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년 만에 엄마가 서울로 올라왔다. 근처 지하철 역에서 만난 엄마의 첫 마디는 ‘기다렸는데 왜 안 나왔냐?’였다. 머슥해진 내가 했던 대답은 ‘귀찮아서’였다. 마중 나가겠다는 약속을 내가 먼저 했는데, 막상 그 시간이 되자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방바닥에 누워 있다가 엄마 전화를 받고서야 옷을 챙겨 입었다. 함께 집으로 가던 길, 마흔 넘으면 자살해야겠다는 말을 툭하니 해버렸다. 옆에선 미친년소리가 들렸다.

3일 뒤 집으로 돌아가셨다. 서울에 다시는 안 온다는 말을 남기셨다. 그 것도 우시면서. 비올 듯 흐렸던 그날, 엄마는 전화 좀 해달라는 내 문자에 답해 주질 않았다. 못이기는 척 적당히 넘어가주면 보내는 자식 마음이나 가는 애미 마음이나 그나마 좀 낫지 않았을까. 고집스런 엄마의 등을 보면서 20년 뒤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저런 등을 가지겠구나 싶은 생각과 동시에 우울해졌다. 엄마가 가고 나서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겠다. 직장 좀 나가고 먹고 자다보니, 엄마가 가져온 김치는 반통쯤 없어졌고 손에는 <천개의 공감>이 들려 있었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욕망이 실은 타인에 대한 지극한 적개심과 살해 욕망의 뒷면이라는 점입니다.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무의식 깊은 곳에서 누군가에 대해 죽이고 싶을 만큼 무서운 분노를 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외부로 표출하지 못한 분노는 내면으로 돌려져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기 자신을 죽입니다. (p.263)

도대체 뭔가. 그놈의 자살이야기가 왜 엄마 앞에서 튀어 나왔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 이유를 알게 될까봐 무섭다. 사소한 오해였다면 다행이지만, 잔인한 추억이 숨겨져 있다면 그 다음엔 어쩌나. 그래도 별 수 있겠냐만은 억지로라도 떠올려 보자면 오랜 시간 축적 된 무관심과 좌절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무심한 엄마, 예민하지 못한 부모에게 숨겼던 분노는 나이를 먹어서도 많이 서운했던 거다. 부모님께서 그것까지 헤아려 주기엔 힘드셨을 거란 걸 안다. 부모님께서는 그 게 최선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내 새끼한테는 그러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그렇게 못 된다. 그렇지만 또 누웠다. 누워서 화를 냈다. 알면서도 누워 있는 것 까지 엄마를 닮아 있었다.

성장기에도 남편 분은 집에 들어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누워 지냈을 겁니다. 그것이 실은 내면에서 들끊는 분노와 불안의 감정들을 억누르는 아이다운 방식이었다는 것을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남편 분은 대외적으로 선량하고 온순하고 양보 잘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p.314) 

책 내용은 반쯤 알던 내용이었다. 애착의 중요성, 영유아기의 환상과 인식장애, 우울증과 미숙한 방어 기제가 상담형식으로 씌어 있었다. 우울할 때마다 심리학책을 펼쳐보는 통에 꽤 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자를 보니 내가 아는 수준은 교양의 정도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이 책을 왜 늦게 발견했는지 후회할 정도다.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됐다는 ‘자기’와 심리서적 400여 권으로 다져진 ‘다식’, 소설가의 섬세함과 공감력이 책을 덮어도 새어 나왔다. 김형경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라 그녀가 어떤 빛깔의 소설을 써왔는지는 모른다. 허나 치열하게 쓸거라는 짐작은 간다. 그녀를 뵐 기회가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 아주 차분한 대화를 하실 것 같다.

전공서적이든 교양서든 심리학 계열의 책을 보다보면 대부분의 결론 같다. 삶을 겸허하게 보게 된다. 그리고 내 머리에 남는 건 이거다. 나는 이미 태어남으로써 존엄한 존재이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 좀 더 사랑받고 싶은 나, 이 책을 덮고 말하겠다.“그때는 몰라서 힘들었을 뿐이야.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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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5-0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예전의 과외를 돌이켜볼 때 정말 어리석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왜 그랬을까 후회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해요.

어쩌면 그래서 경험만큼 큰 스승은 없는 것 같아요. ^^ 좋은 결론을 얻으셨군요!

모과양 2008-05-12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 경험만큼 큰 스승이 없다는 말, 맞는 것 같아요. ^^
아직도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이만 겪었으면 단단해지지 않았을 까 싶은데, 막상은 또 헤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