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개의 동맹국이 전후 아시아에서 서로 전혀 다른 이상의 전시장이 될 정상회담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도쿄는 자신들의 목표가 서구의 굴레로부터 아시아 동맹국들의 "해방"이라고 공개 선언했다.38 이에 대한 제스처로서 11월 30일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과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이전의 굴욕감을 주던 합의보다는 좀더 평등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튿날 왕징웨이와저우포하이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제국을 위해 사용하던 거창한 표현인대동아공영권을 축하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날아갔다. - P378
카이로에서는 아시아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사안이 있었다. 하나는 전후 아시아에 대한 구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연합 사령부SEAC가 당면하고 있는 전략에 대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회담을 위해 전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에 대해 적었다. 여기에는 만주와 타이완, 펑후 열도의 회복,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세우는 것, 대중 배상의 일부로서 중국 점령지 내 모든 일본 소유 공장과 선박의 인도 등이 있었다." 그러나 논의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연합국들은 아시아에서 어떻게 싸울지를 놓고 강력하게 걸고넘어졌다. 카이로에서 SEAC는 세 가지 유력한 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가 버마의 재탈환("타잔Tarzan 작전"), 두 번째는 북부 수마트라 침공("컬버린Culverin 작전"), 마지막은 가장 야심만만한 계획으로 벵골만을 통해 안다만 제도를 점령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벵골만 상륙작전("해적Buccaneer 작전이었다. 장제스는 슬림 장군의 영국군과 함께 중국군이 투입되는 "타잔 작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안다만해 (벵골만 남동쪽에 있는 바다로, 버마해라고도 부른다 옮긴이)를 침공하는 계획도 약속해주기를 원했다. - P383
카이로에서 합류하기를 거부했던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루스벨트, 처칠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유럽이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오버로드 작전이 시작되면 동부 전선에서의 작전을 한층 강화하겠다고 장담했다. 또한 소련은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약속하면서도 그 시기는 오직 독일이 항복한 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연합국의 목표는 급변했다. 벵골만을 통한 주요 상륙작전이 될 "해적 작전은 12월 5일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 작전은 영국 해군이 보유한상륙함의 태반을 요구하는데다, 미 수뇌부는 과연 그것이 성공 가능한 전략이라고 결코 확신한 적이 없었다. 해적 작전의 포기는 중국과의 맹약이 마치대수롭지 않은 양 간단하게 파기될 수 있다는 또 다른 암시였다. - P387
1942년 5월 정글을 도보로 탈출한 이래, 스틸웰에게 버마의 탈환은일종의 집착이 되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해적 작전의 제안은 스틸웰의 희망을 한껏 부풀게 했다. 작전이 취소된 뒤에도 그는 그것을 다시 추진하는 데에만 매달렸다. 마찬가지로 영국군과 중국군은 이미 버마 공격을 준비하기위해 나서고 있었다. 1943년 12월 중국군은 국경지대의 일본군 전초 거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P394
3월 27일 장제스는 버마 작전을 위해 Y군(도합 9만여명 정도였다)과 미군 전투기들을 인도로 보낸다면 중국 중부를 취약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4월 3일 장제스가군대를 출동시키지 않는다면 중국에 대한 더 이상의 원조를 "기대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스틸웰(그리고 마셜)까지 압박하자 장제스는 굴복할 수밖에없었다. - P395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압박한 이유는 스틸웰의 오판 때문이었다. 연합군 수뇌부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도 미 해군의 주도 아래 병참선이 짧은 중부 태평양을 통해 북상 중이었다. 따라서 버마에서의 대규모 공세에 흥미가 없었으나 스틸웰은북부 버마의 일본군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이 가진 중국군 2개 사단과 1개 미군 연대만으로도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제스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지적했지만 스틸웰은 장제스의경고를 단순히 그가 싸울 의지가 없는 탓으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도를 통해 신속하게 북부 버마로 병력과 물자를 증원할 수 있었다. 영국군 또한 무다구치의 "임팔 작전이 발동되면서 수세에 몰렸기에 스틸웰의 공세는 당장 교착상태에 빠진 채 도리어 포위 섬멸당할 판이 되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스틸웰은 루스벨트에게 Y군이 출동하도록 장제스를 압박해줄 것을 건의했다. 루스벨트 역시스틸웰에게 미군 부대를 증원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렇다고 대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그로서는 스틸웰의 실패를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모든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옮긴이 - P395
이치고 작전은 일본군이 여태껏 감행했던 작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약 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중국 중부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에이르기까지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치고 작전은 단순한 전략적 목표 그 이상이었다. 일본군과 국민정부군 양쪽 모두에게 이 전역은 전쟁에서 살아남기위한 마지막 시도였다. 일본에게 중국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은 가장 다급하면서 절박한 일이 되었다. 만약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다면 유럽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미국과의 협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P398
전선에서 모습을 감춘 지휘관들, 자신들의 사유 재산을 피란시키는 데 군용 장비를 사용한 장교들, 농민들에게서 소를 징발했던 것 등. 그로 인해 군인들은 중국인 동포들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일본군은 3주도 안 되어 자신들의 모든 목표를 - P403
달성했다. 남쪽으로 향하는 철도는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30만 명의 중국군이 소멸했다" 뤄양의 상실은 국민정부군 수뇌부가 자신들과 대치하고 있는 일본군의역량을 과소평가하면서 또 다른 재앙을 초래했다. - P404
허난성의 전례 없는 패배는 장제스에게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으며 중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에까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카이로 회담을 전후하여 장제스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 비록 스틸웰과의 갈등이나 미·영·소 3 대국의 은근한 무시, 국내의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은 당시에만 해도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공산당에 대해서도 지루한 협상 끝에 1944년 3월 더 이상의 대립을 끝내고 양당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항일에 힘을 모으기로 합의했다. 국민당만큼이나 공산당 역시 일본군의 소위 "삼광작전"으로 존립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장제스는 전면 공세의 준비를 지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직후 일본군의 대공세가 시작되고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Y군을 스틸웰에게 빼앗기면서 장제스의 구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더욱이 공산군은 일본군의 공세에서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을뿐더러, 화베이와 화중에서 국민정부의 통치 기반이 와해된 것을 기회 삼아 이 지역을 빠르게 잠식해나갔다. 덕분에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옮긴이 - P404
1938년 당시의 용맹했지만 실패로 끝났던 방어전은 장제스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1944년에는 그렇지 못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장제스가 권좌를 지켜야 한다고 믿어왔던 한 사람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다름 아닌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전쟁 초기 국민당은 싸울 때마다패배를 거듭했다. 하지만 상하이와 우한에서 중국군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국민정부가 항전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제 뤄양창사에서의 부끄러운 패배는 충칭과 워싱턴에서 적대적인 수군거림을 초래했다. 마셜은 루스벨트에게 중국에 아직 남은 군사 자원을 "일본에 맞서생산적인 노력을 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맡길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마셜이 보기에는 오직 스틸웰만이 그 역할에 적합했다. 루스벨트는 미국인을 중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407
"중국에서 지난 7년 동안의 전투를 검토한다면 공산당의 참전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에 불과했다고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공산당은 규모와 격렬함에서 상하이와 쉬저우, 한커우(우한), 창사 전역에 비견될 만한 어떠한 전투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주장과는 상반되지만, 그들은 단지 중국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견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7여기서의 작은 부분이란 국민당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얘기였다. 가우스는 장제스의 추종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이 악화되는 중국의 전세를 뒤엎을 마법의 열쇠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옌안에서는공산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블라디미로프가 그와 생각이 같았다. 그는 모스크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제8군과 신4군은 1941년 이후 사실상 싸우지 않고 있다." - P415
스틸웰은 자신의 도로를 건설했고 복수에 성공했다. 하지만그의 강박적인 프로젝트가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은 12월이 되어서였다. 아삼에서 시작한 레도 로드는 라시오에서 버마 도로와 연결되면서 다시 한 번육로를 통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보급 물자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1945년7월 한 달 동안 약 5900톤에 달하는 물자가 도로를 따라 수송되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오면 험프 루트를 통해 공수되는 물자가 도로를 통한 수송을 초라하게 만들었다.78 79 물론 전쟁이 좀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그 길은 보다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레도 로드는 장제스에 의해 스틸웰 로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겉으로는 그것을 건설한 미국인들의 의지에 대한 찬사였지만 아마도 그 속내에는 그 같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장본인의 이름을붙여야 한다는 암시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도로가 뭔가 쓸모가 있게 되었을 때, 스틸웰이 1944년 무더운 여름에 버마의 정글에서 싸우고 있을 때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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