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일상이 사라졌다. 일시적 백수가 되었고, 운동도 갈 수 없고, 도서관도 못 간다. 내내 집에만 있게 된 덕분에 읽고, 보고, 요리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채운다. 시절과는 별개로 일상이 사라진 내 일상은 꽤나 괜찮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난 '가벼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끔찍히 싫어한다. 교보문고에 '전시'된 베스트셀러를 볼 때마다, 한숨 쉬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갈수록 얄팍한 책들이 쏟아지고, 얄팍함을 그럴듯한 마케팅으로 치장해 팔아치우는 현실이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그렇지만 에세이 신간 코너는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다.), 그래도 나는 독자니까. 책을 쓰고 만드는 사람들은 그래도 조금 더 좋은 책을 읽히겠다는 사명감은 너무 거창하고, 최소한의 직업 윤리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이런 무책임한 불평을 해댄다.
그런데 나는 tv나 영화는 철저히 가벼운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한 나의 푸념은 자기 모순이며, 내가 '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뭔가 고상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고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예술 영화를 간혹 찾아서 보는데, 그때마다 '즐기는' 경험이 아니라 '견디는' 경험이었던 걸 보면, 나는 시각의 영역에서는 좀 더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걸 원하는 사람인 것 같다. 넷플릭스 관계자가 넷플릭스 이용자들이 흔히 말하는 작품성 좋은 작품들을 보관함에 넣어 두지만 막상 시청하는 건 통속적인 로맨스물이나 드라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그것을 사업 전략에 활용한 후 수익이 증가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랑 다르지 않나 보다.
무슨 놈의 서론이 이렇게 길어. 본론은 요즘 보는 넷플릭스의 '연애 실험 : 블라인드 러브'.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남녀가 서로의 외모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지는지를 실험하는 예능 다큐이다. 결론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인데, 대개의 연애 버라이어티가 그러하듯 결론보다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다만, 한국의 (유사) 연애 버라이어티와는 다르게 이 프로그램은 찐이다! 대화를 통해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청혼을 하고, 인연이 되면(물론, 그때는 외모를 확인하고 실제 데이트를 한다. 놀라운 건 첫데이트가 신혼 여행이라는 점 ㅋㅋ) 실제 결혼으로 이어진다. 불과 45일 동안 일어나는 일인데, 실제 결혼한 커플도 있다! 누군가는 45일을 만나도 이 사람과 연애를 할지 말지도 결정 못 하기도 할 텐데, 얼굴도 안 본 사람과의 결혼을 (내가 보기엔) 망설임 없이 '쉽게' 결정한다.
물론, 누군가의 결혼 결심을 '쉽게'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결례다. 그런데,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한 남자 참가자 칼튼은 어떤 면에서 분명히 그랬던 것 같다.

프로포즈를 (승낙)한 후 걸어 나가는 커플의 모습.

바로 다음 만남에서 '퍼킹'과 '비치'를 내뱉으며 대판 싸우는 장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칼튼의 '솔직병' 때문이었다. 그 놈의 솔직, 솔직, 솔직... '솔직히' 누군가가 '솔직히' 말하겠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드는 나는 '솔직'이라는 말을 애초에 신뢰하지 않지만, 칼튼은 그 정도가 과하다. 칼튼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 따르면 그는 '과거'에 양성애자였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남성은 아이에 대한 애정을 덜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성애자가 된 것(결혼은 여성과 하겠다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뭐, 내가 겪어보지는 못한 감정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칼튼은 자신이 과거에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이 큰 컴플렉스였나 보다. 그 사실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떠났던 경험 때문에, 칼튼은 자신이 대화를 하며 푹 빠지게 된 여성인 다이아몬드에게 그 사실을 감춘다. 이 역시 이해는 간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컴플렉스(남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닐지언정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면 중요한 거니까)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해야 할지, 한다면 언제 해야할지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이니까. 이혼 경험이 있다면, 동거 경험이 있다면, 전과가 있다면, 어린 시절 끔찍한 경험을 했다면 등등.(꼭 이런 심각한 게 아니어도 SEX 경험이 없는데, 잘 때 식은땀을 흘리는데, 안면 비대칭이 있는데, 곱하기와 나누기를 잘 못하는데...) 쉽지 않은 문제다. 이해하기 힘든 칼튼의 행동은 그 다음부터다.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인 다이아몬드와의 여행 첫날 저녁부터 둘은 삐그덕대기 시작한다. 이유는 칼튼이 자신이 양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숨기는 걸 '스스로가' 못 견뎌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깨뜨리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과 몸짓으로 낭만적이어야 할 첫 데이트를 망친다. 그리고 그날 밤 고민한 끝에 다음날 다이아몬드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lika a past' 즉 '과거와 같은 것'을 고백해야 겠다며,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물론, 다이아몬드는 당황했고 그 길로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털어 놓은 게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그게 정말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라면, 굳이 말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태도가 더 비난받을 수도 있겠다만,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를 이야기해야 한단 말인가.) 문제는 당황한 다이아몬드에게 지속적으로 칼튼이 한 말이었다. '나는 솔직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채 청혼했던 자신의 괴로움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당신에게 약간 서운함이 들기도 한다.' 솔직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인 '솔직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말'에 대한 사례를 하나 더하게 된 느낌이다. 결국, 자기 마음 편하기 위해서 한 말이고, 자신이 스스로에게 정한 기준에 다다르기 위해서 타인을 괴롭힌 말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칼튼은 솔직한 자기 고백을 한 후 거기에 대한 상대의 솔직한 반응을 보다 더 차분하게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끝까지 자기의 솔직함만 중요했고, 그 솔직함이 받아들여지길 사실상 강요했다.
예전에 애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감추는 게 있잖아. 그런 비밀들을 다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는 알고 싶어?"
크게 공감했던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을 보여주고, 숨기고 싶은 부분을 가리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인 것 같아."
어쩌면, 내가 화장 전후의 차이가 큰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싶다.
덧) 쓰고 나서 찾아보니, 이런 책이 있다. 세상에 없는 책은 없다는 진리를 또 한번 실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