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녀에게 진심이었던 이는 강포수 뿐이었으나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그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해댄다. 그러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강포수에게 미안함을 전하는데 그 장면이 왜 그리 짠하던지. 강포수가 귀녀에게서 종국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게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슨 죄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 귀복이와 한복이, 홍이 등이 그랬다. 부모의 잘못으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고향에 돌아온 이들. 이 중 한복이는 참 잘 크고 있구나 싶었다. 어찌나 생각이 바른지. 부모가 다 죽고서도 그리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역병과 흉년으로 많은 이들이 죽는다. 천재지변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겠나. 하지만 내가 어려우면 주변을 배척하기 쉽다. 그걸 보듬고 함께 가는 이가 대단한 것이겠지. 마을의 인심이 사나워지고 흉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틈타 삼수 같은 놈은 지 살길 때문에 은혜를 베풀었던 이들을 배반하고 뒤통수를 친다. 어찌 보면 줄타기를 잘하는 처세에 능한 것이겠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 홍씨가 등장한다. 조준구의 본처답구나. 쓰레기 옆에는 쓰레기가~? 하는 생각을 절로 했다. 무너진 최씨 집안을 어떻게든 꿰차겠다는 부부의 행태는 똥물을 튀겨도 시원치 않은 일이었다. 삼수와 조가 부부가 등장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3권의 역사적 배경은 외국 열강에 하나 둘 이권을 뺏기는 조선의 상황이 드러난다. 거기에 서재필, 어윤중, 이용익, 이범윤 등의 인물을 통해 당시의 조선 내외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다.

'각처에 왜인들 은행이라는 게 생겨서 한전(韓錢) 어음까지 떼는 판국이니 장차 어찌될지.... 노상 하는 말이오만 큰일이외다.'
'지각 없는 사람들은 서울 제물포 사이에 나는 듯한 철마가 달리고 종로 네거리에는 전등불이 휘황하며 한강에는 철교를 놓았다 하여 신기해들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을 우리네가 만들고 우리네 임의로 한다면야 반가운 일이지요. 우리들도 남들만큼 나라 사정이 달라져야 할 테니 말이오. 헌데 그 내막을 알고 보면 가슴을 칠 일이고 숫제 쓸개를 뽑아서 갖다 바친 꼴이지 뭐겠소? 듣자니 서울 제물포 간의 철도만 하더라도 그 권리를 얻기 위하여 미국인이 임금 관계 대신에게 막대한 금액을 헌납했다는구려. 나라에서 그네들에게 철도를 부설하는 땅을 빌려주었으면 정당한 임대료와 권리금을 떳떳하게 받아야 하거늘 상호 간의 약정서의 내용이라는 게 실로 해괴하다 하오. 또 하나 해괴한 일은 그 권리마저 이문을 붙여서 미국인이 왜인들에게 팔아넘겼고 왜인들이 그것을 성사했다 하지 않소?'
'어디 그뿐이겠소. 도처에서 우리 금광을 파헤쳐서 각 나라들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다 하오. 허가도 없이 마구 덤벼서 도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오. 산의 나무들도 저희들 마음대로 베어 팔고 바다의 고기도 저희 마음대로 잡아가고 삼포(蔘圃)를 강점하는가 하면 조선옷 입은 왜인이 작당하여 수 년을 정성 들여 키운 삼을 모조리 뽑아가고 백성들 재물까지 약탈함이 다반사요.' - P60~62


1876년 개항 이후 1894년 사이에도 열강의 경제 침탈이 있었지만 1895년 이후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열강들은 수출을 통해 이득을 얻기보다 이권을 앗아가는 일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그들이었다. 이권을 차지한 나라들은 이권을 철저히 확보한 뒤 온갖 특권을 누렸다. 








주요한 이권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일본
1898년 서울-부산 사이 철도 부설권
1900년 직산금광 채굴권
1900년 경기도 연해 어업권
1901년 인삼 독점적 수출권
1903년 평양 무연탄 채굴권
  • 미국
1895년 운산금광 채굴권
1896년 서울-인천 사이 철도 부설권(뒷날 일본에 팖)
1898년 서울 전차, 전등 및 수도 경영권
1899년 서울-개성 사이 철도 부설궐
  • 러시아
1896년 경원과 종성금광 채굴권
1896년 경성 석탄 채굴권
1896년 두만강, 압록강 및 울릉도 산림 채벌권
1897년 해관 관리권
1899년 동해안 포경권
  • 영국
1896년 해관 관리권
1898년 은산금광 채굴권
  • 프랑스
1896년 서울-의주 사이 철도 부설권
1901년 창성금광 채굴권
  • 독일
1897년 금성금광 채굴권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12~114

보면 알겠지만 조선에 남아 있는 이익이 이제 무엇이 다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 넘어간 것을 알 수가 있다. 철도 부설권은 일본이 거의 대부분 가져갔고 운산금광은 당시 순금이 터지는 잭팟 금광이여서 나오는 족족 금이 쏟아졌다고 한다. 러시아는 백두산 아래 나무들을 벌채하여 만주 철도를 부설하는 데 버팀목으로 사용하고자 했고 거기에 사용되는 석탄도 조선에서 공급하려 했다. 국경 지대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피폐해졌음이 틀림없다.


"그분이 돌아와서 외무대신 자리를 마다하고 신문을 만들고 몽매한 백성을 깨우치려 노력하였지만 실상 그분의 본업은 의학박사였단 말씀이오. 그런 양반이 이곳에 부질 못하고 돌아갔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소."
"글쎄올시다. 상감께서 지나치게 소심했기 때문이지요. 왕실을 없이하고 미국처럼 대통령을 뽑을까 두려워하신 나머지, 이래가지고는 나라가 안 망하고 어찌 견디겠소? 나라 꼴이 제대로 되려면 식자들이 먼저 깨달아야 하고 서재필이 그 양반과 같이 서양문물에 밝아서 반상(班常)의 구습부터 타파해야 할 것이오."
"서양문물에 밝은 것도 좋고 반상의 구습을 타파하는 것도 좋고, 허나 서재필인가 그 양반같이 되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소? 그 양반이 명문의 자제로서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겠는데 이십 세의 약관으로 장사들을 이끌고 국사를 바로잡을 충심에서 거사한 것도 장하고 만리타국, 말조차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에 가서 빈주먹으로 의술을 배운 것도 장한 일이었소. 허나 그 양반이 어디 우리나라 백성이오? 이름 석자를 버리고 그곳 이름에다 그 나라 백성이 되었고 그 나라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근본이 잘못 되어버린 그 사람 본을 따는 것은, 글쎄올시다. 산간벽촌에서 침이나 꽂고 약방문이나 쓰는 늙은이 소견에는." - P142~144


서재필은 영은문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영은문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개선문 같은 조선 독립의 상징물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과 함께 신문사 설립과 민권단체인 독립협회 결성을 서둘렀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에 창간되어 정부와 독립협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이라는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곧 전통적 사대질서를 거부하고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것이다. 이때의 독립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자는 의미였다.
독립협회에서는 이해 가을부터 활발하게 토론회를 벌였다. 서재필과 윤치호 주도로 일요일마다 벌였던 토론회는 1년 동안 34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하급 벼슬아치, 유학을 다녀온 신청년, 각급 학교의 교사와 학생, 심지어 장사꾼들까지 참석해 자리를 메웠다. 토론장소는 서대문 언저리에 있는 예전 경기감영의 내아(內衙)나 독립관 등이었다.처음에는 머리를 깎아야 옳으냐" 따위, 사회 인습의 개량, 위생과 청결 등을 주제로 삼았으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문제 등을 다루어 친러파와 대립하기도 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121~124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주역이었다. 김훈장의 시선은 이해할 만하다. 그는 미국인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다만 그가 독립협회를 만들고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이전 토지 2권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고 보부상들의 단체인 황국협회를 뒤에 조종해서 독립협회를 탄압한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고종이었다.

"이십 년이 넘었구먼.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있을때 말이오. 그때 청나라 정부에서 도문강(圖們江) 동북에 있는 조선사람들을 쫓아내려 했었거든. 그래서 어윤중이 그 양반이 종성(鐘城)의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시켜서 백두산을 탐색하게 하고 정계비(定界碑)를 찾았는데 정계비가 있는 것은 도문강이 아니요 토문강(土門江)이었더란 말이오. 그 강은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으로 빠지거든. 그러니 청나라 사람들 말문이 막혀버린 게요."
"어윤중이 그 양반은 착실한 살림꾼이었는데 백성들한테 맞아 죽다니, 그 양반 친일할 사람도 아니고 친로할 사람도 아니고 청나라하고 손잡을 사람도 아니요, 나라에 이득이 된다면 누구하고도 친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겠소. 그걸 백성들이 알아야 하는데...." - P272~273

두만강 국경 관련하여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책을 통해서 살펴본 바가 있었다. 간도 지역은 1877년 조선인 14가구가 용정에 처음 정착했다. 본래 있었던 세금 폐해에 이 무렵 조선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자 많은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졌고 이에 자발적으로 간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했으나 이후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경을 정하기 위한 청나라 측과의 회담이 열렸는데, 1차 회담에서는 백두산정계비에 기재된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주장하는 청나라 측과 두 강은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조선 측이 의견을 조율하지 못해 무산되었고, 2차 회담에서도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각각의 주장을 지도로 남기고 결국 국경을 확정하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어윤중은 이 협상에 참가한 당사자다. 을미사변 후 이어진 개혁에서 친일 내각이 탄생하고 어윤중은 탁지부 대신으로 임명된다. 고종과 친러파의 합작으로 아관파천이 이루어지고 기존 조정 인사들은 체포령이 내려진다. 그는 김홍집 등이 성난 군중에게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고향으로 피신하는 길에 사망한다.


제4차 김홍집 내각(친일 내각)은 내외의 비난 속에서도 급진적 개혁을 단행했다. 더욱이 민비시해사건으로 미우라가 소환되고 책임을 묻는 급박한 정세 아래 국가의 중대사가 연달아 결의되어 고종의 재가에 올려졌고 고종은 이들 안건에 수결을 놓기에 바빴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권』 - P58~59








전 탁지부 대신(前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이 귀향하다가 용인(龍仁)에 이르러 거주하는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 『고종실록』 建陽 원년(1896) 2월 16일


"이곳에서의 법이란 곧 주먹이야. 담판을 해야 한다구? 그건 한 시절 전의 체면이나마 생각하던 시절의 얘기 아닌가. 이부사가 내 목을 쳤으면 쳤지 국경을 줄일 수 없노라 했던, 그 시절 말일세."
이부사랑 1887년 도문강(圖們江)을 중심한 국경 분류로 인한 담판에 감계사(勘界使)로 참석했던 당시 안변부사(安邊府使)였던 이중하(李重夏)다.
"총 휘두르는 놈이 땅 한 치라도 더 먹게 돼 있지. 서울서 군병을 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 나도 이부사 같이 내 목 내어놓고 사포대(私砲隊)를 모을 수밖에. 우선 병영(兵營)을 설치해놓고 힘으로 대항하는 게야. 우리 백성들이 남부여대하여 찾아와서 피땀으로 일궈놓은 땅을 왜 내놔? 어림없는 소리지." 이범윤의 말이었다.
'서울서 군병을 보내? 죽은 나무에 꽃 피기를 바라지. 유약한 상감, 파벌싸움에 영일이 없는 정상배들! 한 치 앞이 눈에 봬야 말이지. 하긴 나라 안도 지키지 못하는 마당에서. 대궐 안도 지키지 못하는... 결국 사포대를 만들어 그곳 백성 스스로가 힘을 뭉쳐 대항할 수밖에 없겠지.' - P293~294

이범윤(李範允, 1856년 12월 29일 ~ 1940년 10월 20일)은 구한말 시대 복벽주의 성향 독립운동가이다.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여 국내침공작전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에서 변계경무서 예하 북변간도관리사 직책을 지냈다. 그는 간도로 파견되었고, 이듬해(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지역 조선인에 대한 행정 업무를 전담하였다. 이범윤은 이 지역의 포수들로 자위적 성격의 군대인 사포대를 조직하였는데, 이 사포대가 향후 간도 지역 의병운동의 한 기반이 되었다. 「위키피디아 이범윤」

이범윤은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 군대와 연대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906년 이범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령으로 망명했다. 이후 이 지역에 이미 기반을 잡고 있었던 최재형의 도움으로 기반을 닦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았다. 외국에 이권들은 넘어갔고 개항 이후 열강들과 차례로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이 강산은 무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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