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연구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실상 독재 체제가 어떻게 지속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지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945년 이후 제국이 무너지면서 한국을 비롯해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예외 없이 미국이나 유럽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직능이나 계층을 중심으로 대표를 뽑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인구수가 기준이 되어 보통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 P141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북쪽에서 이들에게 소련군이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남한에서는 이들이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을 잃고 온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로 찍히면 그 어떤 자비도 없는 듯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 P150

자산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들을 감싸주고 있던 이승만을 지원하는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보험을 들어놓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이승만이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반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따라서 하지 사령관의 정치 고문 굿펠로 대령과 정치 고문단 버치 중위의 중재가 없었다면 자금 모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유일한 정부였던 미군정이 보장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 P172

미군정은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을 소개할 자료를 마련했다. 취재가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간에 정부로서 통치 지역에 대한 소개와 홍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먹고살기도 힘들고 전염병도 돌고 있던한국에 대해 어떻게 소개해야 했을까? 현실 그대로를 얘기하면 통치에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 될 수 있었고, 그렇다고 현실과 다른 내용을 소개하면이는 정보 제공에 실패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 P184

미군정하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올림픽 복권은 한국 사람들이 처음으로접해보는 것이었고, 그 절차를 무난하게 진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복권 사기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범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 P200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로 기억되는 알카포네였는가? 아니면 버치의 문서에 나오는 테러리스트였는가? 김두한은 3대 총선에서 자유당 소속으로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했다가 국회의장의 징계를 받았다. 진보당 준비위원회에 잠시참여했던 김두한은 제2공화국에서 집권 민주당의 친일 경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를 비판하면서국회에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김두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 P207

미군정이 작성했던 임시 헌장의초안은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헌장의 내용에 신탁통치 또는 후견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하더라도,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내용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권한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이에 대한 후속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 P227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 이라는 것이었다. - P243

김규식은 버치가 가장 많이 접촉했던 인물이었다. 2018년 4월 17일에 있었던 대한민국입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학술회의에서 만났던 김규식의 딸은 버치와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들 속에서도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버치가 한국에 온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 공작을 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의 중심에 김규식이 서 있었다. 그는 김규식을 새로 수립될 한국 정부의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 과연 이러한계획은 실현가능한 것이었을까? - P244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 속에서 미군정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있어서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이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김규식처럼 평화통일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는 1948년 이후 오늘까지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 - P264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보여주고 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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