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16
박훈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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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접근할 때 대중서를 통한 입문을 하고 이후 사건의 배경과 주변 환경을 확인하기 위해서 학술서를 읽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서 사무라이가 사화가 되어가는 과정과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어떻게 형성되고 확산되었는지, 나아가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어떻게 메이지 유신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문제 의식은 근대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한다. 근대가 동아시아가 도달해야 할 역사의 종착 단계로 상정해 놓는 것에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기준을 경계하는 것이다. 나도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기준과 잣대로 바라보는 것을 가능한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저자의 생각에 공감했다.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내용과 성격은 어떤 것인가.

- 유교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들이 군주와 함께 자신들을 천하공치의 담당자로 자부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발언한다. 이들을 공정히 등용하는 제도가 과거제이며, 이들이 정치발언을 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은 상서, 강학이다. 

- 군신 관계는 기본적으로 군신의합으로 신하는 군주에 맹목적인 충성이 아닌 의의 실현을 위해 군주를 적극 보좌 계도하고 견제한다. 

- 사대부들은 정치 주장을 펼 주요 수단으로 간언, 상서, 학교에서의 강학을 이용한다. 상서를 통한 정치 주장에는 학문적 실력이 중요하므로 공론의 반영이라는 자기 정당화를 통해 정치적 파괴력을 가졌다. 이 공론정치는 여론정치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상서는 그것을 반영했던 것이다.

- 사대부는 생득적 지위가 아니라 배워서 습득에 따라 주어지는 지위이니만큼 학문을 매개로 관계, 네트워크, 조직을 형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학적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복수의 정치세력(당파)이 지속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붕당정치다. 그들 간의 정치 투쟁이 당쟁이다. 

- 붕당정치는 보다 많은 수의 사회구성원을 정치에 참가시키고, 정치의제를 상호 견제와 경쟁 속에 공개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치 과정의 공공적 성격을 제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복수당파의 평화적 공존을 만들지 못한 탓에 이 경쟁은 과열되어 당쟁으로 발전했고 집권 후 폭력적 보복이라는 악습으로 이어졌다. 

-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치열한 권력투쟁, 대외위기 등을 만났을 때, 사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진다. 

-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이상은 군주친정이며 기형적 권력구조에 맞춰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회복하려는 권력투쟁에서 군주친정이 중요 명분이 되었다.

- 군주친정을 위해서 군주가 현군이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군주는 학문 연마가 강조된다. 


막말 유학을 배우고 학습의 장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갖게 된 일반 사무라이들은 정치문제에 대한 발언과 정치투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사무라이의 사화(士化)가 진행된 것이다.

이를 미토번, 에치젠번, 구마모토번, 사쓰마번 사례에 의거하여 막말 정치사를 검토하고 있다. 


1부는 사무라이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학적 네트워크'를 번교, 사숙, 학습회 등을 통해 살피고, 이것이 정치화되어 '학당'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는 일반 사무라이들이 토의와 회의, 상서 봉서라는 방식을 통해 정치활동에 뛰어드는 양상을 보여주고, 정치 감각이 확산되어 가는 와중에 그들 사이에 정치 투쟁이 일반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등장인 것이다.

3부는 군주가 친정을 함으로써 강한 신분제에 예속되어 있던 권력 구도를 상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다양한 신분의 명칭과 인물들이 등장하고, 한문을 비롯한 문어체 문장들로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입문서가 아니다. 하지만 일본 근세 이후의 역사적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배경적 지식을 전달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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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2-27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독특한 시각이네요. 솔직히 잘 공감이 안가는데 특히 사대부들의 정치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유교적 명분론이죠. 이게 극한까지 가는게 예송논쟁이고요.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그런 정도까지 갔을지도 의문이고, 3부의 군주의 친정에 대해서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사회를 군주의 친정이라고 할 수 있나 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책을 안 읽고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좀 무리가 있는 연결이 아닌가 싶어서요. ^^;;

거리의화가 2022-02-27 08:43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사무라이 사회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18세기 말 이후에 사무라이 관련 사료를 찾아보면(˝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 유학의 영향이 두드러진 것이었다면서 신분제 사회 속에서 수백년 간 전쟁이 없었던 배경 속에 유학이 파고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학교가 증가하면서 학적 네트워크가 생기고 학당 간에 갈등이 생기기는 했지만 조선의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학적 네트워크는 조선의 학파보다는 덜 배타적이면서 서로 은연 중에 스며드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죠. 학파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학적 네트워크라는 말을 쓴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도쿠가와 시대 중기 이후에 번주는 일반 정사에 잘 개입하지 않고 다른 다이묘들과 교제를 하거나 의례적인 활동이 주로 하는 일이었는데 18세기 말부터는 달라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치 참여를 원한 일반 사무라이들이 번주의 정치개입을 촉구했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무라이들에게 권력 확보 실현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 같습니다.
첨언하자면 일본의 유학에 대한 열망과 요구가 조선이나 명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분명 일본의 정치사회 및 사무라이와 조선, 명의 정치사회 및 사대부 사이에는 여전히 급 차이가 있었다고. 일본 사회는 막부 말기까지 어쨌든 막번체제였고 지배층도 사무라이로의 정체성을 유지했으니까요. 문을 학습한다고 해서 무를 경시한 것은 아닐겁니다. 무는 여전히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또 유학이 내면화한 것까지는 아니고 경세학의 용도로서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고. 어쨌든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신흥세력이었고 도전자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