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우울증적 이주자
겉도는 것, 그러니까 '소외'라는 것에 좀 익숙하다. '따돌림'이라는 단어와 맞닿을 수도 있겠다. 나는 어느 집단에 들어가 있든 깊이 천착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와 섞이는 것을 거부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행복함을 가장하는 마스크를 한 채 억지로 섞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내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우울증의 진단에 대해서는 흥미로움을 느꼈다. 사망 선고와 비슷하다는 맥락 말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곁에 있는 그 친밀도에 따라 곁에 있는 사람은 단 번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니까 죽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일정 기간의 수용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우울증이야? 그럴 리가 없어...' 라고 부정->자기 수용의 과정까지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주자들, 식민 지배의 억압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들의 체험, 심리 등에 대해서 제법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를 떠나 영국으로 온 인도인들을 다루었다든지. 한편으론 영국의 문화에 흡수되었다고 생각하는 인도인들을 영국인들이 정말 차별 없이 바라보는가라든지. 그렇다고 이곳에서 인도의 문화를 고수해서 지켜나간다면? 대부분은 이 사이에서 애매모호하게 걸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리주의자에게 개종은 개인의 해방이었다. 그들은 "개인을 관습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54)시키고자 했다. 관습custom이라는 말과 습관habit이라는 말은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 그러나 관습이라는 말에는 나쁜습관이라는 뜻도 있다. 예의가 바르지 못할 경우 관습에 의해 억제되어야하는데, 이때 관습은 관례적인 것customary을 떠오르게 한다. 좋은 습관은 "한낱" 습관적인 것과는 다른 것이다. 식민주의는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그들은 관습 혹은 관례적인 것에서 벗어나 "좋은 습관을 익혀야 한다. 행복이라는 일반적인 목적이 개인이 추구해야 할 특수한 목적으로 전환되는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창조가 식민지 교육과 훈련의 목적이 된다. 이에 따르면, 행복해지려면 개인들이 관습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그자체로-목적이 되어야 한다. 2장에서 지적했듯이, 행복하려면 "방향 전환", 돌려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타자를 개인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그들이 식민 지배자의 규범, 가치와 실천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돌려세우는 것이다. - P234
행복의 공리주의적 증진은 흉내의 기술을 수반한다. 식민지 엘리트들을 취향, 견해, 도덕과 지성의 측면에서 우리 "처럼" 만들라는 명령인것이다. 식민 지배자를 흉내 내면서 타자는 행복해지는데, 여기서 행복은행복감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니라 좋은 습관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여기에는 정서적 성향도 포함된다. 즉, 올바른 사물에 의해 올바른 방식으로영향 받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식민지배자"처럼 된다는 것은 여전히식민지 주민의 신체와는 뚜렷이 다른 신체에 몸담는다는 의미다. 바바가보여 주듯 흉내 내기는 혼종 주체를 생산한다. 즉, 거의 같지만 아주 같지는 않은 거의 같지만 백인은 아닌 주체다(Bhabha 1994: 122[180], 128[186]). 식민지 주민을 위한 행복 공식도 그 "거의"라는 망설임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품게 된다. 거의 행복하지만 아주 행복하지는 않은, 즉 거의 행복하지만 백인은 아닌 주체 말이다. - P236
행복할 자유는 어떤 방향을 지시한다. 어떤 이미지를 취한다는 것 안에는 자크 라캉이 "주체 내에서 일어나는 변신" (Lacan 2006:76[113-14])이라는 말로 표현한 동일시 행위가 담겨 있다. 행복할 자유는가족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복의 약속을 담지한 국가와의 동일시로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국가와 동일시하려면 개인이 돼야 한다. 개인의 신체, 즉 밖으로 나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신체를 획득해야하는 것이다. 행복이 전진하는 방식도 이런 식이다. 마치 프로펠러처럼행복은 주체가 미래를 포용하고 과거를 뒤로 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서 과거는 관습과 관례적인 것에 연결된다. 다른 말로, 개인이 되면서 당신은 자유라는 감각을 얻는다. 역량, 에너지, 기획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런 역량, 에너지, 기획은 당신의 자유가 가진 좋은 것의 기호가 된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이미지를 상정하고 있다. 즉, 행복할 자유를 갖게 된다는 것은 신체를 특정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 P249
우울증 진단은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죽었다고 선언한 대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울증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우울증 진단은 윤리적 명령 혹은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다. 타자는 우리가 죽었다고선언한 대상을 우리가 선언한 방식으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푸우리는 여기서 슬픔을 공유하는 정서적 형식에 대해 알 수 있다. 정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면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특정 대상, 즉 행복 대상을 향한 정향을 공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대상 역시 같아야 한다. 정서 공동체가 상실의 대상들을 공유함으로써, 다시 말해 대상을 올바른 방식으로 놓아줌으로써 만들어진다면, 우울증자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 정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실패가 되고, 이로 인해 계속 잘못된 쪽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란, 방향 전환이 필요한 사람, 돌려세워야 하는 사람이다. - P255
평행선은 통합을 거부하는이주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고 열려 있다고 상상된 공간에서 특정 신체들만을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평행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세계의 선들, 선들로 가시화되지도 않은 그 선들을 따라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선들은 삶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형식들에 몸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 P284
행복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당신이 겉도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제 힘으로는 그 자리에 섞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를 "어디든" 섞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인정은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 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개인의 추상적 잠재력으로부터의 소외를 수반한다. 그런 자기신념이 없다면 행복은 그가 있는 곳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치 "무엇이든의 상실 안에는 "어디든"의 상실도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행복할 자유란, 비록 판타지라 할지라도, 소수만이 있을 수 있는 "어딘가"를 환기하는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 - P285
이주자들에게 행복 의무란 당신의 도착到을 좋은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 즉 당신의 도착에 대해 좋은 점만이야기한다는 뜻이다. 행복 의무란 좋은 것을 말할 긍정적 의무인 동시에좋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의무, 불행의 경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부정적 의무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인종차별의 고통을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 인종차별의 기억들을 잊어버림으로써 인종차별의 고통을 잊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당신을 향한 폭력에 상처 받지 않을 의무, 심지어는 그 폭력을 눈치채서도 안 될 의무, 폭력이 당신을 스쳐 지나간것처럼 그것을 지나가게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의식하고 그것에 대해 입을 열 경우, 인종차별을 의식한 경우와 마찬가지로정서 이방인이 된다. 정서 이방인은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있는 사람, 우리가 해야 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다. - P2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