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 그 희생자들이 쓰러져간 땅, 블러드랜드bloodlands는 폴란드 중부에서 러시아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연안국들에 이른다. 스탈린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세력을 굳히던 시기(1933~1938), 독소의 합동 폴란드 침공(1939~1941), 독소전쟁(1941~1945) 동안, 사상 초유의 대학살이 이들 지역을 덮쳤다. 희생자들은 주로 유대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발트 연안국인들로, 그 땅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었다.
20세기의 공포는 집단수용소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희생자 대다수를 낳은 곳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다. 대량학살의 장소와 방식에 대한 이런 잘못된 이해는 우리가 20세기의 공포를 보는 시각을 오도한다.
이 연구는 나치와 소련 체제를 하나로, 유대인사와 유럽사를 하나로, 각 국민의 역사를 하나로 묶는다. 희생자와 집행자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그 만행에 개입된 이데올로기와 실행 계획을 따지고, 그런 만행이 벌어지게 만든 체제와 사회를 분석한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지도자들이 내린 명령으로 살육당한 사람들의 역사다. 희생자들의 고향 땅은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있었고, 그 땅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 온통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서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패배를,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노동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부와 서부 유럽의 좀더 산업화된 땅에서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으로 그들과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러시아 혁명을 정당화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농민과 유목민이 섞여 있는 다문화적 국가에서는 프로그램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산업화된 곳에서 먼저 일어날 것이라고 여겼으며, 농민 문제와 민족 문제에는 관심을 띄엄띄엄 기울였을 뿐이다.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농민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러시아어를 말하는 도시민들이 대부분인 노동계급을 위해 어떻게든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요구받았다. 볼셰비키는 그들이 물려받은 전산업사회를 산업사회로 뒤바꿔놓는다는, 사상 유례없는 과업을 짊어졌다. 일단 산업사회가 되고 나서야 그들의 신조대로 노동계급을 옹호할 수 있을 테니까.
레닌의 국가는 아직 스스로 이르지 않고 있던 경제 혁명을 위한 정치적 수단을 제공했다. 그의 소비에트 정치는 마르크스 주의가 민족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들을 인정했으며, 소비에트 경제는 공산주의가 집단 소유권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용인했다. 1924년 1월에 레닌이 죽었을 때, 이 임시적인 타협을 언제 어떻게 끝내야 2차 혁명을 추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란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대공황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서 비롯된 정치적 변화들(자유 시장, 의회 정치, 민족 국가)에 불신을 심어주는 듯했다. 시장은 재난을 불러왔고, 의회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했으며, 민족국가는 국민을 재앙에서 지킬 힘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치와 소련은 누가 이 대공황의 주범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고(유대인 자본가들 또는 그냥 자본가들), 정치 경제에 대해 완전히 급진적인 해법도 있었다. 나치와 소련은 전후 질서를 법적, 정치적 형태로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 사회경제적 토대에도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전후 유럽의 사회경제적 뿌리에 손을 뻗고, 토지를 일구는 남녀의 삶과 역할을 재고했다.
서로 그토록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스탈린은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농업 부문에 있으며 그 해결책은 과감한 국가 개입에 있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했다.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 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 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징발이 실패했다는 보고가 크렘린에 전달되자, 스탈린의 아내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녀는 10월 혁명 15주년 기념식 이튿날인 1932년 11월 8일 심장에 총을 쏘았다. 이 일이 스탈린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충격을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 역시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굶주림 때문에 부풀어 오른 배를 정치적 저항으로 해석해야 했던 그들은 반체제 분자들이 사회주의를 몹시 싫어한 나머지 가족을 고의로 죽게 한다는 끔찍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아들딸,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틀린 시체는 사회주의 붕괴 음모를 감추는 허울인 것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스스로를 굶주리게 함으로써 사회주의를 해치려는 음모를 수행하기도 했다. 도시의 젊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은 굶주리는 자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우리의 낙관주의를 망치려 드는" 인민의 적이라고 교육받았다.
가족을 파탄 내고 신세대가 기성세대와 적대시하도록 한 것은 굶주림만큼이나 정치였다. 공산당청년회의 회원들은 수색단에 참여해 식량을 징발했다. 그리고 개척 농가에서 살던 더 어린 아이들은 "당이 가족 안에 심어놓은 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더 건강한 농민의 자제들은 굶주림에 못 이긴 곡물 ‘도둑질’을 막기 위해 파수를 봤다. 50여 만 명의 미성년자 및 십대 청소년들이 감시탑에 서서 어른들을 감시하는 모습이 1933년 여름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광경이었다. 모든 아이는 자기 부모에 대해 보고를 올려야 했다.
굶주림은 식인 행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목구멍으로 넘길 곡식 낟알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어지자, 우크라이나에도 식인 행위가 찾아왔다. 입에 댈 수 있는 게 사람의 살코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육을 사고 파는 블랙마켓이 열렸다. 인육은 심지어 공식 경제로도 편입되었다. 경찰은 인육 판매자를 사찰했고, 국가 기구는 사람을 죽여서 고기를 잘라 파는 장사치들을 밀착 감시하고 있었다.
소련 러시아에서 온 재정착민들이 그들의 집과 마을을 차지했는데, 그들이 처음 해야 했던 일들은 이전 주민들의 시체를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대개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시체들이 그들의 손안에서 흐물흐물 허물어져내렸다. 어떤 때에는 새로 입주하러 온 사람들이 아무리 박박 닦아내고 칠을 해봐도 집에 배어든 악취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눌러앉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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