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메리카 정치의 당파주의는 더욱 심각해졌다. 실제로 여러 식민지들에서는 인지세법을 철회시킨 것이 오히려 현지 궈력 구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때때로 주요 관직이나 의회의 장악 세력이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어디에서나 어느 편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강요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제 각 지역의 정치에서 식민지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안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즉, 영국의 지배에 대한 적개심 말이다. - P276

식민지 의회의 눈으로 볼 때, 숙영법은 식민지에 세금을 매기려는 영국 의회의 또 다른 시도였다. 원칙과 재산의 문제가 또다시 불거졌고, 식민지 의회는 그 두 문제에서 결코 양보하지 않겠다고 결단했다.
뉴욕시에 병영을 짓는 예산으로 기존 자금에서 3200파운드를 지원했으나, 숙영법이 요구하는 음료, 소금, 식초 등의 공급은 거부했다. 의회는 이런 제한적인 지원을 하면서도 그것이 숙영법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뉴욕 식민지 의회는 1762년부터 이월된 예산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지원이 숙영법의 준수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 P284

어쩌다 보니 톤젠드는 정부가 아메리카에서 돈을 거두어들여야 한다고 장담을 했지만, 곧 세입을 늘여야 할 필요가 생겨버렸다. 왜냐하면 2월에 로킹엄 휘그들이 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파운드당4실링이던 토지세를 3실링으로 낮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삭감 때문에정부는 다른 곳에서 추가로 50만 파운드를 찾아내야 했다. - P292

아메리카 관세 위원회 설립법, 세입법, 정지법suspending Act은 식민지에 대한 영국 의회의 오래된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메리카인은 영국 의회에 예속된 존재이므로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톤젠드 법은 그 이상을 해냈다. 이 법은 영국 정부의
분노와 좌절을 표출한 것이었는데, 그 감정 상태는 반항하는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톤젠드 법의 내적 역사에도 근거는 있었다. 영국이 큰 빚을 지고 있으니, 식민지는 가벼운 세금을 납구함으로써 그 부담의 일부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입품에 대한 과세가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겨났다. - P295

과거에 발생한 대부분의 위기 상황과 비교할 때, 혁명은 불가피한 일처럼 보이고 심지어 자연스런 사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혁명은 자그마하게 시작돼 정치기구와 인민 사이의 대규모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동은 반란이 되고 반란은 전쟁이 된다. 그리고 혁명의 절정에서는 어떤 통치자 또는 계급이 제거되고 국가의 모습이 변모하면서 권력이 이동하거나 적어도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 현상은 실재와 공통점이 있다. 일반 대중은 옛 권위 기관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고, 대중 정서와 새로운 충성심의 성장,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실제 권력의 성장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기존의 권위는 자신에 대한 반란을 진압한 뒤에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공적인’ 혁명으로 가는 과정은 실패, 대중적 지지의 상실, 피로감, 줄어드는 믿음, 혼란 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 P301

회람 편지에는 아메리카에서 퍼지고 있던 사상이 담겨 있었다. 즉, 영국 의회가 제국내의 최고 입법기관이기는 하지만, 그 권위는 헌법이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은 기본적으로 모든 신민은 오로지 그들이 동의한 세금에 대해서만 납부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금 수입으로 영국 관리의 봉급을 지불하는 데에 반대하는 입장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항이었다. 헌법은 신민의 평등, 안전, 행복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세 위원회에 대해서는, 하급자와 직위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이 기관의 권위가 식민지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지적했다. - P314

대의에 대한 대중의 열광을 진작하기 위해 오티스와 애덤스는 언론을 이용해 군대 주둔을 계속 규탄했고, 올리버폭동의 기념일인 8월 15일에는 대포 발사, ‘아메리카의 자유의 노래‘를 포함한 음악, 대행진, 열네 번의 건배 그리고 ‘영광스러운 아흔둘’에 대한 건배로 끝나는 화려한 축하 행사를 펼쳤다. - P330

도시회의는 범죄 단체도 불법 단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왕의권위에 도전하는 운동의 외연을 넓혔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 중에는 영국군과 싸우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티스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애덤스는 좀 더 말을 많이 했지만 무력 사용을 요구하지는않았다. 쿠싱도 버나드와 허친슨을 식민지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무력 저항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보스턴은 매사추세츠가 아니었고, 주둔군이 정치적 자유를 위협하는 현상에 대한 증오, 긴장, 인식 등이 다른 중소 도시와 내륙의 농촌 마을들보다는 치열했다. - P334

힐즈버러의 어리석음, 그에 대한 매사추세츠 의회의 노골적인 경멸,
영국군의 보스턴 주둔, 리버티호 폭동과 세관 위원들의 강압적인 조치 등이 겹쳐져서, 오히려 회람 편지를 지지하고 톤젠드 법에 항의하는 각 의회의 선언문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사건과 환경 이상으로, 각식민지의 정치상황은 저항운동의 형태와 본질, 시기에 지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 P341

탄원서, 연설문, 항의서, 회람 편지 등을 보낸 공공기관들의 조치는표면적으로는 일반 대중의 열정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대중의 불만이 잠재되어 있었고, 그 감정은 곧분노로 변모될 터였다. 새로운 영국 정책에 대한 이름 없는 서민의 우려가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촉진제가 되었다. - P347

수입 거부 운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개인들과 일상적인 모임들도영국 제품을 소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의 모든 식민지 가정에서적어도 영국에서 수입해 온 차만큼은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다른 이들은 영국과 아메리카에서 유행하던 비단과 새틴 재질의 화려한 옷을 포기했다. 남녀를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사치품이 경원시됐다. 대학생들은 외국산 와인을 마시지 않았고, 문상객들은 외국에서만들어진 상복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생산된 수수한 상복을 입었다.
1765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입 거부 운동은 식민지의 자체적인제조업을 장려했다. - P357

광대한 지리, 집중되지 않은 상업, 세관의 인원 부족 등 여러 요소가결합해 무역 규정을 위반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규정이라는것도 아메리카인의 눈에는 그리 현명하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어느정도 규모로 탈세와 밀수가 이루어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토리파 역사가들과 세관 관리들은 밀무역의 규모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면에 휘그파 역사가들과 18세기 아메리카인은 규모를 축소하려고 했다. 당밀법과 이 법을 계승한 1764년의 설탕법을 계획적으로위반하는 행위는 관세가 갤런당 1페니로 인하되고 외국령 서인도제도뿐만 아니라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당밀에도 공정하게 부과되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다른 제품의 밀수는 여전히 성행했다. - P366

시민들은 과거에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오로지 민간 당국의 통제만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경계병과 초병이 병영 창고, 장교 숙소, 공공건물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자유로운 왕래를 방해했다. 시민은 본능적으로 보초병의 검문에 응답하지 않았고, 때때로 그런 불응 때문에 보초병들에게 체포됐으며, 저항하면 머스킷 소총의 개머리판이나 총검으로 위협을 당했다. 점령 기간이 꽤 길어졌어도 양측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계속 발생했다. 군대가 철수할 때까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불안한 대치였다. - P377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보스턴의 자유와 목숨을 파괴했다. 피해자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고,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를 정의하는 정치 이론을 냉정하게 검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 뒤 몇 년 동안 아메리카인은 영국의 정치체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이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식민지에서 널리 존경받은 윌리엄 피트는 영국 의회에 나가서 아메리카인은 "영국의 자식이지 사생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경험은많은 아메리카인으로 하여금 과연 피트의 말이 사실인지 의문을 품게만들었다. 보스턴 학살로 이어진 최근의 역사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영국의 서자일지 모르나, 그래도 아메리카의 적자라는 점이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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