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 P610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1

몽골 지역에서 청조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오랜 목표, 즉 유목민들을 변화시켜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만주족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만주 지역에서 준가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감소했고 가축과 영토 또한 크게 감소했다.
신장에서 만주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공식적으로 청조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동투르키스탄인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않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이슬람 문명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모든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초석에 도전적이었다. 황제는 라마교도가 되지 않고도 라마교의 합법적인 후견인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그는 무슬림이 되지 않고서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P701

몽골이나 신장과 달리 티베트는자기 고유의 토착적인 중앙 정부를 갖고 있었다. 티베트의 군사력은중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만주족은 이 종교 국가에 대한 달 - P702

라이 라마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주었다. 19세기 내내 달라이 라마 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고, 베이징은 외국의 영향력을 배척하고티베트의 고립을 유지하려는 라싸의 노력을 지지했다. - P703

메리 클래버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조뿐만 아니라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문명 또한 1860년대 걸출한 인물들의 걸출한 노력으로 살아남아 이후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동치중흥이다.131) - P808

메리 라이트의 탁견은 앞으로도 이 시기의 역사를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조의 중흥은 "중국의 전통적 제도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기 위한 최후의 위대한 노력을대변하며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1870년대 초 장쑤 성, 산둥성, 직예성 등에서는 구질서가 분명하게 회복되었다. 쑤-쑹-타이 지역의 ‘대호들‘은 탈세를 계속했다. 아역들은 다시 산둥 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금 징수를 독점하거나 부가세를착복했다. 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층 신사들(심지어 예성의 하층 신사들조차)은 세금 징수인 혹은 말썽많은 ‘송‘ 혹은 송사가 되어 아역과 결탁하거나 경쟁했다.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서양식 무기를 이용할 수있게 된 여러 성의 용영, 심지어 재훈련된 녹영군 때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청조가 관료 인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면서, 총 - P824

독과 순무가 지방 관원 임명에 대한 역할을 확대시켜 행정적 개혁을모색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융통성이 점차 제한되었다. - P825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자강이라는 용어는 혁신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촉구하는 구호가 아니라 재정 지출과 관료층의 기득권을정당화하기 위한 상투어가 되어버렸다. 국내 질서는 대체로 유지되어지방에서 발생하는 많은 봉기는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1894~1895년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라고선언되었던 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강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혁신들은 장기적으로 일정한 결실을 가져왔다. 이처럼 새로운 정책은 전통적인국책과의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국강병‘ 책이 점차유교식의 덕치주의를 압도했던 것이다. 실시된 정책들이 어중간해 그리 중요한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과 태도가 소개되었고, 교육·행정 제도상의 변화는결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과 기술 분야에서 등장한 새로운유형의 인물들이 물론 아직 무계획적이고 기회 또한 아주 적었지만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게 되었다. 중국을 ‘부강‘ 하게 만들려는 열망은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점점 증가하고 있던 당시의 개명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 P830

서양의 침입이라는 문제가 중국 지식인들의 정신 속에서 좀더 핵심적인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점점 더 증가하게 되었다.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태도는 점점 더 약해지게 되었으며, 적어도 1890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중국의 출현을열망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여전히애쓰고 있던 ‘복음주의 선교사들‘에 대해 이들 신흥 개혁 지향의 중국인들은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한 세대 이전부터 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오고 있던 ‘현실 참여적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새로운 동지애를 표시했고, 심지어 잠시 동안이었지만 열성적으로 이들 선교사들의 제자 역을 자임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선교 사업이 미친 영향은 대단히 복잡했다. 너무 복잡했기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하다가는 그것의 참모습을 흐리고 말 뿐이다. 실제로 선교와 관련해서는 많은 상이한 충격이 있었으며, 각각의 충격들은 중국인들에게서 일련의 상이한 반응들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그러한 충격과 반응의 상호 관계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양했다. - P909

대부분의 개혁가는 1900년경이 되면 진보의 논리와 함께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가져다줄 이익에 대한 무비판적신뢰를 새로운 세계관에 융합시키려 들게 되는데, 이 두 가지 개념은당시 선교사들의 저작에서 지겹도록 되풀이되던 주제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선교사들은 서양의 학문과 제도 그리고 그에따른 부와 권력은 어쨌든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데서는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캉유웨이 같은일부 사람들은 종교가 중국을, 나아가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캉유웨이도 막상 본인의 종교를 선택해야 하게 되었을 때는 선교사 스승들에게 최대한 양보한다는 것이 결국 기독교화된 유교였다. 중국인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양보였지만 선교사들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 P9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