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의 전술핵 배치는 남북한 모두에 새로운 군사전략 및 방위•체계에 대한 과제를 제기했다. 전술핵 투하에 대응하여 어떻게 생존성-유지하면서 군사작전을 전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먼저, 한국군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대응 방안이 논의되었다. 원자전 발발 가능성에 대한 위기의식 아래 모색한 군사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전술핵 투하에 따른 생존성을 보장하기 위해 부대를 경보병화하고, 진지 방어에서 기동 방어로 작전 개념 변경을 검토했다. 또한 한국전쟁당시의 진지 방어 및 탈환전 중심에서 벗어난, 원자전에서의 방어진지를 활용한 역습 중심의 전투수행 방안이 제기되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남측의 원자 및 유도무기 등 신형무기의 도입을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미국의 폭격 및 핵전쟁에 대비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일단 미국의 전술핵 투하를 상정하고 군사노선을 설정하기 시작하면서 비무장지대 땅굴이 구축되었고, 이는 1962년 ‘4대 군사노선‘의 채택으로 이어졌다. - P223
북한이 중국 외의 사회주의 군대 경험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65년경부터로 보인다. 공세적·수세적 상황에서 미사일과 핵무기를 포함 - P246
한 군사적 행동에 관한 연구가 북한군에 도입되었다. 북한군에서의 정치·도덕 교육은 여전히 우세했지만, 현대식 무기와 군사학, 군사기술발전 등 군의 현대화 및 무장화가 강조되었다. 이를 위한 소련의 원조도 재개되었다. 1965년 5월 북한과 소련 간에 체결된 군사협력 협정에따라,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영공 방위 영역에서의 무장과 장비 조달, 지대공 미사일 등이 차관 형식으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100북한은 1966년 10월 5일 제2차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에서 군사 정책의 변화를 공식화했다. 김일성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지원과 조속한 ‘조국통일‘을 강조했다. 또한 ‘경제국방병진노선‘(經濟國防竝進路線)을 채택하여 총 예산의 10%였던 국방비를 30%로 증액했다. 비무장지대 군사충돌 양상의 질적 변화가 나타난 것이 바로 제2차조선로동당 대표자회 이후였다. - P247
오울렛 초소는 "JSA로부터 900m도 안 되는 곳, 중립국감독위원회의 스웨덴·스위스 캠프로부터 600m 이내인 곳"이다. "‘군사분계선과도 바로 붙어 있다. 초소와 군사분계선 사이의 거리는 자료에 따라 25~80m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만큼 오울렛 초소와 군사분계선이 가깝다. 이 초소에서 내려가면 바로 군사분계선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오울렛 초소 북쪽 편에서는 조금만 앞으로 가면 북측이든, 남측이든 자칫하면 군사분계선을 잘못 넘기 쉬운 상황이었다. 1979년 12월 7일 근무 교대하던 미군들이 길을 잃고 분계선을 넘어 북한 지뢰밭에 들어가 사상자가 발생했던 일도 18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1982년 8월28일 새벽 2시경, 주한 미 2사단 제31보병연대 1대대의 일등병 화이트(Joseph T. White)가 월북할 때 넘어간 곳도 바로 오울렛 초소에서였다. - P255
1967년 오울렛 초소 사건은 북한군과 유엔군(사실상 미군) 간에 벌어진 군사충돌이었다. 발단은 북한군 3명의 명확한 군사분계선 위반이었지만, 그들을 발견한 현장의 미군 3명과 오울렛 초소에서의 즉각적인 총격으로 인해 그야말로 ‘사건‘이 되었다. 총격전은 북측초소로까지 확대되어 50여 분이나 진행되었고, 북측 지역에 있던 2명까지 총 5명이 사망했고, 1명이 부상했다. 북측과 유엔사 측은 언론을 통해 그리고 군정위 본회의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상대의 도발을비난했다. 오울렛 초소 사건은 사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닿아 있었다.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라는 문제가 구조적인 원인이었고, 이는 군정위의정전협정 후속 합의에서 비롯되었다. - P269
한국 비무장지대의 방책 구축은 미국이 1965년 남베트남 비무장지대의 철조망 방책 구축 가능성을 검토했을 당시, 거의 동시에 한국 비무장지대에도 적용 가능한지 여부를 파악하여 베트남과 유사한 방책을 한국 비무장지대에도 설치하기로 하며 시작되었다. 1967년중반 이후 베트남과 한국의 비무장지대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점에 철책이 구축되기 시작했고, 이 방책에는 고도의 특수장치들이 포함되었다. 새로운 철책의 비무장지대 설치 소식이 언론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9월이다. 1967년 9월 주한미군 대변인은 대공방책이 얼마 전부터 서부전선의 미 제2사단 지역에 구축되어왔으며 이미 완성 단계에이르렀다고 밝혔다. - P285
1960년대 후반에 진행된 비무장지대 및 한국의 생태 연구는 기획자와 참여자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했다. 연구를 기획하고 지원한 미국의 유관 연구소와 정부는 미국의 자연 보호 정책을 확산하고 조사 결과를 수집할 수 있었으며, 한국의 과학 인력을 양성했다. 스미스소니언연구소는 한국의 조류 연구 결과를 수집했고, 미 국방부는 철새의 이동경로와 전염병 매개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화된 한국의 조류학자와 대학 연구소 등을 지원하고 육성했다. 국내 학자와 연구기관은 미국의 기획과 지원에 참여하면서 국내 학계를 대표하는 연구자 및 연구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국내 자연 보호 운동을 전개했다. - P321
1968년 이후에는 그야말로 전면적으로 불모지역 장기화 작전이 수행되었다. 한국 1군은 "살초제를 이용한 불모지역 장기화 작업"을 실시했고, 주로 실시한 기간은 4~8월이었다. 1968년 4월 15일 "철책선, GP및 RB진지, 민통선 북방 주 보급로 5,778핵타에" 블루와 오렌지제 등의 살초제가 살포되었다. 목적은 "적을 조기에 발견하여 포착 섬멸하고현 작전지역 내의 사계청소 노력을 감소시키며 불모 지역을 장기화하기위해서"였다. 335 1969년 5월 20일에서 7월 29일 사이에도 "군은 지상으로 침투하는 적의 활동을 제한하고, 적을 조기에 발견 및 섬멸하기 위하여" 철책선 후방 지역에 살초제 살포 작업을 시행했는데, 이때 살포 면적은 1.070ha였다. - P336
7.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사민이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함을 허가하지 않는다. 8. 비무장지대 내의 어떠한 군인이나 사민이나 그가 들어가려고 요구하는 지역의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느 일방의 군사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도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9.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별한 허가를 얻고 들어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군인이나 사민이나 비무장지대에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
이 세 조항은 현재까지도 비무장지대 출입 통제에 있어서 핵심적인규정으로 작동하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의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과 문제를 유엔사가 통제하는 데 대한 근거로 작동하고 있어서, 사회적 쟁점이 되곤 하였다. 그 때문에 이 조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둘러싼 기존 연구는 두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이 세 조항이 군정위와 양측 사령관에게 부여한 권한을 관할권(jurisdiction)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비무장지대 출입 및 군사분계선 통과에 대해서는 유엔사의 허가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규정이 순전히 군사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명시된 정전협정 서문을 토대로, 이 세 조항은 군사적 영역에 국한된 것인데 유엔사가 비군사적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권한 행사에 대해서까지 허가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경우이다. - P349
양측의 치열한 선전전은 비무장지대 안에서 펼쳐졌고, 때로는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전개되었다. 비무장지대의 군사시설 제거 방법과 절차를 제안했던 유엔사 또한 오히려 심리전을 위한 무장화를 진행하고있었다. 대북심리전과 관련한 시각·청각 장비들이 강화되었다. 비무장지대에서는 1971년에도 대북 심리전 지침에 따라 심리전 대대가 운영되었다. ‘시각 심리전‘은 심리전 대대 전단 소대가, ‘청각 심리전‘은 확성기 소대가 맡았다. 전단 살포와 유엔기 게양, 크리스마스트리 및 십자가 설치 등이 시각 심리전의 대표적인 양상이었고, 확성기 설치 및 방송이 청각 심리전의 양상이었다. - P393
대성동과 ‘기정동‘ 두 마을을 통한 남북한의 체제 선전과 경쟁은1950년대 후반, 더 이르게는 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북한은 전쟁 과정에서 점령한 38선 이남 지역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정전회담장 인근 마을을 ‘평화‘라고 명명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평화리가 속한 판문• 연백 · 개풍·개성 일대를 ‘(신)해방지구‘라고 명명한 것과같다. 북한은 이곳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면서 민심을 확보하고자했다. 이는 전후, 북한 전역에서 진행되던 복구사업 및 사회주의로의 전환과 연계되어 더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대성동이 ‘자유의 마을‘로 개발된 것은 분명 ‘평화‘의 영향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평화리의 복구 진척에 대비되는 "버림받은 무릉도원"의상황은 ‘이상촌‘ 개발과 민심 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대성동을 관리하던 유엔사와 한국 정부는 대성동을 ‘자유의 마을‘이라고 명명하고 공회당과 문화주택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 ‘쇼윈도‘는 효과적이지 않았다. - P493
정전협정이행에 관한 대표적인 유엔사 규정인 554-1에 따르면, 정전협정 이행은 ‘군사작전‘이고, 비무장지대는 ‘작전지역‘이다. 이는 유엔사가 한국정부의 비무장지대 출입을 원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미국이 남북한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 P500
이제는 정전된 지도 70년이 지났다. 과시나 명명으로서의 ‘자유‘나 ‘평화‘가 아니라 제도적이고 실질적인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적극적으로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국제적 역학관계와 한반도의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지혜롭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 분단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이를 통해 한반도에 가해지는 세계 냉전 경계의 압력을 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철통 방비 태세의 긴장을 통해서가아니라 소통을 통한 이완이 필요하다. 1954년 유엔사 군정위가 지적했듯이, 주권을 가진 정부로서 한국 정부는 비무장지대의 비군사적 영역에서 남북한 간에 합의를 이루고 이행하는 주체이다. 남북한 간의 경계를 우리가 설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상상과 자신감, 정교한 추진력이필요하다. - P504
새로운 경계선을 상상해본다. 분단 경계선을 치우기도 전에 무슨 또다른 경계선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새로운 경계선은비무장지대의 다양한 가치를 조율하는 지혜의 경계선이다. 강고한 냉전구도를 탈피하면서도 생태와 환경을 보존하고 역사와 문화를 기억할 수있는 길이다. 국제적 역학관계에 의해 주어지는 경계선이 아니라, 한국인(Korean)의 관점에서 그릴 수 있는 다양한 평화의 길이다. - P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