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소련군은 철수했으며, 중국에서 싸웠던 수만 명의 한국인은 귀국했다. 스탈린은 세계대전 동안 가톨릭의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됐다는 보고를 받고 교황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군대를 가지게 됐느냐고 물었다. 1945년 그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사회제도를 강요한다"고발언했다. 이 냉철한 현실주의자에게 군사력의 배치는 모든 것을 보장했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북한군과 연결된 중국이 그것을 대체한 영향을 그가 잘못 파악할 리는 없었다. 극동에서 소련 군사력의 한계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한국이라는 화약고로부터 소련을 멀리 두려는 욕망 때문에 그가 소련군을철수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이후 김일성은 자신의 지휘를 받는 가장 강력한군대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교묘히 행동할 수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 P515

1949년 11월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i Malenkov는 논란을 불러온 연설을 했는데, 이것을 소련이 좀더 공격적인 노선으로 나아갈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었다-헨리 스팀슨의 표현을풍자해 말렌코프는 보란 듯이 원자폭탄 모형을 허리에 매달고 연설했다.
그 무렵 미국의 주요 관료들은 말렌코프의 연설이 소련의 정책 변화를 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회고했다. 국가안보회의 문서 68을 입안한 폴 니츠는 1950년 2월 모스크바는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것 같다"
고 파악하면서 인도차이나, 베를린, 오스트리아 그리고 한국은 소련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당시 조지 케넌은 말렌코프의 연설을 깊이 주시했는데, 이후 말렌코프는 "우리가 아는 한 언제나 "극동에서 좀더 적극적인정책을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애치슨은 말렌코프가 "자신감 넘치고 공격적인 연설을 했다면서 소련이 곧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베를린 한국이라고 언급했다. - P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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