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는 말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어. 얼마 전에 일본은 불인(佛印)에 진주했는데 일본의 계산으로는 장개석의 원조루트를 차단한다 그거지만 의외로 전선은 확대되어 일본이 말라죽게 되는 거 아닌지." "말라죽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고 미국이 나서지 않을까 싶어. 미국만 나서주면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있게 되는데." "일본이 그거 생각지 않고 불인에 진주했을 리는 없고." "물론이지. 그러나 미국의 참전은 미지수. 참전한다는 확률이 구십 프로라 하더라도 일본은 십 프로에 희망을 걸 수밖에없는 다급한 사정이거든. 당장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지. 장개석 원조의 루트를 차단하는 것도 그렇지만전쟁물자 고갈이야말로 발등에 불 떨어진 격이니." "어쨌거나 일본에 승산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지?" - P11
참 자네도 알 거야, 김두만이라고. 왜 그때 우리 집하고 함께 털린 그 작자, 술도가 하는." "알지." "그 작자 아들 김기성도 아는지 모르겠네." "동경서 본 일이 있지." "명색이 대학이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학교를 유학이랍시고 다니면서 뽐내기로는 구역나게 뽐내던 놈인데 지금 뭘 하는지 아나? 돈을 처넣었겠지만 경방단警防團) 단장이야." "출세했네." "알고 보면 경찰서 시녀 노릇이나 하는 별 실속 없는 거지만이 작자가 진주 거리를 활갯짓하고 다니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꽤 울리는 모양이야. 옛날엔 내 앞에서 쪽도 못 쓰던 놈이하참, 세상 더럽아서." - P12
"실은 그 작자하고 우리 집하고도 앙숙이네. 자네나 우리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하기는 뭐 그자뿐이겠나. 평사리 작은 마을에도 면서기가 날뛰고 걸핏하면 반국가다 반정부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감정이 격해지면 술잔 기울이는 횟수도 잦아진다. 동경에서일류대학의 법과를 나온 이순철이고 보면 김기성이 같은 날건달에게 압박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말단말직, 실속 없는 명예직이라도 하나 얻어 걸치고 보면 세력의판도는 여지없이 뒤집히는 현실. 가진 자 못 가진 자 할 것 없이, 눈먼 구렁이처럼 얽히어 친일에 열을 올리는 군상들. - P13
"일사불란이 천치들의 행진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그들은 더욱더 무섭다. 아프리카에서 개미의 대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남은 것이 없다 하는데 마치 그 개미떼처럼 일본인들은 일치단결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우리들 식자 중에서도 그들단결을 일본인의 장점으로 꼽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 일치단결이 파괴로 돌진할 때 가공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 파괴란 새 질서를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휴머니즘을 결여한 새 질서란 허구이며 허구에서 시작되는파괴란,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무너지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지. 오늘의 일본을 보면 명백해.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는 날 그것은 증명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여하한 경우에도 혁명은 없을거야. 자멸할지언정 그들은 허구를 존재케 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잡동사니로 호도해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움이 없다는 얘기고 새로움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 창조하지 못한다는 것, 그들은 뻔뻔하게도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 했다." 평소 환국이답지 않게 그의 어투는 매우 신랄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민족성에다가 못 박는 것은 반대다. 체제에 따라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보편성 아닌가." "민족성에 못을 박은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역사를 말한거야. 인간의 보편성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일본의 역사는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 P21
할 것이 변해왔다. 그렇게 본다. 나는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말한 것은 아니다. 길들여진 상태를 말했을 뿐, 그러니까 그들스스로도 피해자인 셈이지."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했다. 그게 뭔데?" "우라시마 타로의 다마테바코처럼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신도(神道), 혹은 신국사상과 현신이라 부제가 붙은 만세일계世一系)는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고 변해서는 안 되는 진리와진실, 또는 사실은 그들 형편 따라 변화무상이지. 결국 그것들은 일맥(一脈)으로써 변하건 변치 않는 것이건 허구다 그 얘기야." - P22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것은 하나의 점(點)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예술가인 자네가 지향하는 길과 다른 대부분 사람들이 지향하는 길이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야.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현실적 동물이며 잘산다는 것의 기준을 물질의 다과寡)에 두고 있지. 그건 생존본능으로 당연한 거고, 올바르게 소신껏, 큰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 그러한 삶을 잘사는 것으로인식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라 할 수 있다. 그건 엄연한 현실이구, 정치란 예외 없이 그런 대다수를 상대로 하는 체제 아니겠어? 얼마나 그 대다수를 말아먹느냐, 얼마나 그 대다수의 허리를 펴게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 P23
울분과 초조, 오뇌와 권태, 사그라지지 않는 야망을 안고 뒹구는 가정생활은 황폐 그것이었고 살림에 무관심한 나태한 생활은 그를 겉늙게 했다. 무골호인이지만 무미건조한 남편에, 슬하에는 자식도 없었다. 욕구불만에서 정신없이 먹어대는 음식, 소화불량은 반복이 되고 비대해질밖에 없었다.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배설자를 만났고 어울리면서 홍성숙은 별수 없이 유한마담으로 전락해갔다. 배설자는 그런 홍성숙을 앞세워 그 방면의 사회, 부유하면서 부패의 냄새가 감도는 소위 상류층에 교묘히 잠입해갔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배설자는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탈을 더이상 쓸 필 - P37
요가 없었다. 그의 부친이 다롄에 살았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해에 있었던 것도, 그러나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일본의 밀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배설자는 조선을 통치하는 당국과 맥이 통하는 여자, 권력을 배경으로 한 무용가 배설자로서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가 경찰의 끄나풀인 것은 사실이었다. 경찰의 간부이자 죽은 부친과도 지면이던 곤도 게이지[近藤]의 정부인 것도 사실이었고, 언젠가 배설자는무심한 듯 꾸미면서 홍성숙에게 흘린 말이 있었다. 조선의 예술가들을 통합하는 단체를 관(官)의 주도하에 결성할 것을 추진중이라는 말이었다. 홍성숙을 사로잡는데 그 이상의 달콤한미끼는 없었다. 관의 산하단체, 그 후원으로 재기하고 싶은 욕망, 헛된 꿈을 꾸게 되었으며 통합예술단체에서 감투라도 하나얻었으면, 홍성숙은 멋지게 자신을 추방하고 소외한 무리에게일격을 가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예술가로서 낙오되지 않고그 명맥이라도 잇고 싶었다. 이리하여 배설자와 홍성숙의 공생관계는 굳어졌던 것이다. 공생관계라기보다 실은 배설자라는매발톱에 홍성숙은 꼼짝없이 채인 것이다. - P38
기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일본과 서로 손잡고 상부상조하는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조선 민족이 다 죽을 수는 없지요. 제가 듣기로는부인께서 일본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며 일본에 대한 이해도깊다 하더군요. 다만 바깥분이 그래서 심려가 큰 줄 압니다만그것도 부인께서 하시기 나름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런 일에 대한 복안이라도 있어서 찾아왔단 말입니까?" 서희는 짐짓 관심이 있다는 듯 물었다. "네?" "어리둥절하다가 당황한다. 어디서 얘기가 그리로 빠졌을까 - P32
생각하듯 그러나 강하게 부정하는 몸짓으로, "아, 아닙니다. 이번에 찾아뵌 것은 그런 일이 아니며."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요하다면 복안이야 왜 없겠습니까." 재빨리 배설자가 받았다. 그의 말에는 왠지 모르지만 소름끼치는 것이 있었다. "네……………" 애매하게 대답하고 서희는 배설자를 한동안 쳐다본다. 백해무익의 인물이라는 것은 초장부터 간파하고 있었지만 배설자의 마지막 말에서 서희는 결코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될 여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횡설수설,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홍성숙에게 들러붙은 찰거머리 같았고 검정 옷에 핏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낀다. 레이 ‘섣불리 상대했다가는 큰일 날 여자다. 이런 종류의 여자는흔치 않아.‘ - P43
"우리들의 천국은 바로 눈앞에, 손이 닿는 곳에 있고 예수쟁이들 천국은 알지 못할 먼 미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게 천국 아니겠어요?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 예술 긴 거야 뭐우리가 죽은 뒤 일이니까 상관할 바 없고, 인생은 짧아요. 다만짧을 뿐, 욕망을 위해 사는 것만도 너무나 모자라. 안 그래요? 닥터 허." "그렇군요." "극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찾고 도덕을 준수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그따윈 모두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안 그래요? 닥터허." "허무주의군요." "천만에, 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인생을 사랑하는 쾌락주의예요. 술 몇 잔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내 옆의 이 여인은 쾌락주의도 도덕주의도 아닌 오락가락, 명성만 잡으려고 기를 쓰다가 이 지경으로 무너진 거 아니겠어요?" "너무 심한 말씀 아닙니까?" "심한 말? 언제나 사실을 말하면 심하다고들 하지. 인간이란뭣이든 걸치고 가리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봐요." - P56
해체를 결심한 것은 길상이었다. 길상은 진작부터 독립자금강탈을 실패로 보고 있었다. 자금이 국외로 나가서 그쪽의 도움이 된 것은 다행이나 그것은 거사의 큰 비중이 되질 않았다. 체념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친일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경 - P100
향에 대한 일깨움과 푸석푸석 속에서만 타고 있는 불길에 기름역할을 하려 했던 의도는 크게 주효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쉽게 가라앉고 말았다. 조직의 응집을 계산에 넣었는데 그것도오히려 반전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도화선이 되려면 희생자가 났어야 했다. 반대로 조직을 응집하려 했으면 혐의 밖에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혐의를 받았고 송관수를 위시하여적잖은 일꾼들이 만주로 탈출했으며 조직은 약화되었다. 게다가 길상이 자신 꽁꽁 묶이어 파상적으로 지속하려던 일은 정지상태로 빠져버린 것이다. 무위도식의 세월은 적잖게 그의 신념을 무너뜨렸고 왜소한 상태로 퇴화한 느낌을 주었다. 해체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정세가 날로 각박해졌고 자신이 수감될 것을예감했기 때문이며 무의미한 침체상태에서 조직의 멍에를 벗겨주는 편이 나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 P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