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 P158

자아의 경계가 당신이 느끼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면, 자신을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계 안에서 수축할 것이다. 반면에 - P158

다른 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지 않으며, 외롭지 않고, 우리 자신이라는 섬에 발이 묶여 버린 이들과 달리 취약하지 않다. - P159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 - P170

건강할 때 당신의 몸은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는 한 덩어리의영역일 뿐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을 때는 당신의 몸이 장기와 체액, 화학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몸이 작동하는 방식에 탈이 날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부위에서 통증을 느낄 수도 있고, 상처를 입고나서 자신의 뼈를 직접 보게 될 수도 있다. 혹은 엑스레이 사진을보며 살아 있는 살덩이 아래 있는 죽음의 뼛조각들을 떠올릴 수도있다. 불구가 될 수도 있고, 신체 일부를 잃을 수도 있고, 관(管)이나, 혈류의 방향을 바꿔 놓는 측로, 판 같은 기구들을 달고 다녀야할 수도 있다. 당신의 몸에 있는 화학 성분이나 호르몬이 변하고, 약물이 투여될 수도 있다. 몸이라는 체계가 그렇게 열리고, 그와함께 몸에 대한 의식도 깨어난다. - P191

실잣는 이는 형태가 없는 것에서 형태를, 조각들로부터 연속된 것을,
흩어진 사건들에서 서사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왜냐하면 이야기꾼은 또한 실을 잣는 이, 혹은 천을 만드는 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굽이굽이 흐르며 우리들 각각을 서로에게 이어 주고, 목적과 의미,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어떤 길처럼 보이는 그곳으로 이어 준다. 그것은 그날 늦은 밤까지 해변에서 우리가 했던 일처럼 우리 뒤로 바늘땀 같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 P195

해가 갈수록 나는우리가 감정을 나타낼 때 다른 표현을 쓰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깊은, 혹은 얕은이라는 표현은 어떨까?
사람들은 종종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슬픔을 날려버리려다가 딴 데 정신이 팔려 그 깊이까지 함께 날려 버리는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어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울게 한다.
"희망이 곧 역사로 이루어지는 순간, 아주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던 어떤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그와 함께 어떤 질서를 알아보고 또 만들어 내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드러나는순간, 그저 놀랄 만큼 아름다운, 도덕적인 아름다움까지 포함하는 어떤 순간, 정의가 행해지고 진실이 존중받고 질서와 일체성이 회복되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어떤깊이 있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 P207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그 - P223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 P224

불교에서 말하는 차가움은 무관심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소란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의미한다. 거리를 두고 보면 어떤 법칙이나 관련성을 보게 되고, 대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너무 가까이서 보면 대상은 그저 표면밖에없거나, 무질서하게 한데 뒤섞여 버리고 만다. - P251

어둠 속에서는 여러 가지가 하나로 섞인다. 그렇게 열정은 사랑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의 결과로 모든 자연과 형체가 생겨난다. 섞이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자아를 규정하는 경계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어둠은 무언가를 낳고, 그렇게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든 예술이든, 미지의 것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영역, 다음에
"무슨 일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 P271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창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빛 속에만 머물지 않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면 생각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그림자가 드러나고 다른 이들도 알아보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빛 속이 아니다. - P272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 P278

듣는다는 것은 귓속의 미로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니게허락하는 것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각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의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 P284

감정이입은시각예술에도 조예가 깊던 한 심리학자가 만들어 낸 용어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 1909년 에드워드 티치너가 처음 제안하기 전까지는 ‘공감‘, ‘친절함‘, ‘안쓰러워함‘, ‘동정‘, ‘동질감‘ 같은 단어가 그 일반적인 의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독일어로는 ‘Einfühlung‘으로 번역되는데, 마치감정 자체가 다가가는 것처럼 ‘들어가 느끼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path‘인데, 그리스어로 열정이나 괴로움을뜻한다. 비애, 병리학, 동정같은 단어의 어원이 모두 같다. 감정이입이 ‘오솔길‘을 뜻하는 고대 영어 단어 ‘path‘와 동음이의어를 어원으로 가지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다. 엘린이 만든 어두운 미로의 제목이 ‘진로‘였던 것도 마찬가지다. 감정이입은 당신이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일 때, 그것을 보살피며 그곳에 가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때 나서는 여정이다. 눈앞에서 괴로움을 직접 목격할 때 - P286

도 그 사람이 관절에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최근에 집을 잃어 버렸는지를 알고 싶다면 말이 필요하다. 머나먼 곳의 괴로움은예술 작품을 통해, 이미지나 음성 기록, 아니면 이야기들을 통해당신에게 와 닿는다. 그런 정보들이 당신을 향해 출발한다. 그리고당신이 그것들을 만난다면, 그 만남은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 P287

우리는 정상적인 것과 미친 것, 좋은 것과 파괴적인 것 사이의 미세한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 마치 뚜렷한 경계가 있다는 듯 - P301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식인 풍습 역시 정도의차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얼마만큼, 어떤 방법으로 식인을 하고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취하고 있는 그 타인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취하고 있으며, 누군가는그 덕분에 즐거움을 얻고, 누군가는 범죄를 저지르고 악몽을 꾼다. - P302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의 흰색과 무언가를 썼다 지운후의 흰색은 같으면서 같지 않다. 말을 하기 전의 침묵과 말을 한후의 침묵도 같은 침묵이면서 같은 침묵이 아니다. 눈은 만물이성장하는 시기의 앞과 뒤에 내린다. 내가 어머니와 화목한 관계를유지했던 시기는,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과 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진 후였다. 어머니 당신이 지워지고 있었다. 다시 흰색으로 돌아간 부재를 향해 가는 종이처럼. - P325

과거라는 짐에서 벗어나자 세상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각각의 케이크 한 조각은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고, 각각의 꽃 한송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다. 어머니는 치매 환자 요양병원에서 지내면서 많은 것에서 즐거움을 얻었고, 어떤 때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알츠하이머병이 얼마나 끔찍한 병

가끔씩, 어머니의 병이 갑자기 닥쳤더라면 더 충격적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대신 어머니는 아주 천천히 변해 갔고,
또 다른 전환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일도 잦았다. 어머니가 초반에는 내게 애정과 관심을 보인 탓에,
그 어느 때보다 부모 같은 느낌이 제대로 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많은 일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점에서는 어린애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력이나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본 것을 해석하는 뇌의 능력이 점 - P331

점 떨어지고 있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일어나는 ‘아그노시아‘, 즉 알아보지 못하는 증세였다. 당시어머니는 사람을 얼굴이아니라 목소리로 알아본다고 했다. 얼굴은 이제 없었다. 독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가능했다. - P332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과거의 어머니와 과거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다. - P339

어머니가 내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화를 내던 시절, 나 역시 내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끔찍해하고 비슷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닮았는지, 어머니가 나의 가장 본질적인 취향이나 관심사 혹은 가치체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 동안 도덕적인 질문과 원칙에 사로잡혀 있었고, 사람의 삶은 그가 이룬 것과 그가 기여한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물려받았다. 좀 더 작은 것들도 있다. 꽃이나 메마른 나뭇가지를 보고 즐거움을 얻는다든가, 책을 좋아하는 점, 일종의 불안감과 불확실성 같은 것들. 물론 외모도 어머니를 많이닮았다. - P340

우리가 도입부만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 끝나지 않는 것, 자르지 않은 끈, 미완의 무엇, 열린 문, 탁 트인 바다의 불멸을 원한다면? 우리가 여전히 백조인 오빠들을 더 좋아한다면, 아직 윗도리로 완성되지 않은 쐐기풀을, 황금보다 지푸라기를, 성배보다는 거기에 이르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면 어떻게 될까. 모험 자체가 성배이고, 바다가 곧 신비의 묘약이다. 당신이 운이 좋다면 예배당에놓인 잔 앞에 이르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P363

응급 상황이란 무언가 갑자기 나타나는것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나오는 ‘응급 상황‘의 첫번째 정의는 "가라앉았던 사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현재는 많이 쓰이지않음"으로, 이는 ‘부상‘의 정의와 동일하다. 두 번째 정의는 "가려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마치 물놀이를 하던 사람이 갈대를 헤치고 나오는 것처럼, 누군가의 입에서 비밀이 새어 나오는것처럼. 그다음에 가서야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가 나온다. "예상치못했던 일이 발생한 상태, 즉각적인 대처를 서둘러 해야 하는 상태." - P364

북미 원주민들의 설화에서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없고, 여정을 나섰던 이가 돌아온다는 확신도 없다. 잠든 새의 눈물을마시는 나방. 계속 자고 있는 새는 무심하게 자신을 내어 주고, 배를 채운 나방은 날아간다. 우리는 슬픔을 먹고 살고, 이야기를 먹고 산다. 그 이야기가 열어 주는 널찍한 공간에서 우리는한계를 넘어 상상력을 여행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불완전하고 조각난, 미완의 자아의 가능성을넓혀 보라고 재촉한다. - P3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