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언제 도약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시점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문제이다.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갑자기 시작되었고 어떤 국가의 공업화는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되었다. 어떤 경제는 돌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경제는 몇 차례나 도움닫기 과정이 필요했다. - P1745

19세기 중반이 되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공업화는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 교류와 국제협약(자유무역을 포함하여)은 전체 유럽시장의 통합을 촉진했다. 유럽대륙의 문화적 동질성이 과학기술의 교류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 P1746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선도 업종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새로운 상황이 출현했다. 경제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국가에서 생산방식의 전반적인 기계화가 실현되어 공업화 이전의 소규모 공방‘ 이사라졌다. 자영 소기업주를 대체하여 고용된 직업적 경영자가 사회와 문화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와 함께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한책임회사가 흥기하기 시작했고 민간기업의 관리가 관료화되면서 화이트칼라‘라는 직업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생산이 집중되고 카르텔이 형성되면서 전통적인 경쟁 메커니즘이 제약을 받게되었고, 다국적 콘체른이 등장했으며, 상표가 마케팅의 주도적인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이런 목적으로 각지의 협력자와 손잡고 만든 전지구적 판매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 P1748

아시아의 근대 초기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는 "왜 유럽인가?" 라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분석이 다 끝난 화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장점과 업적(로마법, 기독교, 인쇄술, 정확한 자연과학, 합리적인 경제관념, 경쟁적인 국제체제, ‘유럽인의 개인주의‘ 등)을 하나씩 열거한뒤 유럽 이외에는 이런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두리뭉실한 결론을 내려서는 설득력이 없다. 근대 초기의 유럽과 아시아는 상호 접근이 늘어갈수록 그들 사이의 질적·양적 차이는 좁혀졌고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세계를 성공자와 실패자로 나누는 이분법은 더욱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 P1750

에너지원은 19세기라는 음악의 주선율이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에너지원은 (주로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이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효능을 발휘하는 힘,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여러 가지 기능과 작용을 하는 힘이 되었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의 이상은 더는 근대 초기의 기계장치가 아니라 역동적인 에너지원과의 상호관계에 있었다. 그 밖의 과학 분야도 모두 이런 경로를 따라갔다. - P1755

19세기의 공업문명은 화석연료에 의존했고 에너지의 보다 효율적인 기술적 · 기계적 전환이 꾸준히 일어났다. 석탄을 연료로 하는증기기관의 사용은 그 자체의 나선형 발전과정을 열었다. - P1758

에너지가 풍부한 유럽은 비서방세계와 마주할 때 "에너지가 넘쳤다." 이 시대의 문화 영웅들은 무위도식하는 명상가, 고행승, 과묵한학자가 아니라 정력이 넘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vita activa) 실천가, 피로를 모르는 정복자, 두려움을 모르는 여행가, 지칠 줄 모르는 탐색자, 독재적이고 오만한 기업 경영자였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개인적인 패기와 활력을 통해 서방세계 힘의 본질을 보여줌으로써 찬탄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방의 현실적인 우위는 태생적인 속성처럼 비쳤고 나아가 인종적 우위를 보여주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 P1764

수출주도형 경제의 거시경제적 성공 여부는첫째, 생산이 노동집약적 가족기업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수출에서발생한 수익이 국내에 남아 사회 내부에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되는지, 둘째, 수출상품 생산의 주력 형태가 다량의 저임금노동으로 생산하고 소유권이 외국기업의 수중에 있는 플랜테이션 또는 광산이어서 대부분의 수익이 국외로 흘러나가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첫 번째 유형의 구조가 두 번째 유형의 구조보다 국민경제와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리했다. 두 번째 유형의 구조에서도 경제성장은 일어났지만 고립된 지역에 국한되어서 다른 경제 영역에 자극효과를 주지 못했다. 이 법칙의 중요한 예외는 남아프리카뿐이었다. - P1769

1912-20년, 중국 공업의 성장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88) 1920년 무렵, 중국은 취약하기는 하지만 발전 잠재력이 있는 공업화 경제의 기초를 갖추었다. 군벌의 혼전으로 인한 내정의 혼란,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할 강력한 정부의 부재, 일본의 제국주의정책은 중국 경제의 도약단계가 반세기나 늦춰진 주요 원인이었다.
1980년 이후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그 전의 중국 공업화 역사의특징은 제국 말기의 정부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한 지체된 발전과정이아니라 이미 시작되었다가 저지된 1920년대의 도약이었다. - P1773

‘낙후‘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어떤 시점에서는, 특히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은 분명히 인도나 중국의 비교적 발달한 지역보다 앞서 있지 않았다. 경제적 성취를 판정하는 잣대는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소수의 대형 성장 지역이었다.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민간 기업가의 결심의 결과로1910년 또는 1920년 무렵 몇몇 영역에서 대규모 공장생산이 등장했고, 이로부터 자기이익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공업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인도의 도시지역에서 ‘현대화’를 기치로 내건 공업화와 기타 발전과정이 나타났다.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더라면 인도 경제는 ‘좀더’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인가? - P1776

메이지정부는 지속적으로 국영경제를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초기 단계의 자극을 제공한 후 정부는 점차로 대다수 공업 분야에서 빠져나왔다. 이것은 정부의 예산부담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기업계의 선두주자들도 공업화를 전체 일본을 위한 애국사업으로 생각했다. 사업의 동기는 개인이익의 최대화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봉사였고 미국식의 놀라운 사치성 소비(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Veblen이 말한 과시성 소비)를 비난했다. 이런 국가관의 결과로 기업은 짧은 시간 안에 습득한 세계시장에서의 귀중한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사회로 전파했다. 관료와 자본가들은 다양한 공업구조를 구상하고 또 실현했다. 이로써 일본은 수입의존성을 최대한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은 국가의 안보를 고려한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메이지 과두체제는 물질적 발전의 약속과 실현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 어쨌든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질서를 파괴했다 을 개선하고 넓히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이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민간 기업인들도 충분했다. - P1780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공업화의빠른 속도를 지나치게 극적으로 서술해서는 안 되며 미국 공업화의장기 연속성을 주목해야 한다. 그 밖에도 미국의 공업화는 주로 자본주의 시장역량의 자유로운 발전이란 법칙을 따랐지만 그것이 성공요인의 전부는 아니었다. 1862-1913년 사이의 (중간에 두 명의 민주당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를 제외한) 공화당 집권기에 연방정부는 공업화를 정책적 사업으로서 추진하면서 전국 시장의 통합, 보호관세, 금본위 화폐제도 등 중요한 제도를 실시했다. 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공업화는 - 일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ㅡ 역사적으로 예외에속한다. 서방의 자유주의 공업화와 동방의 국가계획 공업화란 양대모형이 선명하게 대립한 상황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 P1781

1913년 무렵에 몇몇 국가에서는 이미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활동하는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했다. 공업화,구체적으로 말해 현지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발전한 기계화된 생산은 모든 사례가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발전과정이었다. 반면에 19세기의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역적 기업 활동을 전 지구적 범위의활동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한 활동이자 경제제도였다. - P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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