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과 지엽은 서로얽혀 있다. 잎, 꽃, 열매가 피었다가 지고 열렸다가 떨어지는 무상無常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의 생명이 그 신진대사에 걸려 있다. 사상에있어서도 현실적 측면을 지엽으로만 여기며 무시하는 경향을 ‘근본주의‘fundamentalism로 경계한다. 역사학은 근본에 치우치는 경향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 분야다. 취급하는 자료가 남긴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선별되고 재단된 것이기 때문이다. - P9
제목에 ‘오랑캐‘란 말을 썼는데, 여기서는 이 말을 제한된 의미로쓴다는 사실부터 밝힌다.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보통 쓰이지만, 여기서는 夷, 蠻, 戎, 狄 네 글자의 공통된 훈으로서 ‘오랑캐‘, 중화와 구분되는 주변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도 당연히 오랑캐의 하나다. - P26
북쪽이 변화의 여지가 큰 방면이었다. 강우량이 꽤 되고 지형도평탄한 지역이 많다. 유목이 가능한 초원지대가 있고, 농업기술의 발 - P32
달에 따라 농경사회가 자라날 수 있는 지역도 많았다. 흉노로부터 선비, 돌궐,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에 이르기까지, 중원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오랑캐의 대부분이 이 방면에서 나타났다. - P33
1986년 이후 사천 지역의 고대문화를 바라보는 고고학계의 시각이 달라졌다. 황하문명의 한 지류가 아니라 그와 대등한 하나의 큰흐름이 이 지역에 있었다고 보게 된 것이다. 그 흐름을 확인하기 위한조사 작업이 넓게 펼쳐졌고, 1990년대에 몇 개 중요한 유적지가 발견된 끝에 2001년, 삼성퇴와 맞먹는 품질과 규모의 금사 유적이도시 서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다량의 뛰어난 청동기와 옥기 외에가면假面, 관대冠帶 등 특이한 금제품이 여럿 나왔다. 고촉국古蜀國의도읍이 어느 시점에서 삼성퇴에서 금사로 옮겨간 것으로 추측된다. - P50
기원전 3세기 말에 건설된 ‘흉노제국‘은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쪽 농경사회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는 데 따라 그로부터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거대한 군사·정치조직을 만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발전시킨 조직 기술과 원리를 활용함으로써 유목민들이 오랫동안 유리한 조건을 누릴때도 있었다. 조직의 필요와 방법이 모두 농경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그림자 제국‘이라 하는 것이다. - P55
무제는 기원전 133년부터 흉노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취해서 기원전 111년과 110년에 다시 정벌군을 보냈을 때는 "수천 리를가도 흉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흉노 퇴치에국력을 기울였다. 20년에 걸친 흉노와의 전쟁이 워낙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면이 눈에 잘 띄지 않는데, 무제는 북쪽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즉위 직후에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 것이 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협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풀이되지만, 서역에는 서역대로 무제가 노력을 기울일 의미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조선朝鮮 남쪽으로 남월南越을 정벌함으로써 무제는 한제국의 모든 주변부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었다. - P73
중국사에서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관계를 나란히 움직이는 두 개수레바퀴보다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관계에 가까운 것으로 나는 본다. 자전거가 나아가는 동력은 하나의 바퀴에서 일어나고 다른 바퀴는 그에 끌려가거나 밀려가는 것이다. 중국문명 발전의동력은 농경사회의 잉여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전거의 앞바퀴에는 동력을 일으키는 기능이 없지만 균형을 유지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 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중국사의 진행에서 유목사회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농경문명 발전과 확장의 ‘변경‘frontier 역할이다. - P88
호. 한 이중체제에서 군사 방면은 ‘호‘의 원리로, 행정 방면은 ‘한‘ 의 원리로 운영된다. 군사와 행정의 분리에 따라 농민이 군대의 폭력에서 보호받고 조정의 조세 수입이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에게서 농민 괴롭히는 특권을 빼앗으면 무슨 재미가 남는가? 군대를 거느리는 오랑캐 귀족들은 행정을 맡은 한족 관료들에게 피해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풍 태후와 효문제의 변혁은 이중체제를 넘어 군사를 행정에 종속시키는 중국화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더클 수밖에 없었다. 천하통일이라는 그 변혁의 목표를 향해 대대적 남방 정벌에 나섰다면 군대의 역할이 생겨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효문제 사후 20여 년 동안 정치 혼란으로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늦어지면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포화상태에 이르러터져 나온 것이 6진의 난이었다. - P98
680년대 돌궐제국의부활은 내경전략에서 외경전략으로의 복귀였으며, 당나라에서 내경전략의 수익성이 떨어진 결과였다. 돌궐 제2제국은 제1제국만큼 큰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당나라 안에서 돌궐외에도 많은 오랑캐 세력이 내경전략을 펼치고 있어서 돌궐의 외경전략이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11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은 송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 공신세력이 측천무후에게 거세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안녹산의난까지 처음 약 100년간은 오랑캐 중심의 절도사 세력에게 급료를주며 용병으로 썼다. 안녹산의 난 후에는 북중국 여러 지역의 통치권을 절도사들에게 떼어주고 외부의 위구르에게 의지하며 약 100년을더 버텼다. - P129
농경민을 초식성, 유목민을 육식성으로 본다면 중원 동북방의 오랑캐는 잡식성이었다. 농경, 유목, 그리고 수렵 ·어로 등 다양한 산업이 혼재했다. 산업다각화‘가 되어 있어서 지역 내의 자급자족에 좋은조건이었지만 외부세력과의 경쟁에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농경사회에게는 생산력에서 뒤졌고, 유목사회에게는 전투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급자족의 경향 때문에 대규모 조직의 동기도 약했다. - P142
20세기 들어서부터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의 발전으로 그 편향성을 보정할 근거가 많이 확충되었다. 덕분에 유목사회의 역할에 관한이해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 페르시아 등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편향성을 극복할 필요가있다. 중앙아시아를 통한 육상 교류에 비해 동남아시아를 통한 해상교류의 실상을 밝히기가 더 어렵다는 문제다. 유목민과의 관계는 왕조의 명운이 걸린 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많은 반면 남방의해상 교류에 관한 기록은 훨씬 적다는 것이 또 하나의 편향성이다. 거대 문명권 사이의 교류는 장거리 교역의 필요성에 좌우된다. 중국문명은 농경사회의 높은 생산성을 발판으로 경제력을 크게 키워장거리 교역의 조건을 갖추었다. 교역의 비용을 감수할 만한 사치품의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경제력의 기반이 농업생산력이기 때문에 해로보다 육로의 개척에 나서기가 더 쉬웠다. 사막과 고산준령을 지나는 육로, 실크로드가 오랫동안 해로보다 큰 역할을았던 이유다. - P148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 얻는 가장 큰 도움은 국가주의의 틀만이아니라 종래 지역학의 틀까지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을 얻는 데 있다. 종래의 지역학은 세계경영의 필요에 발판을 둔 것이어서 19~20세기 상황에 따라 지역을 구분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 상황과통하지 않는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근래 인류학계에서는 기후, 생태등 기본적 조건들을 감안해서 지역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들이 제시되어왔다. - P174
여러 문명권을 포괄하는 전지구적 의미의 ‘세계제국‘은 문명의 세계화가 이뤄진 근대세계의 특이한 현상이다. 그런데 몽골제국은 그런 세계제국에접근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바로 그 특성이 중화제국의 틀로는 포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몽골제국의 성립을 ‘문명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이해한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라는 시기의 역사적 의미에 접근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 P189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를 중심부core-반주변부semiperiphery-주변부periphery의 3중 구조로 설명했다. 선진국-중진국-후진국의 통속적 관념을 넘어 그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밝힌 것이다. 세계체제론이큰 각광을 받은 데는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함의가 크다는 이유가 있다. 종래의 관념으로는 어느 나라든 좋은 (자본주의) 정책을 잘 수행하면 모두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세계체제론에서는 구조적 제약을 지적한 것이다. 이 점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차우두리와 아부-루고드가 월러스틴 담론의 뼈대를 수긍하면서도 넘어서야 할 한계로 지적한 것은 한마디로 유럽중심주의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추동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만을 "진정한" 세계체제로 보는 데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항해시대 이전 인도양의교역망에서도 세계체제의 특성이 충분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애쓴 것이다. - P198
1234년의 금 멸망과 1276년의 남송멸망 사이에 몽골의 정복 정책이 크게 바뀌었다. 유목민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랑캐로서타자화하던 주류 한족사회와 마찬가지로 농경사회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목민은 중국을 약탈 대상으로만 봤다. 그러나 접촉면이넓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농경민을 백성으로 다스리는 입장의 중화제국을 몽골 지도부가 지향하게 되었다. 그래서 1271년 원 왕조의선포에 이른 것이고, 그 후의 남송 정복은 적국의 침략이 아니라 ‘천하통일‘의 사업이 되었다. 몽골 지도부의 정책 전환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 야율초재가 꼽힌다. - P218
프란체스카 브레이는 Rice Economies』(벼농사 경제체제, 1986)에서 송나라 때 벼농사 기술 발전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던 사실을 설명했다(203~206쪽). 1012년부터 참파 지역의 품종을 들여와 이모작을 시작하게 한 것이 가장 중요한 사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송나라 경제의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한편에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준 것은 운하 중심의 수운 네트워크였다. 수운 네트워크는 황하 유역보다 장강 유역 남중국에서 크게 발달해서 중국의 경제적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가는 조건이 되었다. 1126년수도가 금나라 군대에 함락되고 황제 이하 온 조정이 통째로 포로가되는 파국을 겪고도 남쪽으로 옮겨 제국체제를 이어간 것은 남중국의 경제기반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28
쿠빌라이 즉위를 계기로 몽골제국이 4칸국으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평면적 분열이 아니었다.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두 칸국(킵차크칸국과 차가타이칸국)과 달리 일칸국은 대칸(원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는 입장을 오랫동안 내세웠다. 원나라와 일칸국은 나란히 농경제국의성격으로 바꾸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관계는 군사적 동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교류를 통해 두 문명권을 결합하는 방향의 노력이었다. 4칸국의 분열은 실제에 있어서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였다. - P233
중국을 완전히 점령한원나라에 비해 이슬람권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여러 적대세력과 접하고 있던(북쪽의 두 개 칸국과 서남쪽의 이슬람권, 서쪽의 기독교권) 일칸국은계승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불안정한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칸국에 안정된 왕조가 자리 잡고 대칸을 받드는 조공관계가이어지기 바라는 쿠빌라이의 뜻에 볼라드의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명을 무력 아닌 지혜로 수행하는 것이 볼라드의 역할이었다. 일칸국 쪽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풀라드칭상"Pulad Chinksank으로나온다. ‘승상‘의 직함이 이름의 일부처럼 쓰인 것은 그의 권위를조하기 위해서였다. - P244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에는장건張 시대 이래 꾸준히 문물의 교류가 있어왔다. 그러나 상인과사절을 통한 교류가 물 몇 바가지씩 떠서 옮기는 수준이었다면, 원나라와 일칸국이 교류를 위한 관서까지 만들고(의약, 농업, 천문역법 등) 기술자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등 지속적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수도관을 설치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 P253
8세기 초반까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포괄한 이슬람세계는 또 한 차례 문명의 범람원이 되었다. 8~10세기 이슬람 황금시대는 이 범람원에 넘쳐나는 다양하고 풍성한 문명자원을 통합한 시기였고, 번역이 그 중요한 방법이었다. 문명 초창기부터 이 지역에 쌓여온 문명자원은 여러 언어로 전해져 있었고, 페르시아어와 그리스어가 그중 중요한 언어였다. 이것을 아랍어로 옮기는 작업이 이 시대 학술활동의 주축이 되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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