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여성은 가정에 위치해야 하고 완벽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따라서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여성은 있지 못했다.
1830년대 산업화의 시작으로 미국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노예제 폐지 운동(Nat Turner)이 일어나던 즈음 경제적 여건이 나았던 백인 여성들은 교육권과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에 나섰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억압을 일종의 노예제로 규정하였다.
1833년 코네티컷 캔터베리의 학교 교사인 프루던스 크랜들이 백인 주민들을 상대로 흑인 학생의 입교를 받으며 갈등을 빚는다. 주민들은 보이컷 운동을 벌였고 당국에서 크랜들의 체포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충돌은 지속되었다.
미국 노예제 반대협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여성들 4명 중 한 명인 루크리셔 모트는 대회 직후 필라델피아 노예제 반대협회 모임을 조직하였다. 이후 보스턴 노예제 반대 여성 협회(대표: 마리아 채프먼 웨스턴)를 비롯한 여러 모임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인종주의자들 무리에 공격당하거나 다른 식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경우도 생겼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노예 가정에서 태어난 그림케 자매(사라, 앤젤리나)는 노예제에 환멸을 느껴 북부로 이주하였고 자신들의 생각을 담은 강연을 시작한다. 강연 내용은 노예제의 문제와 노예제로 여성들이 받았던 책임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은 점차 인기를 끌며 남성들의 참여도 늘어났는데 이 중에는 앙심을 품고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1837년 7월 28일 매사추세츠 조합 교회파(프로테스탄트 최대 교파) 목사 의회는 그림케의 강연이 신이 정한 여성의 역할을 전복하려한다며 교서를 발행한다. 자매들은 남성우월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방어할 수 있어야 노예해방운동에 진입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라 그림케는 1838년 ‘성평등에 대한 서한’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포괄적 분석을 담아 펴낸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함)
한편 반응은 갈렸다. 노예제 반대 운동 여성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노예제 폐지 운동 지도층 남성에게는 노예제 폐지에만 관심있던 이에게는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 운동을 통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는 10년 후 여성 권리 신장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격동의 1830년대는 불타오르는 저항의 시기였다. 1830년대 초반에 일어난 냇 터너(Nat Turner)의 반란은, 흑인 남성과여성은 노예로서 자신들의 운명에 엄청난 불만을 느끼고 그어느 때보다 강한 저항 의지를 불태우겠노라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냇 터너의 반란이 일어난 해인 1831년에 체계화된 노예제 폐지 운동이 탄생했다. 1830년대 초에는 주로 젊은 여성과아이들이 일하는 북동부의 섬유공장에서 비상소집과 파업이일어났다. 같은 시기 즈음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았던 백인 여성들은 교육권과 집 밖에서 일할 권리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했다. - P70
올바른 원칙은 사람의 이름보다 강력하다. 우리의 원칙이올바르다면 어째서 겁쟁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째서 노예의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지킬 용기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사람들을 기다려야 하는가? - P76
여성들은 자신이 겪는 억압과 어느 정도 닮은데가 있는 억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노예제 반대 운동에서 남성우월주의에 맞서는 법을 배웠다. 여성들은정치 투쟁의 영역에서는, 결혼생활 내부에서는 꿈쩍도 하지않을 것 같았던 성차별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싸움을 걸 수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백인 여성들은 흑인해방투쟁을 하려면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열렬히 지켜야 한다는인식에 눈을 뜨게 된다. - P79
어느 날 보나파르트가 정치 때문에 분주한 한 프랑스 여성 - P84
을 나무랐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여성이사형에 처해지는 나라에서, 여성이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들이여, 여성을 비하하고 짐승 취급하는 나라에서, 그들 가운데 노출된개인들이 채찍질에 피투성이가 되고, ‘니그로 브로커’의 도살장에서 판매되고, 소득이 생기면 강탈당하고, 강제로 남편과 찢어지고, 미덕과 자손을 강탈당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런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피와 이름 없는 공포를 야기하는 이잔혹 행위가 헌법의 원칙을 거스르며 자행될 때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치적인 주제이니 여성은 한가하게 팔짱을 끼고, 우리 땅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짓’에 눈과 귀를 닫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우리는 용납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행동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부정하는 것은 행동할 우리의 권리를 과감하게 부정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행동할 권리가 없으면 우리는 ‘북부의 하얀 노예‘라는 말을 들어 마땅할 것이다. 예속된 우리의 동지들처럼 우리는 입을 봉하고침묵과 절망에 빠져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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