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벌써 오래전부터자기의 몸속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식물의 지극히 은밀한 성장을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 식물의 형태를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람이 제 몸속에 자라는 암을 언젠가는눈치를 채듯이 그도 속의 부스럼이 자라고 있는 기척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끔 심란하게 스스로 의심해보기도 했다. 나는 정신병의 초기나 혹은 상당히 깊어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런데 몸의 탈과는 달리 마음의 그것인 바에야 환자가 스스로를 진단하는 힘이 있는 동안에는 아직 그의 정신은 파멸까지에는 이르지 않은 것일 테지. 그리고 나는 파멸은 원치 않아. 그리고 아니, 나는 행복을 원한다. 다만 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 P37

이광수의 임은 민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민족 같은 것을 업고 나설라치면 단박 바지저고리 소리를 들을 테니 이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세대. 무슨 일을 해보려 해도 다절벽인 사회, 한두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아니다. 나는 시대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실상은 시대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민족 같은 것도 아무래도 좋다. 다만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걸 이용한다는 것뿐이다. - P40

그가 머릿속에서 쌓아둔 온갖 재물과 인물, 강과 산은 그에게 외계外界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왔다. 희고 빛나는 시멘트의 굴뚝을 빼놓는다면, 인민위원회 건물이 넘어지는 것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이 자기네 도시가 망하는 것을 거꾸로 선 기쁨, 어떤 마조히즘의 눈으로 바라본 심정도 소년 독고준의 태도보다 그렇게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른들 눈에 보지 못한 동화—남쪽 나라에서 번영하고 있다는 태극기와 이승만 박사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파괴를 눈감아버렸기 때문이다. - P47

폭격은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져오는 그 쏴 소리와 쿵, 하는 지동 소리는 한결 더한 것 같았다. 준은 금방 까무러칠 듯한 정신 속에서 점점 심해가는 폭음과 그럴수록 그의 몸을덮어누르는 따뜻한 살의 압력 속에서 허덕였다. 폭음, 더운 공기.
더운 뺨. 더운 살. 폭음. 갑자기 아주 가까이에서 땅이 울렸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렸다. 폭음. 또 한번 굴이 울렸다. 아우성 소리. 폭음, 살냄새··· - P62

야합이란 현실의 논리다. 점잖게중용中庸이네, 해보아도 속은 마찬가지다. 기승해서 달려들면 기계는 고장 나고 사람은 멍이 든다. 지금 생각하면 북에서 ‘동무’들이해방 후 벌여놓은 일 가운데는 무리가 많았다. 무엇인가 잘못된데가 있었다. 그들은 조직을 이루고 있는 낱낱의 에고들이 저마다그 조직 자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허무의 ‘점‘들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사회의 무겁고 따분한 공기가 생긴다. - P74

태양은 하늘에 있고 잡초는 게으르게 숨 쉬며 나독고준은 포대경 속에 100미터의 길을 지켜보며 취생醉生해서는안 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그는 당황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물음은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된다는 요청을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무엇을… - P75

이북에 있는 과수원에서 가족들과 같이 사상이고 뭐고 아무도 다치지 말고 살 수만 있었다면 그는 그쪽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동무‘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아서 넘어온 것이지만, 부모덕에 공부를 하고, 물려받은 과목밭이나가꾸고 주재소 주임이 보여준 존경 비슷한 것 속에 살아온 그는 나이까지 들고 난 지금은 아주 약하디약한 생활자였다. 게다가 남한사회는 한국이 여태까지 겪지 못한 새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돈이면 그만인 사회, 적당한 겉치레와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전통도 없는 채 자본주의의 가솔린 냄새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속에서 그는 낙오자가 되었다. - P77

청년 시절에 흔히 있는 대로 독고준도 체계에의 집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계를 한 가지 원리로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소속체계를 잃은 에고가 자기 분열을 막기 위해서 환경과의 사이에 벌이는 본능의 싸움일 것이다. 여러 가지 구불구불한 잡담을 다 제하고 간단히 말한다면 그는 외로웠기 때문에 별하늘을 사랑하게되었고 뒤늦게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졌다는 말이 되겠지만, 간단한 일을 간단히 생각지 못하는 것이 그 나이의 병일진대 그런 호걸스런 충고는 독고준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 - P81

그와 마주 앉아서는 준은 그래도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자는 사람같이 보였다. 학은 친구의 그런 겉모양에 속고 있었다. 한번 홀로가 되면 독고준은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렸다. 애써도 추어올릴 수 없는 이 허물어진 마음. 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서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자는 이 몸가짐. 그러면서도 학의 말에 반발하고 싶고 그들이 만들고 있다는 모임에 퍼뜩 생각이 미치곤 한다. 나라는 놈은………… - P84

문제는 미래의 시간에 있어. 미래만이 진정한 시간이 아닌가. 과거는 시간이 아니야. 그건 셈이 끝난 계산서 같은 거야. 이제 어떻게도 할수 없는 일이야. 우리의 문제는 미래의 문제야. 우리가 인간답게사는 건 그것을 알아내야 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도 도를 지나치면 비겁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말이야, 내말은 내의견으론 우리 조상이 잘못했던 점에 대해서 너무 깊은 감정적인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는 거야." - P92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길만 허용되고 다른 길은 용납되지 않아. 요 먼저어느 야당의 국회의원이 남북통일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 않아? 그랬더니 어떻게됐어? 국시를 어겼다, 용공容共이다, 괴뢰들에게 동조한다고야단이더군. 앵무새처럼 한 가지 말만 하라. 이것이 정부의 요구야. 인생과 정치를 좀 다원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터부에 속해. - P94

개인끼리든 사회나 국가에서든유혹에 지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뉘우치고 근신해야 하고, 어려움에 이긴 사람은 상을 받아야지 않겠어? 그래야 정의가 실현되지. 해방 후에 우리는 정치적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때 사기를 당했어. 이승만 씨가 친일파들을 끌어들였을 때 비극은 시작된 게아냐? 한국이란 참 이상한 나라야. - P101

지금의 서울은촌놈의 서울이지, 서울 사람의 서울은 아니다. 서울뿐만 아니라어느 도시건 도시란 원래 그런 것이다. 새로운 힘과 허영을 가슴에 품은 지방 사람이 도시에 와서는 그들의 정력과 끈기로 그것을살찌게 하고 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학의 경우에는 그래도 유학을온 셈이지만 자기 손으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들에게는 서울은다란 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분주하게 속이고상대방을 넘어뜨리고 허세를 부리면서 화폐를 한 장이라도 더 긁어모을 생각에 바쁠 뿐 이웃을 즐기고자 동네를 치장하는 그런 겨를은 없다. 서양의 도시 발달을 보면 그들은 봉건 귀족들에게 맞서서 한 가지씩 권리를 주장해서, 끝내는 시민의 권리와 신분을만들어낸 것이지만, 서울은 이도저도 아닌 그저 오가잡탕의 추악한 도시였다. 돌아가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차를 타고 보니 그의 마음은 점점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 P113

나갈 길 없는 지평선,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집념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온건한사람들이지만 우리들은 속으로 미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도모른다. 우리는 울부짖지 않는다. 가끔 농담도 하고 잡담에도 끼어든다. 우리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다. 남들이 우리들을 수상쩍게 여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평범의 탈을 쓰고 사는고독한 망명자다. 그래서 우리들끼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우리는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거기다 공동의 낙인을 찍는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에 우리들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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