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텍스트로 다시 읽는 '율리시스' - <조이스의 '율리시스' 입문>_숀 시핸
율리시스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당연한 듯 생각해왔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소설을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 이해하기 까다로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루스트의 '잃시찾' 시리즈를 현재 읽고 있는데 어려움을 매번 느낀다. 율리시스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은 난산 같은 중압감이 드는데 그럼에도 꼭 도전해보고 싶은 책이다.
영국의 저술가인 숀 시핸은 율리시스의 통상적인 읽기 방법으로는 한쪽 측면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조이스가 하려는 이야기를 정치적 의식이자 메시지로 읽어보자 이야기한다(그런 측면에 주목한다면 이 책을 나도 조금은 더 잘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조이스는 더블린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등에서 보내면서 이방인으로 살지만 아일랜드에 대한 정치, 역사에는 관심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 책은 탈식민주의 해석의 관점에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아일랜드를 중심에 두고 해석했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치유와 구원의 동무공동체를 찾아서 -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_김영민
일단 이 저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하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저자가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봐도 지나쳤을테니까. 김영민의 글은 초심자에게는 어렵다고 한다. 씹고 생각하고 되새김질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겠다. 제목인 '비평의 숲'은 '비평이 생활과 일치하는 곳'이고 '동무공동체'는 '인문학적 교양의 공동체'이다. 현대인들에게 인문학적 교양이란 무엇일까. 현대인에게 있어서 오히려 그 가치는 더 중요해지고 있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 가치를 간과하고 있다 느낀다. 이 책은 동무론 3부작으로 <동무와 연인>, <동무론>에 이은 완결편인데 안타깝게도 절판이라고 뜬다. 다만 <동무론>은 개정판이 나왔더라. 도서관에서 그의 전작을 찾아보고 파볼지 간을 볼 참이다.
1907년 트리에스테에서 행한 아일랜드 문학 강연에서 조이스는 ‘반동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정신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조이스가 말한 ‘반동 세력‘에는 아일랜드 식민 지배를 지속하려는 제국주의 영국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내부의 친영파 가톨릭 세력도 포함된다. 시행은 조이스의 정치 이념을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로 규정하는데, 그런 조이스는 당시 아일랜드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체로서 영국 지배에 맞서 독립 투쟁을 이끌던 신페인당을 지지했다. - P397
‘율리시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이스는 이 이야기를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구조 속에서 풀어냈다. 이 서사시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는 천신만고의 고난을 이겨내고 이타카의 집으로 돌아가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아내 페넬로페와 만난다. <율리시스>는 이 서사시의 틀을 빌려와 그 10년의 모험을 더블린의하루 속에 집약한다. - P398
《율리시스》의 정치적 성격을 새롭게 읽어낸 것이 탈식민주의 해석이다. 1980년대에 등장한 탈식민주의 관점은 ‘영국의지배를 받는 식민지 아일랜드‘를 중심에 놓고 조이스의 작품을 다시 독해함으로써 조이스 비평의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지지하는 관점도 바로 이 탈식민주의 독법이다. 탈식민주의 해석을 거침으로써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언어라는 매체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모더니즘 태도가 전면에 나타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둘러싸고 벌인 조이스 자신의 정체성투쟁이 배어든 정치적 성격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율리시스> 속 오디세우스 모험은 문체를 실험하는 언어의 모험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찾는 젊은이의 문화적 투쟁이기도 하다. 이 두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조이스 작품을 전례 없는 예술성의 세계로 끌어올린 것이다. - P400
김영민은 비평을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합하되 하나가 되지 않음)과 ‘화이불류(和而不流,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음)로 설명한다. 동무란 이런 화이부동화이불류의 비평적 관계를 지속할 때 부르는 이름이며, 그 동무라는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비평의숲인 셈이다. 김영민은 비평을 (심리)상담이나 정신분석과 비교해 설명하기도 한다. 김영민이 보기에 상담과 분석은 돈을 주고받고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우선 비평과 다르다. 또 상담은 ‘일방적 조언의 형식‘이어서상담자에게나 내담자에게나 어떤 소외감을 남긴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분석은 "자기를 찾아가는 탐문의 여정‘의 형식을 취하지만, 일종의 자기분석이어서 결국 자기 안에서 맴돌다가 끝나기 십상이다. - P412
이와 달리 비평은 "상담가의 일이나 분석가의 작업이 아니라 동무로서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비평은 동무관계다. 김영민은 비평이 "성숙이 되고, 만남이 되고, 사귐이 되고, 평등이 되고, 자유가 되고, 해방이되고, 치유가 되고, 구원이 되는 전례 없는 꿈", "숱한 거목들의 화이불류로 가능해지는 ‘비평의 숲‘이라는 꿈을 꾼다. 김영민은 비평의 숲을 이루는 동무공동체를 "인문연대의 미래적 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동무공동체는 ‘인문학적 교양의공동체이다.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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