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 P232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① 풍도 해전, ② 평양 함락, ③ 황해 해전, ④ 뤼순· 다롄 전투, ⑤ 웨이하이웨이 전투, ⑥시모노세키조약의 6단계로 보고 있다. 치치장 교수도 풍도 해전을 ‘갑오전쟁의 제1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 및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풍도 해전보다 이틀 앞선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제를 청일전쟁의 전사로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논외로 처리하는 것이 학계의 일반론이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중국과 일본 간의 국제법적 논쟁이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국제법적으로 조선 관련 문제는 전혀 언급되거나 논의되지도 않고 있다. - P233

청국군은 성환과 아산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즉각 전면전을 구상하지 않고 완만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는 조선 주재 청국군 수뇌부전체의 인식이라기보다는 일찍부터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던 리훙장의전략적 판단과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평양 주둔 청군도 남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청국 정부는 평양 파견 부대와 평안도 주민의 협력을 크게 믿고 있었다." 이렇듯 청국군이 오판하여 장기 주둔책으로 일관한 반면 일본 군대는 계속 조선에 증파되었고 평양 방면에서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P261

8월 1일 일본 천황 메이지는 <선전조칙>을 공식 발포했고 같은 날청국 황제도 <개전조칙>을 발포함으로써 전쟁을 공식화했다. 원래 일본의 선전포고 초안에는 ‘청국 및 조선국에 대한 전투를 선언한다는것이 들어있었는데, 최종안에서는 ‘조선국‘이 삭제되었다. 조서에서 메이지는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광서제는 ‘중국의 번속‘임을 강조했다.
전쟁에 임하면서 청국과 일본은 각각 조공을 매개로 하는 화이질서와국제법을 명분으로 하는 공법질서를 조선에 제시했다. 이는 외교력과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주의 시스템의 새로운 변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중 이른바 ‘독립국가‘ 이슈는 일본의 선전책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적지 않은 효과가 있었고 이로부터 청은 세계의 여론전에서도밀리기 시작했다. - P262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그런데 당시 전리품 순회 전시 품목에는 평양 전투 시 막사에서 수습했다는 ‘조선 부인의 상의‘도 있었다. 조선 부인의 상의를 전시한이유는 청국군이 진중에 ‘부인‘을 부를 정도로 군대에 기율이 없고, 싸울 의지도 없어 전투하면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1894년 12월에 발간된 또 다른 상업 서적은
"성환의 역, 아산의 적영에서 분포한 물품・・・・・・ 중에는 조선 기의 상의가 있다. 이 상의는 조선의 민영준이 청국 장수를 위로하기 위진중에 보낸 관기가 착용한 것이다"라고 매우 악의적으로 소개하였다. 후일의 청일전쟁 공식 보고서인 《동경시축첩대회>에서도 특별히 "부인의 옷과 같은 것은 대개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입안의 밥알을 내뿜게 된다"며 이를 비웃고 있다. 그러나 부녀자의 의복까지 수습하여악의적 선전도구로 삼은 것은 일본이 강조한 ‘문명‘이 아닌 ‘야만‘의광고 선전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아직도 이들 물품을 보관 중이다. - P305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일본인 특파원들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 보도보다는 일본제국의 나팔수로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도식을 적용, 이웃나라를 모멸하는 배외적인 충군애국주의로 일관했다. 여기서 대조선 지배 정책실현 과정에서 청일전쟁이 조선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창출했는지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에서 정한론征논의가 다시 체현되고 이때 만들어진 왜곡된 ‘조선상‘이 실체적 진실처럼 장식되어이후 황국사관·식민사관 등을 거치며 이른바 ‘혐한‘의 기제로 크게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던 종군기자의 활동상을 주요 언론사별, 특파원의 주요 직군별로 구분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여 보다 객관적 시각에 근거해 연구해야 할 시급성이 있다. - P333

리훙장은 평양에 주둔한 4명의 통령에게 군기를 엄히 정돈하고 상민의 어려운 상황을 위무하여 소란한민심을 안정시켜 후환을 막도록 했다. 청국군의 엄정하지 못함으로 인해 심지어 ‘자진하는 주민들도 많았다 한다." 평양의 - P425

평양 주민의 전시 준비 상황은 동원과 자발적 협력이 병존했다. 평양에서 42일만에 축성한 요새는 17~50세 조선인 노역 동원의 결과물이었다. 보루마다 약 500명의 수비대 외에 360명의 조선인 인부가 견고한 요새를 축성했다"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은 관내 조선군 2,000명을 모집하여 청국군 부대에 부속시켰고, 800명의 민병을 징집했다. - P427

평북 용천 관아에서 보내온 서울 소식 ‘정사관한 두루정사에마리)‘을 보면 평안도의 구정과 신정, 즉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으로 인한 청국과 일본의 권력 교체 과정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김영식에 의하면 관제와 의복제도 및 기타 장정은 한결같이 ‘왜제‘를 따랐고 대관은 모두 개화관료들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 진영에서는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도백과 수령을 교체하지 못하도록 하고, 청국 조정에서 결정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임지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신정을 일체 발송하지 말도록 했다"면서 그 결과 감사의 거취가 기한이 없게 되었으니 한탄스럽다고 기록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직후 반일무장전투를 전개하던 평양 병정의 부대였던 서영도 결국 해체되었다. - P443

일본군 부대가 황해도 강령을 왕복하면서 해주 서쪽 취야장에 머물던 때 최윤학이라는 자가 일본군들에게 취사를 제공한 일로 동학농민군에게 살해당하고 가산도 모두 빼앗긴 일이있었다. 8월 경기도 장단에서는 일본군 군량 수송 명목으로 군의 좌수남형철이 ‘군량을 실어 보내는 수레를 대신하는 돈[軍流馬代]’이라 가칭하고 각동집강을 비롯한 촌민을 수탈하고 각 면과 각 동에 강제로 징수하는 등 폐해를 일으켜 동민들이 원정을 올렸고, 그결과 그는 다음 해 4월 경기감영을 거쳐 법부 고등재판소로 압송되었다.‘ 남형철은 8월 24일 혼성여단 사령부가 장단에 도착했을 때 특이하게도 일본 군대를 위한 인부 동원을 주선하는 등 자발적으로 적극 협력한 자였다. 여단장 오시마는 이에 즉석에서 그에게 10원을 주어 격려했고 또한 경성의 오토리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정부가 포상하도록 한 바 있다. - P448

중화 전투의 특징은 초기 전투가 일본군과 조선 민중의 전투라는 데 있다. 평양과 중화에서 주민들이 격렬히 저항했기 때문에 여러명의 척후가 사망했고 남은 일본군들은 황주 방향으로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청일전쟁에 관한 일본 군부의 공식 기록으로 참모본부가 편찬한 《명치 이십칠·팔년 일청전사>에서도 평양을 정찰 중이던 마치구치 중위가 "한인이 그 위력을 빌려 공연히 일본인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중화로 물러가 그 임무를 계속했다" 고 정리했다. 이미 평양 전투이전에 중화에서 진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우려 - P456

하였고 실제로도 일본군은 정찰대를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일본.
통역관의 과실이 이를 초래한 것으로 축소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과 청국군은 각기 황주성과 평양성을 근거지로 하면서중화 지역을 최전선으로 하는 소규모 공방전을 계속했다. - P457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156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히야마 유키오는 1894년 6월~1895년 12월 기간 전쟁 지역 입원 환자 총 11만 5,419명 중에 조선에서 이질에 걸린 환자가전체의 9.7퍼센트인 1만 1,164명이 된다는 분석 자료를 제시했다. 그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조잡한 가옥과 불결하고 가난하다는 강렬한 조선멸시관이 만들어졌고 그러한 멸시관은 청국과 대비해 더 강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히야마는 조선의 위생 문제만을 크게 강조하면서 일본 - P482

사들의 사활이 걸린 질병의 원인이 조선의 불결한 위생 문제에 있었던것으로 이해하려는 듯하다. 실제로 병사들은 조선과 청국의 열악한 위생환경 때문에 전염병에 감염되어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일본군의 식량 부족에 따른 영양 결핍, 비타민 결핍, 오랜 기간의 노지야영생활, 죽음에 대한 공포감, 장기간 행군의 피로, 이문화에 대한 부적응 등은 간과하고 있다. 또한 같은 기간 일본에서도 창궐했던 것처럼이질은 주로 하절기에 유행하던 질병으로, 일본군 주력이 1894년 가을이후 청국 관내로 진입하여 봄부터 추석 이후까지 조선에 주둔함에 따라 이곳에서의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P483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27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 • 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성환과 아산 전투에서는 3명, 풍도 해전에서는 84명, 평양전투에서는 566명을 체포했다. 내용 설명에 의하면 일본 육·해군에 포로가 된 자, 투항한 자 및 병상자로서 구호를 받은 자 등을 포함, 평양에서 사망자 59인 중 47인은 각기 반항하여 총살된 자를 포함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명‘으로 표현된 60명 중 살아남은 자는 결국 단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포로 처형은 조선에서 행해진 것만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또 다른 표에는 만주 뉴장성에서 체포된 청국군 중 13명의 사망자 중에는 반항하다 총살당한 자를 포함했고 하이에서도 하사 이하 사망자 90인 중 반항 때문에 총살된 13인을 포함하고 있 - P582

다고 되어 있다. 청일전쟁 8년 후인 1902년 작성된 이 ‘일청전역 통계‘에서는 평양의47명 이하 포로 처형이 모두 ‘총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제외하면 당시 상황을 목격하고 기록한 모든 문서 자료와 종군일기, 상황을 묘사한 삽화 등에서는 총이 보이지 않았고 칼로 목을 벤 것으로만되어 있다. 예컨대 1895년 3월 25일 뉴장에서 일본군 제3사단 기병제3대대 제2중대 제4소대 일등졸 니시무라 마츠지로는 친구에게 보낸편지에 "최근 전투로 매사 소심한 소생이 한층 대담하게 되어 한두 사람을 목 베어 죽이는 것이 마치 평일에 이를 잡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공식 정리한 것은 후일 여러 나라로부터 야만적 행위를 비난받을 것을 우려한 일본군 수뇌부가 ‘참수‘를 ‘총살‘로 분식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P583

조선인 인부는 일본인 인부와 함께 일본군에 부속되어 압록강을어 중국 안동현과 여러 지역에서 양곡과 물자 수송에 동원되었다. 육포병 소좌로 압록강 전투에 참여했던 오시아게 모리조는 10월 30일 등기에, "후방에서 양곡을 취하여 전방인 청국 안둥현으로 전송했다. 겉은 날 매일 2,000~3,000명의 한인 인부를 사역하여 뒤에서 모집하고또 앞으로 보내기를 매우 바쁘게 하여 성황을 이루었다.....대체로 황군의 운이 우세하니 한인 인부의 위풍도 한결같다. 운반하는 일에 이익을 얻는 것도 큼에 따라 이 무렵 은화는 1원 화폐만으로 1역에 1원인고율로 은으로 지출했다. 대체로 지폐는 그들이 신용하지 않고 또 그들은 서로 신용도 없어 지불할 수 없었다" 6"라고 적고 있다. 오시아게의이 기록을 통해 조선인 인부의 중국 관내 동원은 일본군이 처음 압록강을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일의인원도 2,000~3,000명 정도였으며 임금은 1인당 1원씩 은화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 P616

조선 정부가 청국으로보내는 인부 징집을 공식적으로 정지한 것은 그해 3월 중순 평안감사의 전보를 통해 알 수 있다.

의주부의 반접하는 일을 끝냈고, 물의를 빚은 육지 운송을 청나라땅에 바닷길로 옮기게 해서 인부의 차출을 정지시켰으며 백성에게농작을 권면하니 여러 읍이 편안하게 쉴 만합니다. 백성을 위한 일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어제 15일에 임소로 돌아왔습니다.

평안감사 김만식은 의주에서 일본 군대를 영접하고 군수품 수송과인부 차출을 끝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그는 그간의 육지 운송은 ‘물의‘를 빚었고 이를 해운으로 전환시킴에 따라 인부로 차출되었던 농민들이 비로소 농토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이와는 달리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직전인 4월 12일까지도 주롄청으로 보내는 인부 1,081 인과 안둥현행선박 10척 등 조선인 인부와 조선 선박은 계속 동원되고 있었다. - P621

1894~1895년 청일전쟁 기간 조선의 민중들은 이방인들의 폭력으로 강요된 통제와 동원이라는 차별과 배제의현실에서도 타자를 대하는 방법에서 열린 태도open arms를 견지하고 있었다. 농민군들은 일찍이 동학에서 표명한 양반과 상놈의 차별 없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베풀고 돕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인 ‘유무상자와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서로 보살피는 ‘빈궁상휼을 기꺼이 실현하고 있었다. 인명존중 사상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무장포고문布告文>의 서두 외에도 정부군과싸우는 과정에서도 ‘배우고 실천하는 근본‘ 강령으로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배고픈자는 음식을 준다, 가난한 자는 진휼한다, 아픈 자는 약을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학농민군 접주 유광화는 동생에게 보낸편지에서 "나라가 환란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는 결의를 다졌던 그 또한 형장의 이슬로사라졌다. 공존을 위한 힘없는 자들의 포용, 그것은 같은 기간 전투력을 상실한 패잔 동학농민군과 청국군 잔류자와 상인들을 수색·살해·집단처형했던 일본군의 행위와는 크게 대비되는,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이었다. - P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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