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위계와 연결: 세계적 사회사의 양상

많은 동시대인이 변화나 변형의시기로 이해한 국면에 있는 세계의 사회사"는 근대라는 개념을 절대적으로필요한 만큼만 사용해야 한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그 개념이 너무나 부정확해진다. 의미론적 광채의 배후에 근본적인 공허함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법 같은 효력을 지닌 낱말 앞에서 지나치게 움츠러들면 세계 사회사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 P746

1800년을 전후로 몇십 년간 유럽의 철학자와 정치이론가들이 내놓은 수많은 저술에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원칙적으로 정치영역은 힘과 권력에 좌우되었고,(법이 완화 효과를 낼 수는 있었다.) 반면에 경제 영역은 재산, 화폐의 유통, 재화의 평화로운 교환에 좌우되었다. 재산은 화폐가치로도 표현될 수 있었으므로 토지는 점차 상업상의 제품으로서 갖는 가치의 관점에서 규정되었다. 극소수 이론가만이 정치가 경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종종 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스미스조차도 국가가시장의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사사로운 개인을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정립할 것을기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누구도 무제한의 경제 통제를 옹호하지 않았다.
힘은 법으로써 제한해야 했으며, 입헌군주제는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적절한 국가 형태로 보였다. 이들 중에 군주제에 반대해 독립하고 획기적인 공화제헌법(1787)을 채택한 미국을 하나의 모델로 환영한 자들은 소수였다. - P770

사회의 복잡성이라는 개념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이는 몇몇 개념과 사고방식은 스펜서가만들어 냈다. 스펜서는 사회를 개인과 집단의 총합으로, 다른 개념으로 말하면 구조와 기능에 따라 분화된 유기체로 보았다. 스펜서의 주요어 중 하나인‘문화’는 오늘날 체계 이론의 기본적인 범주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 박식가는사회의 성장과 진화라는 문제도 다루었다.
마르크스와 그가 세운 역사적 유물론은 19세기의 세 번째 사분기에 사회의 자율화 이론을 더욱 진척시켜 국가를 사회적 갈등의 부산물로만 보이게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 시대의 국가는 단지 지배계급의 도구였을 뿐이다. - P773

서구의 ‘사회‘ 개념은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개혁을 정당화하고 뒷받침하고 실행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이러한 개혁은 그 집단들의 권력 장악 야심과 연결되었다. 이 개혁이 해당 사회의 폭넓은 계층에 침투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렸다.
여러 나라에서 개혁이 결정적인 문턱에 도달한 것은 사회 관념이 새로운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사회‘가 국민 전체와 동일한 것이 되었을 때였다. - P776

민족의 성격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진부한 관념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로 더 멀리 떨어진 세계가 점차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유럽의사회 기술 전통은 해외의 ‘타자‘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뒤이어19세기에 유럽에서 사회과학이 출현했고, 그곳으로부터 사회과학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760 년 무렵에서 1840년까지의 몇십 년은 타자의 시각으로 이루어진 사회 기술이 지배한 마지막 국면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는 유럽에도 해당되는이야기다. - P777

초창기 사회과학은 이론적으로 사회적 ‘사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사실상 그러한 사회적 사실을 자연과학의 엄격한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기준에 따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전개되었다. 135수집해 분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회적 사실이 있다는 관념은 19세기에 들어선 후에야 나타났다. 그때가 되어야 나폴레옹 국가의 등장과 더불어통치술(나중에 식민 통치도 포함된다.)은 과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국가기관들은 신민이나 시민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의무로 여겼다. 심지어 식민지에서도 그러했다. - P795

18세기에 유럽인들은 확실히 비유럽 사회 여성이 처한 상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지만, 이 분야에서 특히나 빈번하게 그릇된 판단에 빠졌다. 그러한 그릇된 판단은 오랫동안 역사 서술에 스며들었다. 남성여행자들에게 여성의 삶은 좀 더 공적인 남성의 삶보다 훨씬 더 눈에 띄지 않았다. 따라서 여성의 삶은 보통의 사료에서 훨씬 적게 나타나며 더 많이 감추어져 있다. - P813

변경 사회는 19세기의 특징적 사회 유형의 하나가 되었다. 거의 전부 폭력과 민족 갈등에 휘말렸으며, 현지 주민들은 불가피하게 패자가 되었다. 그러한 사회들은 일반적으로 지극히 외진 곳에 있었지만(변경은 고립된 개인들, 가족들, 소집단들의 고향이었다.) 또한 세계경제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므로 변경 사회는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연결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변경 사회는 반드시 유럽 팽창의 직접적인 결과물일 필요는 없었으며, 모든 경우에서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정착민 식민주의로 귀착되지도 않았다. 원주민의 추방과 보호구역 안으로의 봉쇄는 매우 특별한 의미에서만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 P833

1900년 무렵의 세계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자급자족이나 인근 주민들을상대로 한 교환으로만 근근이 삶을 꾸리는 사회가 무수히 많았다. 대체로 민족학자들이 발견하고 묘사한 외진 곳의 공동체들이었다. 그러나 초기 민족학의 몇몇 고전적인 연구는 이미 외국인과 어느 정도의 교류 경험이 있는 사회들에 관한 것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매우 다양한 세계화 과정의 결과로 서로연결된 사회에 살았다. 이들은 이주, 상품과 자본의 교환, 종교 사상이나 기타 사상의 이전 같은 식민 통치의 구조들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이 반드시 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일상생활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인구가 조밀하고 근대성의 모든 외적 징후를 다 띠고 있는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도 외국인은 흔히 볼 수 없는 존재다. 1900년 무렵에는 당연히 더욱 흔치않았다.
많은 사람이 전례 없는 이동성에 직면해 무기력과 협소한 시각을 보여 주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850

제1차 세계대전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사회가 태도는 물론 조직에서도 부르주아지 사회가 이론상 암시했던 자기 이미지보다 실제로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훨씬 더 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P863

비단 거대한 해외 제국뿐만 아니라 19세기의 특징적 사회 형태였던 식민지 사회도 군사적 정복의 산물이었다.255 식민지 정권의 부대와 경찰이든, 일반적으로 토착민 민간인들보다 특혜를 누렸던 토착민 보조군(세포이)이든 군대는 특수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스펜서는 군사적 유형의 사회와 산업적 유형의 사회를 구분했다.256 식민지 사회는 군대가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아도 궁극적인 지배 기구였던 ‘군사적 유형‘의 사회다. - P864

노예무역과 노예제의 역사는 진정으로 세계적인 무대에서 전개되었다. 육지와 바다를 통한 노예 거래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거의 전역과 아시아의 큰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노예의 최종 목적지에서는 그들이 가져온 문화적 지식이 현지 문화에 통합되어 새로운 혼성 문화를 이루었다. - P892

부르주아지는 개인의 측면에서나 기능에서나 사회의 다른 집단들보다 지역에 얽매인 ‘지방적‘ 성격이 덜했고 더 쉽게 이동했다. 부르주아지는 이전移轉의 제공자였으며, 이 일을 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행했다. 그렇지만 모든 행상인과 소상점주가 다 부르주아지가 되지는 않았다. 부르주아지개념은 어느 정도 팽창적인 위세를 포함한다. 부르주아지는 자기가 속한 지역세계를 뛰어넘는 포부를 지니며, 소비 습관을 비롯해 여러 방식으로 이를 드러낸다. 부르주아지는 일찍부터 의복처럼 멀리 떨어진 외국의 느낌을 주는 소비재를 구매하려고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열등한 취급을 받는 이웃과 자기를구분했다. 부르주아지는 남의 것을 제 것인 듯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주의적 성향을 지녔다. - P901

새로운 운송 수단으로써 창출된 이동성 공간은 엄격하게 조직되고 분리되었다. 기관차와 객차를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 앞선 경제들과 운항과 보수를 넘어서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 기술의 수혜자들은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극소수 국가에서만 철도 여행은 국내의 기술적·산업적 기반에 의지했다.
항해와 철도 여행의 연결 효과를 지적하는 것은 시시한 일이다. 네트워크의 형태가 더 흥미롭다. 어디에 철도를 건설할지는 지리로부터 자동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대개는 민간 투자자들의 발언권이 가장 컸다. 도시들은 중추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으며, 어디서나 공공연하는 은밀하든 정치적 책략이 역할을 했다. 항해는 세계 도처를 연결했던 반면에 철도는 대륙에 국한되었다. - P931

교통 혁명의 전체적인 효과는 일련의 부수적 효과와 연결된 직접적인 운송 개선에서 생겼다. 그러한 부수적 효과의 하나는 철도 역사의 건축에 따른도시 경관의 개조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경제적 공간의 창출이다. 따라서철도와 해운의 역사는 단순한 교통의 역사를 뛰어넘는다. 가장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이주의 성장과 변화다. 이는 몇몇 지역에서 발흥한 산업자본주의와 새로운 변경의 개척 같은 다른 자극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한 세계사의 한과정이었다. - P933

19세기에 인간의 이동성은 기존 국민국가들 사이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동성은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많은 경우에 사회와 국가는사실상 이동성으로부터, 이동성을 통해 생성되었다. 유입 사회는 19세기에 전세계적인 사회적 경관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 P941

19세기 중엽의 유럽 중간계급에서 남편의 가내 권위 상실에 동반된 여성의 가정화는, 그리고 이와 동시적인 현상이었던 도덕적 고양은 멀리 물러나서 보면 중국 여성이 가내의 사적 영역에 엄격히 제한된 것과유사했다. 그 제한이 시대를 뛰어넘는 ‘전형적으로 중국적인‘ 현상이 결코 아 - P959

니었고 제국주의 시대 말기의 특징이었음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 P960

그러므로 ‘세계 사회‘는 당대의 기술적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커뮤니케이션 범위로만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만날 기회가 없으면서도 서로를 알고있는 인간들 사이에 사회적 유대가 형성되었으며, 새로운 통신수단과 이로써가능해진 여러 형태의 구체적인 인식 위에서 ‘세계‘의식이 출현했다. 이 세계의식은 알려진 세계의 통합을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던 ‘축의 시대‘ 이래로 존재한 앞선 여러 보편주의와 달랐다. 따라서 19세기의 세계 사회사는계층과 제도에 관심을 보인 종래의 사회사보다 더 많이 사회적 상상력을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사는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문화사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 P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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