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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평점 :
문예 창작에서 상상력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질문의 대상을 박민규의 작품들로 한정시킨다면 그 비중이 대단히 클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데뷰작인 "지구영웅전설"로 시작해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거쳐 첫 단편집인 "카스테라"까지 그의 소설이 남긴 첫 느낌은 '독특하다, 새롭다, 심지어 기이하기까지하다' 였다. 코믹스의 만화 캐릭터를 등장시켜 미국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지구영웅전설") 1할2푼5리의 승률로 시즌을 펼친 프로야구팀 삼미슈퍼스타에 대한 이야기로 낙오자에 대한 따뜻한 위안을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체제를 통렬하게 비판하는("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그의 작품들이 그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의 무거움과는 달리 산뜻하면서도 경쾌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그의 창작기법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발랄한 문체와 보도 듣도 못한 기발한 표현이 여기에 더해지면서 소위 박민규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우주의 괴생명체까지 등장시키는 "카스테라"에 이르면 이를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역시 박민규답게 이번에는 탁구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핑퐁"으로 돌아왔다.(야구에 이어 탁구까지 그는 도구를 사용해 공을 때리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걸까.) "핑퐁"은 전작들보다 더한 형식의 파괴를 보여준다. 작가가 직접 그린 스케치를 삽입시키기도 하고, 마치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듯이 글자의 크기를 조절함으로써 대화의 느낌을 살라기도 하고, 일종의 액자라 볼 수 있는 단품들을 중간중간에 삽입시키는 실험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핼리 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삽입한 부분은 웃음을 자아낸다. '지하철 인생'을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굉장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읽고 난 후 생각해보면 아릿한 슬픔과 쓸쓸함을 안겨다준다. 내 경우에는 "카스테라"에 수록된 '야구르트 아줌마'가 떠올라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이름으로 삽입된 환상적 느낌의 몇몇 소품들은 박민규의 상상력의 방향과 성격을 암시하는 듯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것 같다.
소설의 출발설정은 '왕따 2명이 탁구를 치게 된다' 이다. 간단하지만 듣도 보도 생각지도 못한 설정이다. 우주가 꼭 '깜빡'한 것만 같은 2명의 왕따 중학생들이 우연히 탁구를 배우게 되고 마침내 인류의 운명을 걸고 인류 대표와 탁구 시합을 벌이게 된다. 결국 못과 모아이는 어이없는(!) 과정을 통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게 되고 세계를 언인스톨시키는 결정을 한다.
이 독특한 설정과 형식의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나 첫눈에 들어온 건 기존 세계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다. 전편을 통해 작가는 치수패로 상징되는 '다수인 척'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다수인 척' 살아가는 그들 때문에 '다수인 척'살아갈 수 없는 못과 모아이가 왕따의 피해자로 살아야한다는 인식이랄 수도 있겠다. 다소 뜬금없는 결론이기는 하지만 결국 못과 모아이가 세계를 언이스톨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기존세계에 대한 작가의 비판과 부정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못과 모아이와의 관계였다. 한 쎄트로 당하면서도 대화라곤 한마디 나누지 않았던 그들이 탁구를 치면서 유대를 형성하고 종반부로 갈수록 내적 신뢰를 가지게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탁구란 전적으로 갑과 을이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불가피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한 쎄트로 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들로(동시에 무한한 타자로) 머물던 못과 모아이는, 그래서 써브를 하고 리씨브를 받는다는 느낌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작가가 탁구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면서, 이 작품에서 탁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도 그 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못내 아쉬웠던 부분은 건너뛰는 듯한 결론이었다. 그렇게 성급하게 결론에 도달해야 했던 이유도, 그렇게 무책임하게 결론을 처리해야 했던 이유도 여전히 의문이다. 작품의 결론이야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조금 더 개연성있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3편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1권으로 박민규는 이제 어느정도 그 나름의 문학상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민규에 대한 대중의 시선도 이제 '듀스 포인트'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그 독특함과 참신함만으로도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냈지만 이제 '도대체 뭔가'라는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의 작품도(그가 한국 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엄중한 심판의 잣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계속 듀스포인트로 남게 될지 2점을 연이어 따내서 앞서나갈지는 작가의 차기작에 달려 있다. 내게는 여전히 소중한 작가, 박민규의 다음 작품을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1."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면서 "핑퐁"생각이 많이 났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탁구라는 소재가 등장하고, 건전지를 섭식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계와 소설계를 대표하는 두 젊은 예술가의 영감이 어디에서 통한 건지 궁금하다.
2."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다시 읽고 싶다는 욕망을 고백하는 건 작가에게 실례일까 아님 찬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