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테스토스테론과 같은 성호르몬은 모두 콜레스테롤에서 만들어진다. 이 스테로이드는 효소의 작용으로 프로게스테론으로 변환된다. 프로게스테론은 흔히 임신과 연관되는 호르몬이며 안드로겐의 전구물질이다. 또 안드로겐은 에스트로겐의 전구물질이다. 결론적으로 이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은 서로 쌍방향으로 변환될 수 있고 남성과 여성에 모두 존재한다.

그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토록 애를 먹인 정소 결정 인자 유전자 코드가 1980년대 런던의 피터 굿펠로Peter Goodfellow 실험실에서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굿펠로 연구팀은 SRY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 중성인 태아의 생식샘을 정소로 발달시켜 테스토스테론 펌프질을 시작하게 하는 결정적인 첫 단계임을 증명했다. SRY 유전자가 없으면 생식샘은 좀 더 느긋하게 배아의 난소로 자란다.

"많은 유전자들이 ‘정소’ 유전자 아니면 ‘난소’ 유전자로 구분되지 않아요. 보통 ‘둘 다’에 해당합니다. 다만 개수가 얼마나 많고 또 어느 쪽으로 생화학 반응을 이끄는지에 따라 성별이 달라지죠. 이 유전자들 중 일부는 한 단계 이상에서 하나 이상의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 연이어 밝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소나 난소로 가는 두 경로는 선형이 아닐뿐더러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다. 모든 경로가 서로 얽혀 있다.

혼란스럽게 뒤얽힌 양성兩性 유전자의 관계는 성의 가소성을 설명한다. 뒤엉킨 톱니바퀴 중 어느 것이라도 발현에 변화가 생기면 새로운 변이를 생산할 것이다. 이는 진화를 추진하고 동물이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면서 적응하고 활용하게 하는 재료가 된다.

Y 염색체는 유전물질을 잃어가고 있었다. 염색체 가운데 제일 약체인 이 염색체는 실제로 수축하고 있다.

중간 지대에 살고 있는 개구리들은 모든 면에서 중간이다. 어떤 수컷은 성이 온도에 의해 조절되며 난소를 갖고 시작한다. 또 어떤 것들은 성결정 유전자에 의해 성이 결정된다. 그 결과 어떤 개구리는 일반적인 XY 수컷과 XX 암컷이지만 로드리게스는 XY 암컷과 XX 수컷도 기록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이 개구리들은 수컷 또는 암컷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식샘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일부는 난소와 정소 조직이 뒤섞여 있어서 성별을 둘 중 하나로 깔끔하게 지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최초의 생물이 복제를 통해 번식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크루스가 내게 말했다. "최초로 번식한 생물은 알을 낳을 수 있어야 했겠죠. 그러니까 암컷입니다."
크루스의 연구 결과는 6억 년 전에서 8억 년 전에 존재했던 유일한 생물은 복제한 알을 낳는 생물이었다고 추정한다. 수컷은 성이 도래할 때까지 진화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 크루스는 그 시기가 2억 5,000만 년에서 3억 5,000만 년 후라고 보고 있으며 그제야 생식세포의 크기가 다양해졌다. 이렇게 생식세포가 뚜렷하게 나누어지면서 서로 크기가 다른 생식세포의 결합을 촉진하는 상호보완적 행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로 상대를 찾을 수 있어야 하고 성적으로 끌려야 하며 재생산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안드로겐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적 이형이 진화한 것이다.

"우리는 정소에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있다고 보여주는 현미경 사진을 최초로 공개했습니다." 에스트로겐, 즉 가장 대표적인 ‘여성’ 성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사실은 수컷의 정소와 정자 발달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에스트로겐이 최초의 스테로이드 호르몬일 수밖에 없는 게, 최초의 동물은 알만 낳았고 알은 에스트로겐을 생산했기 때문입니다." 크루스가 설명했다. "에스트로겐 수용체는 사실상 신체의 모든 조직에서 중요합니다. 몸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없는 조직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조직개념은 테스토스테론의 전능함만을 강조해왔지만 에스트로겐 역시 강력한 호르몬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진화를 보는 이런 대안적인 관점에서 ‘암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은 다음과 같다. 여성은 성의 시조始祖이다. 이 원시적 난자 제조기의 유물은 우리 모두 안에 존재한다. 이 사실을 통해 남성이 내면의 여성성과 접촉하는 것을 재해석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는 성선택을 자연선택의 하위 분류로 취급하긴 했어도 암컷과 짝지을 권리를 두고 수컷들이 대결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윈이 물의를 일으킨 부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율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진화를 좌지우지하는 결정권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마나님들에게 강력한 권한을 준 것으로 대부분의 (남성) 생물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반대가 아니라.

다윈은 암컷이 짝을 고르는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대신 암컷이 특정 수컷에게 끌리는 것은 ‘미적 취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7 비록 동물에게 그런 결정을 내릴 지적 능력이 있는지를 두고 긴 분석을 시작했지만(곤충은 그렇다, 벌레는 그렇지 않다 등), 다윈은 성선택이 작동하려면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미적 감각이 요구된다는 인상을 주었다.
8
이런 상황이 빅토리아 시대의 기득권층에게 다윈의 새 이론을 매질할 채찍을 주었다.

까다로운 정도는 암컷의 나이, 생식력, 환경, 기대 수명, 기회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때로 암컷의 선택은 한 마리 이상과의 섹스에도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산쑥들꿩 암컷은 수줍어 보였지만 알고 보니 놀라울 만큼 성적으로 개방적이었다.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결과 한 둥지에 있는 알의 아비가 모두 다를 수 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만 확인되었다.

놀랄지도 모르지만 모든 포유류의 암컷은 음핵이 있다. 암양처럼 음핵이 잘 가려진 동물도 있지만, 1장에서 다룬 점박이하이에나 같은 동물에서는 음경처럼 앞으로 부풀어 오른 20센티미터짜리 거창한 기관이다. 두 극단 사이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빙산의 일각이다.

오늘날 수컷의 영아 살해는 영장류 사촌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51종의 영장류에서 의심되거나 실제로 목격되었다. 대부분 외부에서 침입한 수컷이 번식 시스템에 진입할 때만 살해를 시도하며, 특히 젖을 떼지 않은 영아들이 타깃이다. 같은 패턴이 수사자에서도 보이는데 알파 수컷이 새로 무리를 장악하면서 새끼 사자를 죽인다. 요약하면 앞에서 내가 실수로 유혹했던 암사자는 생물학적으로 나와의 섹스를 강요받은 셈인데, 그건 내 작은 으르렁 소리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내가 자신의 아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5

한 종의 암컷이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적인지 알고 싶을 때 지표로 활용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신체적 단서가 있다. 몸무게에 비례한 수컷 생식샘의 무게를 보면, 일반적으로 암컷의 성적 습성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강력한 것이다. 특히 서서히 퍼지는 문화적 편견과 결합했을 때는 그 힘이 가공할 만하다. 패러다임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가장 부지런한 과학자도 현혹하여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제한하고 상자 바깥에서 보는 신선한 관점에 혼돈을 준다. 베

세라 플래퍼 허디는 "실증적 태도를 가진 생물학자들은 F로 시작하는 단어를 들으면 일단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물론 자신들의 가정이 얼마나 남성주의적이고, 자신들의 다윈주의적 세계관의 이론적 근간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는 간과하고 있지요."

저녁 식사와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하는 암거미의 성향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 동물학자들에게 여러모로 모욕적이었다. 악랄하고 난잡하며 지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원래의 소극적이고 수줍고 한 남자만 아는 틀에서 벗어난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암거미는 또한 진화의 난제이기도 했다. 생물이 사는 이유가 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면 섹스도 하기 전에 파트너를 집어삼키는 행위는 진화적으로 적절치 못한 적응 아닌가. 그러나 성적 동족 포식은 전갈에서 나새류, 문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척추동물과 함께 모든 종류의 거미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적어도 거미에서는 확실히 암놈이 번식을 통제합니다. 수놈이 아니라요." 클라크의 설명이다. "암놈은 더 오래 삽니다. 정자를 저장할 수도 있지요. 최대 2년까지 보관하는 종도 있어요. 그래서 한두 마리쯤 먹어버리더라도 찾아올 놈들은 늘 있으니 아쉬울 게 없지요. 기다리면 되니까요."

성적 동족 포식은 한쪽, 심지어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각기 다른 이유로 여러 분류군에서 수차례 독립적으로 진화했으며 다양한 선택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성적 갈등, 성선택, 자연선택이 한데 모여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지저분한 밤을 보낸 것 같다. 그 결과물은 겉으로 혼란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뒤엉킨 거미줄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다 보면 서서히 이해가 갈 것이다.

난자는 오랫동안 암컷의 수동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었다. 3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작고 이동성 있는 정자와 비교했을 때 커다란 크기와 정주성 성격은 성적 불평등의 근원이 되었다.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수정은 동화 속 장면처럼 전개된다. 난자 공주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으면, 그녀의 영웅인 정자 왕자가 역경을 헤치고 달려와 잠에서 깨운다는 이야기 말이다.
50
그러나 실제로 난자가 경주에서 누가 ‘이기는’지에 상관없이 어떤 정자를 받아들일지를 결정한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 암수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두 성을 가르는 쐐기를 박았지만, 이런 구분은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이 더 컸다. 동물의 형질은 신체적이든 행동적이든 다양하고 가소성이 있다. 자연선택이든 성선택이든 선택의 힘이 부리는 변덕에 맞춰 변형될 수 있으며 성적 형질을 유동적이고 유연하게 만든다. 한 암컷의 특징을 성이라는 수정구슬을 보고 예측하는 대신, 환경, 시간, 기회가 모두 그 형태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