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장기 19세기(~1924) 정치사 속의 지역과 제국들

유럽 국가들의 협의 체제는 유럽 내의 평화와 결속을 다진다는 목적을 우선적으로 추구했지만, 이와 동시에 유럽 국가들 사이에 발생할 군사적 충돌을 조정함으로써 유럽 제국들이 식민지를 얻기 위해 세계로 팽창할 때 배후를 튼튼하게해 주었다. 유럽의 평화는 유럽 제국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팽창할 때 매우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러한 제국적 역동성에서 가장 크게혜택을 받은 것은 영 제국이었다. - P96

재건된 프랑스 제국은 헌법을 갖고 있었으며, 기존의 질서는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기 때문에 정치제도 역시 인민이 원하면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이 확고하게 사회에 뿌리내렸다. 그러나 이런 정치 이념은 유럽-대서양 지역에 이미 풍부하게 존재하던 정치 강령들과 합류해 그 어떤 우위도 얻지 못했고, 왕국과 주권, 제국, 정의의 혼합적인 개념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 P109

포괄적이면서도 국제법을 통해 조정된 제국적 세계 질서가 등장하는 데가장 문제가 되었던 장애물은 (제국 간의 경쟁 외에) 민족주의가 아니라, 유럽의해외 제국이 가진 문화적·종교적·인종적 다양성이었다. 제국의 정당성을 둘러싼 경쟁적인 주장들이 서로 충돌했으며, 19세기 중반에 수많은 전쟁과 정치적 위기를 겪은 후에 전 세계에 대한 유럽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결국 인종과 문명, 종교에 관한 담론으로 귀착되었다. 제국적 보편주의가등장하고 제국들 사이에 통용되는 세계적인 규범도 등장했지만, 1880년대 이후에는 그동안 세계화된 세계가 다시 재지역화하는 현상이, 즉 세계가 다시지역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19세기 후반에형성되었던 지정학적인 지역 구도가 유럽 제국의 팽창에 대한 이슬람 지역과아시아 지역, 아프리카 지역의 전통적이고 보호주의적인 도전이 아니라, 제국적 질서의 세계화 과정에 통합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들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오히려 나폴레옹 전쟁에서 이른바아프리카 쟁탈전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 제국들이 전성기에 도달하면서 부딪혔던 정당성 위기가 낳은 변증법적 결과였다. - P113

심지어 캅카스 지방에서, 다시 말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 국경선의 다른 편에서 러시아 제국에 맞서 무슬림 저항운동이 일어났을때, 무슬림 진영은 오스만 제국의 그 어떤 직접적인 원조도 기대할 수 없었다.
캅카스는 지정학적으로 가깝고 사적으로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대중은 아프간인들의 전쟁보다는 캅카스에서 발생한 백인 무슬림의 투쟁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물론 1860년대까지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캅카스, 북아프리카에는 무슬림들의 경험과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표현할 수있는 식자층과 여론층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 P130

국제법은 유럽의 제국들을 위한 국제주의의 도구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대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다양한 비유럽 제국들의 주장에는 그 어떤 비전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이 등장시킨 국제법은 국제법의 전 지구적 확대보다는 국제법의 재지역화를 촉진하는 것에, 다시 말해 ‘지역적 이해관계 추구‘를 방지하기보다는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 P155

유럽 중심주의적 질서가 정점에 도달하면서 동시에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 무슬림의 결속감이나 정치적 연대 의식도 그 극에 도달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발생한 제국 중심에서 지역 중심으로의 변화(재지역화)가 반드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제국 개혁의 출발점이나 도구가 될 수도 있었으며, 제국적 공동체를 꿈꾸는 세계시민주의적 비전이나 제국 내 범민족적 연대 같은 비전의 출발점이나 도구가 될수도 있었다. 제국적 세계가 재지역화하는 시기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 시대까지의 발전도 어떤 직선적인 논리에 따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제국이 어떻게 국가로 전환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국과 인종, 지역 같은 정치 언어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현상에 관해상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67

사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지식층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전통을 본질화하고 기독교적인 백인의 서양을 전략적으로 본질화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화된 지역적·문화적·인종적·종교적 정체성이 발전했다. 지역 정체성은 극동과 아시아, 무슬림 세계, 서양같이 전 지 - P172

구에 확산된 지정학적 범주뿐 아니라 점점 밀접한 아시아 내적 결속과 아프리카 내적 결속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의인프라를 통해 촉진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범민족주의의 사상가와 운동들이 제국이나 제국적 세계 질서 자체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P173

오스만제국은 ‘무슬림 세계‘라는 아이디어와 그 세계에서 자국의 리더십을 주장하는 이론을 고도의 제국적 목표를 추구하는 데 이용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영국과 오스만 제국의 동맹이라는 비전을 촉진하는 것이, 그리고 유럽 제국들과의 외교적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더 중요한 것은 칼리파의 정치적 이상이 전 세계 무슬림 사이에 확산된 것이, 유럽중심적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무슬림 세계 지역의 정치적 요구와 가치들을반영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요구 사항에는 유럽 제국 치하의 무슬림에 대한차별 철폐와 실질적인 평등 실현, 식민지에서 무슬림의 관습과 전통의 존중, 기독교의 후견이나 선교 활동으로부터의 보호, 다른 무슬림에게서 오는 인도주의적인 도움과 지원 허용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원칙은 유럽에 존재하는 다양한 보편주의나 인도주의적 사상과도 일치했지만, 무슬림 정체성이라는 틀 안에서 작성되었다. 예를 들어 붉은 초승달은 제국의 시대에 무슬림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뜻하는 상징이 되었다. 유럽의 여론이 오스만 제국안에서 기독교도를 해방하기 위해 인도주의적 간섭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면에, 인도와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기독교 식민 권력에 맞서무슬림들을 지원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해 주기를 희망했다. - P208

제국주의의 전성기에 범민족주의적 ‘냉전‘이 갖는 국제정치적 차원은1905년에 러시아를 상대로 일본이 거둔 승리에서 가장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1905년의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영국, 일본 제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인종과 문명, 세계 질서에 관한 전 세계적 토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과 정치적 특성 때문에 일본의 승리는 전 세계에서 ‘황인종‘에 속하는 아시아 제국이 ‘백인‘과 ‘기독교‘, ‘서양‘ 제국에 맞서거둔 최초의 승리로 해석되었다. 일본의 승리가 무슬림 세계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이 모든 지역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인종이나 문명, 진보 같은 정치적 의미를 가진 주제를 중요시하는 세계 여론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가 가지는 세계사적인 의미는 바로 전쟁 직후 그것이미칠 영향에 관해 논평했던 폭넓은 동시대 관찰자들이 언급했다. 일본의 승리가 제국 간 관계의 차원보다 오히려 인종적·문명적 관점하에서 토론되었다는 사실은 지역적인 지정학이 제국 사이의 세력균형 변화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 P233

제국은 본국과 식민지의 도시와 촌락에서수백만 명의 청년을 동원해 제국의 군복을 입히고 전선에 보내 서로 싸우게할 수 있었다. 참전국들은 이미 견고하게 확립된 근대국가 체제를 보유하고있어서, 총동원을 통해 자기들의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투입할 수 있다는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의 정치가 일차적으로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계대전이 지닌 지역적 차원의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세계대전 전야에 제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지정학적이고 지역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관찰했는데, 여기서 그들이 갖고 있던 과도한 희망과 두려움은 인종과 종교, 문명의 연대와 연관되어 있었다. 제국들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감정, 상황 인식과 행동뿐 아니라지역과 종교, 인종에 토대를 둔 정체성이 한층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전쟁을 장기화했으며, 결국 전쟁의 결과를 각인했다. - P247

‘전체적으로 보아 1914~1924년의 시기에 무슬림이 정치적 비전을 확립하기에는 너무 많은 모순된 사건과 예기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무슬림의 지역주의적 전망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이제 그 구심점이 되었던 칼리파 제도나 오스만 제국의 상징적인 지도력이 결여된 채였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몰락은, 그리고 지역적 민족주의 모델로서 터키 공화국의 수립은 무슬림세계에서 무슬림 지역주의의 민족주의적 버전을 촉진했다. 또한 칼리파 제도의 종식은 당시까지 유지되어 오던 경쟁 제국들과의 공생 관계도 생생하게 노출했다. - P281

1911년의 신해혁명에서 시작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파리 강화회의와 5·4운동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지역주의는 지적 비전으로서 정치적인 대안의 세계에 줄곧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1905년에 대두한 아시아 연대라는 낙관주의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수많은 방향으로 분열되었다. 전후 국제 질서의 재편에 따라 아시아의지역주의적 비전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기는 했지만, 전간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무엇보다도 ‘백인‘ 국가와 자치령에서 시행된 이민정책이 계속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국적으로 변형된 아시아지역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본의 전쟁 수행과 선전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P288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분명해진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당시까지 여전히 기울어져 있고 지역화되기는 했지만, 전 세계에서 발발한 운동과 투쟁, 요구들을 서로 연결했던 세계적인 여론과 국제적인 정치 무대가 이제 전 세계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역주의적 경향은 어디서나 서양의 행동가나 기구에 우선권을 부여했던 유럽 및 아메리카 중심적인 서사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 이루어진 정치적인 비전과 모델이 특정한 지역 혹은 여러 지역에서 정치적 상상력에 큰 영감을 주었다. - P297

불평등한 권력관계, 정치성을 띤 정체성, 국제기구의 작동 방식에 대한 불만, 지역 동맹 모색, 종교적·인종적 정체성과 외교정책 사이의 관계 등 현대의국제 질서가 던지는 수많은 도전은 장기 19세기에 그 뿌리를 갖고 있다. - P302

세계가 서양과 아시아, 이슬람 세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라는 몇 개의정치 블록으로 구분된 것은 18세기 이래로 이어져 온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20세기 초의 제국적 질서가 세계화되는 과정에 발생한 위기를 반영한 것- 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적으로나 대륙별로 구분된 지역들은이미 이전에 존재했던 지역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유산이라기보다 19세기 말의 제국적 세계화의 결과였다는 말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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