명에 종사했으니 조선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21) 권두는 1431년(조선 세종 13) 다시 한양을 방문하여 과거에 아버지 몽케테무르가 태종으로부터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어 북변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부친이 노쇠한 지금 그 지위를 자신에게 계승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권두는 이 요청의 말미에서 조선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조선 경내에서 자랐으니 이 해골은 이미 조선의 물건입니다. 청컨대 우리 부친의 직임을 대신하여 북변의 간성干城의 임무를 맡도록 해 주십시오".
22) 권두가 이때 건주좌위의 배후에 있는 명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보면 곧 건주좌위의 조선에 대한 복속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세종은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권두의 과도한 충성 발언이 부담스러웠는지 권두를 접견하지 않았고 그에게 상장군을 수여하지도 않았으며 하사품만 주어 돌려보냈다. 권두는 송별연 자리에서 "시위를 하려고 왔는데 전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니 실망이 크다"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

오갈암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조선 영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에 의해 전투의 참상과 경과가 관찰되어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34) 오갈암 전투에서 건주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상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홀라온忽喇溫’은 훌룬의 음역이며, 그 실체는 부잔타이가 이끈 울라의 군대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잔타이를 하질이何叱耳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잔타이의 여진어 칭호인 하스후 버일러Hash? beile(좌左버일러)의 하스후를 표기하기 위해 ‘하何’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이두문자 ‘질叱’, 그리고 ‘후h?’ 음을 표기하는 ‘귀耳’, 이 세 글자를 결합한 것이다. 부잔타이는 오갈암 전투에서 패전한 후에 여허와 협력하여 건주에 대항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1599년 누르하치는 여진 통일의 장정을 시작했다. 그해 건주여진은 하다를 공격했고, 하다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비첩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G’ag’ai, ?盖(?~1600)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티다가 멸망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건주여진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방파제가 되어 여허의 멸망을 막아 준 것은 명이었다. 명은 1619년 1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몇 년 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명의 공격이 완전히 실패하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명은 여허를 후원하고 지켜 주기는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버일러 긴타이시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동해’가 ‘동쪽 바다’를 뜻하는 어휘에서 만주 지역 동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전화했을 것임은 상식적 차원에서 추론 가능하다. 기록에서도 ‘동해’가 단순히 ‘동쪽 바다’의 의미에서 지역명으로 전화해 가는 단계의 다음 용례를 찾을 수 있다. ‘동해에 가까운 후르카국dergi mederi hanciki h?rha gurun’,
44) ‘동해에 가까운 사견국使犬國, dergi mederi hanciki yendah?n tak?rara gurun’,
45)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 나라 사람dergi mederi jakarame tehe gurun’,
46) ‘동해 쪽의 와르카dergi mederi ergi warka’
47)가 그 용례이다. 용례에서 보이듯이 아마도 ‘동해 가까운dergi mederi hanciki’에서 ‘가까운hanciki’을 생략하고, ‘동해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dergi mederi jakarame tehe’에서 ‘연안을 따라 거주하는jakarame tehe’을 생략하면서 ‘동해Dergi mederi’가 지역명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홍 타이지 시기까지 후금은 만주 지역 동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 초기에 후금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명, 몽고, 조선과 대치해 갈수록 인구의 부족이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후금은 직접 통치하의 총인구가 100만 명 미만이었다. 반면에 명의 인구는 약 1억 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약 1,000만 명 정도였다. 인구가 적은 것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신생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후금에게 인구의 증가는 국가의 성패가 걸린 문제였다. 동해여진인은 후금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가장 좋은 집단이었다. 누르하치 시기와 홍 타이지 시기 동안 무력으로 포획하여 끌고 오거나 자진 이주한 동해여진인의 수가 10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동해여진은 양적으로 상당한 인구를 가진 집단이었다. 양보다 질은 더 좋았다. 동해여진인은 몽고인이나 조선인과 달리 여진어를 쓰는 집단이기 때문에 건주여진에 동화되는 것이 쉬웠다.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니루라는 이름의 수렵 조직이자 전투 단위는 1니루에 성인 남성 10인 정도가 포함되는 작은 규모로 존재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1601년 무렵 기존의 니루를 성인 남성 300명당 1니루의 큰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상시적으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군사 단위로 재탄생시켰다. 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잘란jalan과 그 상급 단위인 25개의 니루로 구성되는 구사g?sa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1601년 니루를 만들 때 함께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황黃, suwayan, 홍紅, fulgiyan, 백白, sanyan, 남藍, lamun의 4개 구사가 조직되었고, 정복전을 거치며 건주여진에 복속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1615년에 양황?黃, kubuhe suwayan, 양홍?紅, kubuhe fulgiyan, 양백?白, kubuhe sanyan, 양람?藍, kubuhe lamun의 4개 구사가 증설됨으로써 모두 8개의 구사, 즉 팔기가 완성되었다. 이때 누르하치의 통치하에 포함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 g?sai niyalma이 되었다. 따라서 흔히 말하듯이 팔기제를 군사제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팔기제는 군사제도였을 뿐만 아니라 행정제도이자 사회조직이었다. 다시 말해 팔기는 누르하치가 건설하고 확장시킨 국가 그 자체였다.

기존의 씨족과 촌락 구조를 깨지 않고 니루로 만들거나, 기존 구조를 깨고 니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누르하치는 팔기를 청 초기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니루의 규모는 다양했는데, 자발적으로 복종한 집단은 니루의 정원인 300명에 못 미치더라도 자체적으로 니루를 만들 수 있게 허락했고, 저항했던 집단은 분할하여 니루들의 구성원의 수를 맞추는 데 충원했다. 또한 혈연과 지연의 내부적 결합이 흔들리지 않고 니루로 이어진 경우에도, 니루를 각 구사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부족의 결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만주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가 누르하치 통치 시기부터 그의 세력권 내의 여진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드물게나마 사용되었고 홍 타이지 재위 시기에 ‘주션’을 대체한 공식 집단명으로 선포된 후 사용 빈도가 대거 증가했다는 정도이다.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의도했던 것이다.

중국을 정복해서 중원 왕조의 외피까지 입은 만주족은 티베트·신강·몽골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 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되었다. 이런 성취와 유산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한족과 우월한 중국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족에 흡수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주족은 청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해 갔지만, 한인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만주족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현재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滿族’이라는 민족명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1,000만 명을 상회한다. 근래 이들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조직해서 만주족 문화의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만주’가 지나간 과거의 주인공만이 아닌 ‘만족’의 전신으로서 오늘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실체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허투알라 일대에서 이동해 온 다수의 여진인을 요양의 한인들과 한 집에서 거주하도록 조치한 만한동거滿漢同居 정책은 요양 한인의 반발과 저항을 야기했다. 한인은 우물에 독을 풀어서 여진인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소극적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요양의 한인을 설득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학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했다.

누르하치 시기의 심양 궁궐은 외조와 내정이 하나의 영역 내에 있지 않고 서로 떨어진 두 공간에 분리되어 있었다. 이 점이 중국식 궁궐 구조와 크게 다른 점이었다. 건물의 명칭도 한어가 아닌 만주어였다.

홍 타이지의 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 제도의 지향은 필연적으로 중국식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고, 그 임무를 수행한 한인 관료를 통해 한어와 중국식 문화가 후금의 권력 핵심부로 유입되었다. 홍 타이지는 한인과의 공존을 위해 아버지 누르하치와는 다른 유화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요양 한인의 학살에 대해 아버지 누르하치의 오류를 비판했다. 이어서 누르하치가 노예화시켰던 한인을 평민으로 격상시켰으며 그들 가운데 지식인을 관료로 기용했다. 이들 한인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식 문화를 후금에 도입함으로써 후금에 관료제를 정착시키고 후금을 중앙집권적 국가로 변화시킨 주역이었다.
1636년 홍 타이지는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에서 ‘다이칭 구룬’으로 개칭하고, 만주족의 한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고의 대칸이 되었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고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민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

강희기 동순의 이면의 목적은 시행 시기의 상황에 따라 각기 상이하다. 그러나 표면과 이면의 목적을 통합하여 구조적으로 보면, 표면의 목적은 언제나 조상 능 참배와 성공의 자신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면의 목적은 시기마다 닥친 상이한 위기의 관리와 타개를 위한 것이었다.

건륭제가 심양의 궁궐을 증축한 것은 만주족의 정체성을 재수립하고 조상의 고토인 만주 지역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한 중심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건륭제가 심양 궁궐에서 시행한 행사 가운데 샤머니즘 제사를 지낸 사건은 만주족의 정체성 수립과 만주 지역을 연계하고 궁궐이 그 중심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잘 보여 준다.

지금 중국 흑룡강성 영안寧安의 청대 지명은 닝구타였다. 이 곳은 먼 과거에 발해가 건국된 곳으로 발해의 다섯 수도 가운데 하나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었던 곳이었다. 조선 전기에 조선인은 이곳을 고주古州나 구주具州라고 불렀고, 그곳에 사는 여진인을 혐진우디거라고 불렀다. 『만주실록』에서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기 전까지 동해여진 워지부의 영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1610년에 닝구타를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두 번째의 닝구타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개국한 지역인 허투알라 인근, 즉 현재 요령성의 신빈현 내에 있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신빈의 닝구타는 청대에 기록된 누르하치의 사적과 관련한 문헌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청대에 만문과 한문으로 제작된 지도에서도 신빈현 일대에서 닝구타Ningguta, 寧古塔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신빈 일대에서 닝구타와 유사한 지명은 조선인 신충일이 남긴 『건주기정도기』에서 ‘림고타林古打’라는 형태로 유일하게 나타난다. 신충일은 1595년(조선 선조 28)에 건주여진의 도성인 퍼알라Fe ala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후에 『건주기정도기』를 썼다. 그는 이 기록에 수록한 지도에서 허투알라에서 약간 떨어진 소자하蘇子河의 상류역에 ‘지명림고타地名林古打’라고 기입했고, 소자하의 상류를 ‘림고타천林古打川’이라고 지칭했다. 엄밀히 따지면 림고타林古打가 닝구타Ningguta의 음역인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대에 그리고 현재까지도 영안의 닝구타와 신빈의 닝구타가 착종되며 빚어져 온 혼란은 림고타가 닝구타의 음역이고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의 여섯 형제를 지칭하는 ‘닝구타의 버일러들Ninggutai beise’의 닝구타가 이 지명에서 비롯한 명칭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닝구타 버일러’의 닝구타는 ‘나단타’나 ‘우윤타’와 동일선상에 있는, 형제들의 수로 그들을 합칭하는 호칭이자 일족을 부르는 명칭이고, 지명에 기인한 명칭은 아닌 것이다. 만약 지명 림고타와 ‘닝구타 버일러들’의 닝구타가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닝구타가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일 것이다. 즉 ‘닝구타 버일러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림고타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청조의 만주족 통치자들은 그들의 먼 과거의 전설적 조상인 부쿠리 용숀의 신화를 장백산이라는 탁월한 랜드마크에 연결해 갔다. 그 이유는 이 신령스러운 지리적 표상을 자신들의 왕조와 황실의 정통성을 빛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태조고황제실록』은 첫머리 부분에서 『태조무황제실록』과는 달리 장백산을 조상의 발상지라고 확실하게 규정했다. 또한 이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의 서술과는 달리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과 부쿠리 용숀 탄생 신화라는 두 개의 상이한 사실을 하나의 단락 안에서 하나의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다. 결국 이 기록에서 부쿠리산은 수많은 산으로 이루어진 장백산 산무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그곳에서 태어난 부쿠리 용숀은 곧 장백산에서 태어난 것이 되었다. 이로써 장백산과 부쿠리산과 부쿠리 용숀 삼자가 완벽하게 결합했다.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에 장백산이 첨입되어 결합하는 최초의 기록은 『태조무황제실록』이다. 이 책은 1636년(숭덕 1)에 편찬되고 여러 번의 개수改修를 거쳐 1655년(순치 12)에 정본定本이 완성되었다. 책의 권1 첫머리에서는 「선先 겅기연 한의 훌륭히 행한 규범」에 기록된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와 그의 일란 할라로의 이동과 몽케테무르로의 계보 연결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태조무황제실록』은 이 서술과는 달리, 부쿠리 용숀의 탄생 신화 앞에서 장백산의 지리적 배경을 서술하고, 그에 뒤이어 부쿠리 용숀의 탄생지인 부쿠리산을 서술하면서 위치를 설명하는 지리적 기준점으로 장백산을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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