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의 선우가 글을 올려 조회할 것을 원한 지가 5년이었다. 소들이 말하기를 "國庫만 허비하니 우선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揚雄이 글을 올려 간하였다.
"신이 듣건대 六經의 다스림은 혼란하기 전에 다스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兵家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單于가 글을 올려 조회하기를 요청하는데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니, 어리석은 신은 漢나라와 흉노가 이로부터 틈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흉노는 본래 五帝도 신하로 삼지 못하였고 삼왕도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틈이 - P161

생기게 해서는 안 됨이 매우 분명합니다. 秦나라 始皇의 강함과 蒙恬의 위엄으로도 감히 西河를 엿보지 못하여 마침내 長城을 쌓아서 경계로 삼았고, 마침 漢나라가 처음 일어남에 의 위엄과 30만의 병력으로도 平城에서 곤궁하였으며,高皇后 때에 匈奴가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한 짓을 하였는데 대신들이 權書(임시방편으로 둘러댄 글)를 보낸 뒤에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孝文帝 때에 匈奴가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정탐하는 기병이 雍州와 甘泉에이르자 京師가 크게 놀라서 세 장군을 출동하여 細柳,棘門,霸上에 주둔시켜 대비한 지 수개월 만에야 비로소 파하였고, 孝가 즉위함에 馬물의 속임수를 써서를 유인하려고 하다가 한갓 재물을 허비하고 군사들을 수고롭게 하기만 해서 한 명의 오랑캐도 볼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單의 얼굴이겠습니까. 그 뒤에 社稷을 위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고 의 계책을 계획하고 확대하여 마침내 수십만의 군대를 크게 일으켜 靑과 去病으로 하여금군대를 조련하게 한 지가 전후로 십여 년이었습니다. 이에 西河에 배를 띄우고 大幕(沙漠)을 횡단하며, 顔山(連山)을 격파하고 王庭(單于가 있는곳)을 습격하여 그들의 땅 끝까지 이르러서 도망하는 자들을 추격하고 패배하는 자들을 쫓아가서 狼居山에 하고 姑衍에서 禪하며 海에 임하였으니, 이후로 匈奴가 두려워하여 더욱 화친하기를 구하였으나 臣이라고 칭하려하지는 않았습니다. - P162

또 前代에 어찌 한량없는 경비를 쓰고 죄 없는 백성들을 부역시켜서 狼望의북쪽에서 마음을 유쾌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나 한 번 수고롭지않은 자는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하고 잠시 허비하지 않는 자는 오랫동안 편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백만의 군사를 차마 버려서 굶주린호랑이의 입에 넣고, 府庫의 재물을 운반하여 廬山과 같은 골짜기를 메우면서 - P163

도 후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本始의 初年에 이르러 가 건방진 마음이 있어서 烏孫을 침략하고 公主를 빼앗아 가고자 하자, 마침내 다섯 장군의 군사15만 기병을 징발하여 공격하였으니, 이때 노획한 것이 적고 다만 위엄과 무력을 떨치고 드날려서 漢나라 군대가 우레와 바람처럼 신속함을 보여 주었을뿐입니다. 비록 거저 갔다가 거저 돌아왔으나 오히려 두 장군을 처형하였기때문에 북쪽 오랑캐들이 복종하지 않아 중국 사람들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과이르러 큰 교화가 신명연간에하고 큰 은혜가 널리 흡족하며,
내란이 일어나서 다섯 선우가 왕위를다투었습니다. 日逐과 呼韓邪單于가 저들 나라의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와목숨을 바쳐서 부복하여 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매어두기만 하고 계책은 우리 마음대로 제재하지 않았으니, 이후로부터 조회 오려고 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고 하고자 하지 않는 자를 억지로 시키지 않았습니다. 지금 單于가 에 돌아오는데 어찌하여 의심하고 틈을 두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이로 인해 스스로 단절하여 끝내 할 마음이 없게 하십니까."
글을 아뢰자,天子가 깨닫고 다시 單于에게 답서를 써서 보내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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