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
철도, 선박부터 전보, 금융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중반부터 1차 대전이 일어나기까지 60년 동안은 전례없는 네트워크 형성의 시기였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1차 대전 중에 많은 네트워크가 해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수십년 동안 자기중심주의의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덮는 네트워크의 형성을 ‘세계화‘라고 부른다면(화려한 색깔의 모호한정의이긴 하지만) 1860-1914년은 세계화가 뚜렷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 - 대륙 사이의 인구이동과 식민제국의장——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 있다. - P1910
식민지 인도와 반(半)식민지 중국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나라는 자체적인 역량으로는 (민영이든 국영이든) 원양선단을 건설할 수 없었다. 이 방면에서 일본은 또 다시 아시아- 아프리카의 특수한 예외였다. 아무리 늦어도 1918년 이전에 일본의 군용과 민용 조선업은 다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은 상업해운과 해상군사력에서 세계의 선도국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민족 성공의 표지이자 동시에 성공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 P1916
교통의 역사에서 세계화로 나아가는 강한 흐름은 2차 대전 이후, 특히 비행기를 이용한 장거리 여행이 더 이상 정치인, 기업가, 부호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20세기 60년대부터 형성되었다. 이런 발전의 기술적 기초는 항공 여객운송에 적용된 분사식 추진력이었다. 1958년 보잉 707 모델이 취항하면서 우리는 제트여객기의 시대로 진입했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환상으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실이 되었다. - P1919
철도의 건설과 운행에는 강철기술, 기계제조, 채광, 통신, 지질, 교량건설, 터널건설, 기차역 설계, 공사현장 조직관리, 자금조달, 인사관리, 운행시간 조정 등 대량의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특히 철도사업이 아직 과학으로 자리 잡지 못한 초기에는 임시변통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했다. 기술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낸다 해도 토지를 징발하고 보상해야 하는 법률문제가 동시에 등장했다. 이 밖에도 철도는 항상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정치적 화제였다. - P1921
이제 개별 시장 상호 간의 반응은 빨라졌고 가격 수준은 근접했다. 주문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많은 업종이 대량의 재고를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은 소기업에게 특히 유리한 환경변화였다. - P1931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은네트워크 접근권을 세밀하게 규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을갖게 되었다. 이 매체가 처음으로 사용된 크리미아전쟁에서 영국과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군사지식이 별로 없는 민간정치가들이 함부로보내오는 모순된 내용의 전보더미에 파묻혔다. 전보는 공정한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계층질서를 만들어 냈고 고위 관료들만 그것에접근할 수 있었다. 국외에서의 협상은 당연히 수도의 본부로부터접 내려오는 지시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전권을 부여받은 노련한 외교관이 큰 틀의 외교를 연출하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P1932
노동력으로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유럽화된 새로운 세계경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이들은 상인으로서도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않고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더 힘든 일은 공업과 금융업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오직 일본만 이 분야에서성공했다. 일본의 공업은 아시아 시장에서 유럽/미국에 맞서 점차로경쟁력을 갖추었고 일본의 무역과 해운회사는 일본열도를 벗어나먼 곳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P1941
19세기의 국제 화폐체계는 처음으로 몇몇 국가가 협력하여1540년대 이후로 전 세계에서 유통되어오던 귀금속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와 기타) 방면에서 대외관계를 엄격하게 제한하던 국가 일본 그리고 특히 중국도 이런 화폐의 유통을 수용했고, (원인을 알지 못한 채) 화폐와 금속의 세계적 유통이 가져온통화팽창 또는 통화긴축의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951
19세기 70년대 초 이전에는 세계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이런 통화체계를 채택하고 있었다. 영국에 대응하는 라틴화폐동맹이란 통화체계가 얼마가지 않아요절하자 금·은복본위제는 사라지고 유럽 각 국가는 앞다퉈 금본위제를 실시했다. 독일은 1873년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해에, 노르웨이는 2년 뒤에, 프랑스와 기타 라틴화폐동맹 가입국은 80년대에금본위제를 실시했다. - P1955
금본위제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가 같은 정도로 경제 메커니즘의 철칙‘에 굴복한 자본과 노동의 손을 잡은 경제질서의 규칙이자 상징이었다. - P1960
본질적으로 자본수출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신이었다. 1820년무렵, 해외 직접투자는 아주 소액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장악했다. 그러나 1850년 이후로 필요한 조건들이 점진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차입국과 대출국 모두에서특수한 금융기구가 세워졌고, 신흥 중산층의 저축이 축적되었고, 해외투자 기회에 대한 인식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유동자산과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역사에 유례가 없는 혼합체가 사람들이 런던금융가라고 부르는 곳에 등장했다. - P1961
절대규모를 보면 지금은 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러나 지리적 분포는 넓어지지 않고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세계의 자본네트워크는 무역네트워크나(1950년 이후의) 항공운수 네트워크처럼 고르게 두터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는 상당히 높은 정도로, 아프리카는 거의 완전히 자본의 흐름과 단절되어 있다. 이에 반해 거대한 규모의 자본이1913년에는 세계 금융체계의 주변부였던 지역(아랍산유국, 중국)으로부터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의 중심도시로 유입되고 있다. 20세기는 국제금융의 탈세계화를 목격했다. 가난한 국가는 1차 대전 전과 비교해서 외국자본 도입 경로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면 정치적 식민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외국자본이 전혀 참여하지 않는 경제발전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P1967
1825년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새로운유형의 위기(국가채무위기)는 아무리 늦어도 19세기 70년대부터종의 지역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위기는 대부분 라틴아메리카국가 정부와 유럽 민간 채권자 사이의 충돌이었지만 정치적 또는 외교적 문제를 남기지 않고 해결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채권자는 돈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쌍방 정부가 담판해야만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융제국주의가 국제금융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 P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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