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밤늦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희미하다가 점점 커졌고, 그게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부모님의 싸움을 또 한차례 말리기 위해 안방으로 뛰어갔다.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11월 햇볕이 따스했던 것과 석류나무에 석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것이 유독 기억에남는다. 나는 점심시간에 거기에 앉았다. 같은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찍이 들렸고, 잠을 못 자서 귀가 물 들어간 것처럼 멍멍했다. 만약 현실이 하나의 부조 작품이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모두 양각이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을 돋보이게하는 음각처럼 느껴졌다. - P99
그러나 그 특권 의식보다도, 나는 홀든이 어린 시절에 집착하는 것이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린 시절이 가능하면 빨리 끝나기를 원했다. 홀든은 왜 성장하기 싫었을까? 열쇠로 신발에 고정시켜야 했던 옛날식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순수하고 조숙한 저 아이들은 누구였나? 대체 어떤 10대 소년이 호밀밭에서 노는 꼬마들이 혹시 절벽에서 떨어져 어른이 될까 봐안 떨어지게 붙잡아주는 상상을 한단 말인가? - P102
번스틴은 백인 순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 에바를 예로 든다. 금발의 곱슬머리와 파란 눈이라는 후광에 휩싸인 에바는 톰 아저씨의 눈에 고결하게 비치지만, 노예 소녀 톱시는 엄마 없는 짓궂고 삐딱한 아이로 보인다. 에바가 톱시를 포옹하며 애정을 표하자 비로소 톱시는 순수한 아이로 거듭난다. 어린 에바가 이상화된 아이라면, 톱시는 "문제아, 검은 피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스울 정도로 고통에 무감각한 상태"에 의해 규정되는 그야말로 궁극의 "꼬마 검둥이"(pickaninny)이다. - P107
번스틴에 따르면 인종적 순수란 단순히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아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상태"로서 "음, 나는 인종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데"와 같은 언급속에 엉켜 있으며, 여기서 ‘나‘는 보는 일을 가로막고 있다. 순수는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권리로 굳어진다. 순수는 성적인 것만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굳이 특정해서 "표시되지 않으며"(unmarked) "자유롭게본연의 너와 나가 될 수 있다"라는 신념에 기대 사회경제적위계 속에 놓인 자신의 지위를 외면하는 것이다. 이런 순수가초래한 아이러니한 결과는 백인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를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학자 찰스 밀스는 말한다. - P108
수치심은 나 자신을 1인칭과 3인칭으로 분리하는 능력을부여한다. 사르트르가 쓴 대로 "타자가 나를 보는 대로" 나를인식하는 능력이다. 다 자란 지금에야 나는 어렸던 내가 의도치않게 저지른 불복종에서 유머를 발견한다. 양반다리를 하고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에 열중하는 여섯 살짜리들에게교사가 책을 읽어주는데 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가 난데없이이야기 중간에 태연하게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간다. 이듬해, 그얌전하고 어린 아시아 소녀는 포르노 티셔츠를 입고 등교한다. - P111
걔들이 할머니의 손을 조금 지나치게세게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헬로"라고 하자, 아이들이 "헤로" 하고 응수했다. 그중 한 아이가 할머니 얼굴에다대고 엉터리 수화 동작을 흉내 냈다. 그러더니 갈색 머리카락을축 늘어뜨린 키 크고 마른 여자애가 슬그머니 할머니 뒤로 가서온 힘을 다해 할머니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할머니가 땅에넘어졌다. 애들이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 P115
쇼핑몰에 갔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내가 열세 살일 때였다. 백인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유리문을 열었다. 나는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줄 알고 남자가 마지못해 문을붙잡고 있는 동안 재빨리 그리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고함쳤다. "난 중국놈들한테는 문 안 열어줘!" 동생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남자가 왜 그렇게 못되게구는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 당해봐." 동생이울었다. - P116
2011년 새뮤얼 R. 서머스와 마이클 I. 노턴이 조사한바에 따르면, 인지된 반흑인 편견이 감소했다고 대답한 백인응답자들은 반백인 편견은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인종주의를제로섬 게임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관점은 너에 대한 적대감이줄어들면 나에 대한 적대감이 늘어난다는 제프 세션스법무장관의 말에 잘 압축되어 있다. - P119
백인성을 인종적 범주로 인식하지 못하는 백인평론가들과는 달리 나는 백인성이 보인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하얀 공간을 인지하는 내 습관이 다른 즐거움을전부 망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는 중이다. 나는 자명한 것, 또는자명해야 하는 것을 끝없이 지적하는 잔소리꾼이 되고 말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등장인물들의눈이 멀 때, 시야가 캄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을 뜬채로 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 나는 어디를가든 백색을 본다. 나는 그 백색의 간계를 감지한다. 심지어 내생각마저도 엑스선 찍을 때 쓰는 방사선 불투과성 조영제를주입한 것마냥 백색으로 얼룩졌다는 것을 안다. 그 얼룩은 나의삶을 남한테 끊임없이 사과하도록 만든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기대에 못 미치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과반대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내 삶을 백인성과 결부시켜 바라본다. - P121
‘내가 백인성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아시아계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백인우월주의 위계질서 속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따져봐야 하는데 여태그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꼼꼼히 따져보기는커녕, 일부아시아인은 인종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고 "문제되지" 않는다고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백인들이 하는 똑같은 소리 못지않게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종 정체성 때문에차별만 받은 것이 아니라 혜택도 누렸기 때문이다. 인종을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이 아시아인들이 바로 내 사촌이고, 내옛 남자친구이며, 브루클린에 안락하게 틀어박혀 맑고 포근한날 불현듯 나는 인종에 영향받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진해서 그문제를 생각할 뿐이라고 여기는 나 자신이다. 나 또한 오로지나와 내 직계 가족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전부 누르고 앞서가라는 이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신과 일치된생존 본능을 갖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을 옥죄는수치심은 묻어버린 채 말이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미국에서자란 아시아인은 모두 내가 묘사한 수치심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 기름진 불길을 느껴봤다. - P122
서투른 영어는 한때 부끄러움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듦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하는 작가들과-문학적 계보를 공유한다. 영어를 타자화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언어에 박힌 제국주의 권력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며, 영어를절개하여 그 어두운 역사가 비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 P136
가엾은 아시아 억양. 아시아 억양은 심하게 굴욕당하는억양이며, 돌려도 되는 최후의 억양에 속한다. 아시아 억양으로의사를 전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부끄럽지만 나도 때때로그 백인 여자처럼 행동한다. 중국 식당에 전화로 주문할 때종업원이 못 알아들으면, 참을성 없이 주문을 되풀이한다. 타임워너사에 전화할 때 인도 억양을 지닌 상담원과 연결되면, 인도 콜센터들이 직원을 거의 훈련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기때문에 미리부터 짜증이 솟는다. 온라인 주문배달 서비스업체 ‘심리스‘가 생긴 것도 미국인들이 귀찮게 이민자 억양을 알아들을필요가 없도록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든다. 바로 그래서 앞으로 자동화가 인도 콜센터를 대체할 것이다. 이미 영어에 의해 납작해진 각국 출신들의 억양을 기계가 더욱납작하게 눌러버릴 것이다. - P138
우리 중에 흠 없는 피해자는 찾기 어렵다. 그렇지만우리가 다 똑같은 처지였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렇기때문에 내가 그저 ‘너의 서투른 영어 곁에서 나의 서투른 영어에관해 쓰기만 할 수는 없다. 근처에서 말하고자 노력할 때는 우리사이의 간격도 직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일단 나 자신을 연루시키면, 그렇게 연루시키는 일을 도저히적정한 선에서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의 간격은계급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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