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의 소설집『작은마음동호회』속 단편은 이전에 만났던 수상작품이나 테마소설집에서 만난 윤이형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다르다는 건 윤이형의 소설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나 혼자의 착각일 수도 있다. 『작은마음동호회』에는 모두 11편의 이야기가 있다. 제법 긴 중편부터 아주 짧은 단편도 있다.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말한다면 ‘마음’과 ‘이해’라고 할까. 표제작 「작은마음동호회」가 그런 마음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심하고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천천히 펴지고 움직이는 과정을 읽노라면 언젠가 우리를 채웠던 그 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작은마음동호회」에서는 촛불집회 속 수많은 유모차와 엄마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아이를 키우고 육아에 전념하느라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결혼한 친구를 보면서 오해를 하는 친구. 기혼 여성과 비혼 여성의 겪는 저마다의 고충을 생각하고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소설 속 ‘작은마음동호회’란 모임은 현실 속에서 수많은 다른 모임의 모습은 아닐까. 고민하고 애쓰는 마음들 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섣불리 안다고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해받기를 원하고 알아주기를 바란다. 먼저 다가가는 일은 왜 이리 힘든 것일까. 「승혜와 미오」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커플 승혜와 미오의 마음도 그랬다. 함께 살면서 아이를 갖는 일에 대한 다른 입장, 자신의 입장을 강요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에서 미오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를 좋아하는 승혜도 점차 고기를 멀리한다. 연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과 그 취향에 따르는 건 같은 것일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꾸 마음을 숨기는 일은 결국 둘 사이의 균열을 만들 것이다. 승혜와 미오의 마음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족이나 친구라서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꾸만 커진다. 아마도 그게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 나는 자꾸만 속상해지고 승혜에게 미오에게 네 마음을 보여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다른 삶을 선택하는 이의 마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받아들인다는 건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저 인정하는 일. 도움을 원하면 도울 수 있다면 손을 잡아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지도 모른다. 「마흔셋」에서 화자인 재경의 여동생 재윤은 어느 날 남동생이 되었다. 한순간에 바뀐 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 하나씩 앞으로 새롭게 살아야 할 인생을 계획했다. 가족이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왔던 세 모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거기다 엄마는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딸에게 알린다. 가장 가까운 형제나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자신의 성체성을 고백한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 똑같은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다르다는 걸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력한다는 건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알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노력이 밑바탕이 되어야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자라는 게 아닐까. 하나의 문제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는 일과 알기 위해 공부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노력이다. 성폭력 피해자와 그들과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인「피클」은 결국엔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선우가 받은 퇴사한 후배로부터 온 메일의 내용은 성폭행 피해자인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후배는 화자가 행동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회사 내에서 소문의 내용은 달랐다.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건 소설이나 현실에서도 같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피클 단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속의 이것들이 우리죠. 혐오와 차별은 어디에나 있어서, 나 혼자 아무리 올곧게 살겠다고 마음먹어도 물들지 않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하죠. (「피클」)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고 외면할 수 있을까. 그건 어려울 것이다. 드러내지 못하고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들 가운데 나와 가까운 이가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 윤이형의 이 소설집에는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있다. 그리고 묻는다. 그 차가움과 날카로움의 일부가 나의 시선은 아닌지 말이다.

윤이형의 변화는 이전의 소설에 만났단 환상과 상상, SF 적 소재에서도 느껴진다. 나의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다. 「의심하는 용 - 하줄라프 1」와「용기사의 자격- 하줄라프1」에서는 용과 인간의 함께 살아가는 도시국가 하줄라프에서 이야기로 현실이 아닌 가자의 현실, 게임 속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인간과 용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한 고민은 ‘수아’란 이름의 로봇이 인간의 차별에 대해 맞서는 「수아」를 통해서도 깊어진다.

그동안 읽었던 윤이형의 소설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변화의 중심에는 여전한 인간에 대한 관찰이 있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인간에 대한 연민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항상 미래에 대한 상상도 놓지 않았다. 중력을 지배하는 세상, 미래로의 시간 여행을 상상하게 만든『큰 늑대 파랑』이나 2058년을 배경으로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한 남자의 이야기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단편집 『러브 레플리카』에서도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소설집에 대한 글이 아닌 『러브 레플리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뭐랄까, 좋아하는 소설을 좀 더 깊이 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러브 레플리카』는 다시 읽고 싶은 소설집의 목록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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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2019-10-0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자목련 2019-10-04 12:15   좋아요 0 | URL
^^*
투명한 하루 보내기실 바라요.
 
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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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세라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열하게 싸우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러브록은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때로는, 아주 가끔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477쪽)

제목은 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단편집의 경우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을 제목으로 택하기도 하고 책에 대한 호감을 불러올 만한 문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T.M 로건의 소설 『29초』는 그런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온다. 과연 29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29초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눈 깜빡할 정도로 금방 지나갈 시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대단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혼자 짐작했다.

 

작가에 대해서도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책 읽기 시작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그와 단둘이 있지 말 것. 그를 부추길 수 있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말 것.’ 소설의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떤 감이 왔다. 누군가를 조심할 것, 그 누군가에게 걸려들지 말 것. 그는 아마도 권력을 지녔을 것이고, 소설의 화자는 여성이 분명했다. 그랬다.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었다. 주인공 세라는 30대로 똑똑하고 멋진 여성으로 딸 그레이스와 아들 해리를 둔 엄마이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였다. 그러나 남편 닉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닉은 집을 나갔고 다른 연인이 있었다. 세라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같은 대학 상사이자 교수인 러브 록으로 세라와 같은 시간 강사의 인사권을 갖고 있었다.

러브록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세라와 같은 위치의 여성 강사를 희롱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협박을 강요하는 상사였다. 전형적인 나쁜 상사,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건 TV에 출연하는 유명한 스타였고 대학에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라에게도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전임강사를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라는 그럴 수 없었다. 러브록의 실체를 세상에 폭로하고 싶었다. 그와의 대화를 녹취하고 대학 인사과에 제출하고 공론화시키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러브록은 대학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그를 상대하려면 학교를 떠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제기랄, 욕이 절로 나왔다. 러브록이란 인물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왕따, 성희롱과 폭력에 대한 문제는 우리 주변에도 만연하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지만 현장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없기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서지현 검사가 방송에서 미투 이후의 삶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정말 놀랐다. 소설의 배경도 대학이 아니던가.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분노한다. 인격, 인성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나.

그런 러브록을 상대로 세라에게 어떤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한 계기로 여자아이를 구하고 아이의 아버지에게 황당한 제안을 받는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마치 세라의 지금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던 세라는 러브록의 이름을 택한다. 그의 말대로 러브록은 사라진 것일까. 어느 날 러브록은 실종되었다. 완벽하게 처리된 것일까. 나는 그러기를 바랐다. 범죄에 가담한 것이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소설이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러브록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거기다 세라가 자신의 납치 과정에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러브록의 악랄함은 더해지고 세라는 어쩔 줄 모르는 불안과 공포로 고통스럽다. 이렇게 끝내는 것일까. 러브록의 뜻대로 그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걸 아닐까. 끝을 향한 이야기에 조바심이 나는 건 나였다. 물론 소설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라는 것만 말하겠다.

 

통쾌한 결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힘들다. 소설에서는 시원한 한 방을 날렸지만 현실에서는 제대로 된 제도와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다는 게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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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9-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도 여성보다 남성이 더 힘을 가지고 그걸 쓰죠 러브록이 아주 나쁘게 나오는가 봅니다 그런 사람 말을 한번 들으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힘들더라도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도 아이를 기르고 살아야 하는 세라는 그렇게 하기 쉽지 않겠습니다 러브록 한사람만 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사람만 없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지도... 힘들다 해도 끝이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네요


희선

자목련 2019-10-04 12:16   좋아요 1 | URL
아직도 우리 사회 많은 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지 생각하니 답답했어요. 현실에서도 소설처럼 통쾌한 결말이길 바라는데, 과연 그럴까 싶어요. ㅠ.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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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개를 길렀다. 강아지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개였다. 친구처럼 지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개는 마당에서 달려와 내에 안겼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그런 개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그만큼 개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신탕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나는 먹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아는 고깃국(당시 닭고기, 돼지고기,소고기)이 아닌 국이 올라오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개를 먹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 개의 이름은 ‘존’이었고 당시 시골에서 쥐를 잡기 위해 놓은 약을 먹고 죽었다. 그 뒤로 개를 향한 애정은 멈췄다. 반려견으로 키우던 개가 죽고 다른 개를 입양하지 않는 사촌동생의 마음도 비슷한 건 아닐까.

 

김숨의 소설집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를 읽으면서 ‘존’이 자꾸 생각났다. 이 소설집은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한 기운이 가득하다. 잔혹한 사건이나 동물 학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쥐, 염소, 자라, 벌, 노루, 곤충(나비)를 소재로 쓴 소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악몽과 흉몽의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속 인물들은 현실 속에서 쥐를 잡으려고 애쓰고(「쥐의 발견」), 염소를 해부하려고 염소가 오기를 기다리며 감정을 억누르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만병통치약인 양 노루의 피를 먹기 위해 노루 사냥을 위해 (「피의 부름」) 떠난다. 그러나 고층 아파트에서 남편이 본 쥐를 찾을 수 없고 오고 있다는 염소는 오지 않고 노루 사냥의 길은 멀고 지루하기만 하다. 쥐 한 마리에 10만 원을 달라며 쥐를 잡겠다고 온 이들은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는 이제는 제발 쥐를 발견했으면 좋을 지경이다.

한때 저수지에 가득했던 자라로 자라 요리 식당을 했던 여자의 아들이 빠져 죽은 저수지에서 시신을 찾아 헤매는 「자라」, 벌들과 함께 생활하며 꿀을 얻는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 「벌」, 옆 동네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흠집 낸 열두 살 아들이 보았다는 나비를 찾아 함께 곤충채집에 나선 「곤충채집 체험학습」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분명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여자가 늘어놓는 다양한 자라 요리에 대한 설명은 보통의 그것인데 너무도 잔인하게 다가오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먹는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여겨진다. 아들이 운전하던 자동차 사고로 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척추를 다쳐 앉아 지내면서 벌통을 지켜보기만 하는 「벌」은 종종 방송에서 꽃을 따라 이동하는 양봉업자들의 일상과 비슷하면서도 혈육이 아닌 모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 평범하지 않는 아들에게서 진실을 듣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그린 것 같으면서도 어린 시절 방학숙제로 잡았던 수많은 곤충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이 소설집은 인간을 위해 실험용으로 해부대에 오르고 건강을 위해 사육당한 동물들을 위한 애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거북한 거리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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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눈동자에 건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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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는 두 가지 정도다. 책 소개나 주변 반응이 너무 좋아서 나도 읽어볼까 하는 경우와 책 읽기에 속도(읽고 있는 책이 아주 힘들 때)가 나지 않을 때 방향 전환이라고 할까. 완벽하게 맞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는다. 왜 그 작가의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을 없다. 그냥이라고 말할 뿐. 추리소설 작가로 내게 각인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가장 익숙한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과 단편 모두 나쁘지 않다. 이번에 읽은 『그대 눈동자에 건배』은 단편집으로 9개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9편 모두가 추리소설이라 할 수는 없고 일상의 미스터리라 부를만한 이야기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소설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역시 추리소설로「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와 「그대 눈동자에 건배」였다.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는 인기 미스터리 작가가 된 미네기시에게 10년 만에 연락한 옛 연인 치리코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사랑고백하기 좋은 밸런타인데이에 만나자니 미네기시는 은근히 기대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치리코의 치밀한 계획이었고 세상을 속인 미네기시의 숨겨진 비밀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치리코는 자신의 친구의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경찰이 되었고 그와 잠시 사귀었던 미네기시를 범인으로 확신했다. 자신의 죄를 감추고 버젓이 인기를 누리며 살아온 인간의 추악함과 친구를 위한 치리코의 마음이 대조를 이뤄 흥미로웠지만 씁쓸했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표제작인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경마장을 어슬렁거리는 우치무라가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나 단체 소개팅 자리에 나가게 된다. 상대는 모두 모델로 그 가운데 우치무라 바로 앞에 앉은 이는 모모카로 둘은 애니메이션이란 공통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계속 만남을 갖는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우치무라는 모모카가 마음을 열지 않고 애니메이션 이야기만 나누려 한다. 특이한 건 그녀가 항상 컬러 콘택트렌즈를 낀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오치무라에게 모모카는 자신이 애니메이션 속 미소녀 같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냐며 렌즈를 뺀 얼굴을 보여준다. 이 단편에게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건 모모카가 자신의 상처를 우치무라에게 들려주고 둘 사이에 애정이 깊어지는 것이었는데, 완전 허를 찌렸다는 기분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둘 사이의 관계는 말할 수 없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둘이 나눈 대화가 무척 의미심장했다는 건 알겠다.

“글쎄, 어째서일까. 아무튼 실제 인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어. 사람 얼굴은 현실 세계에서도 지겨울 만큼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사람 얼굴이 지겨워졌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나도 현실의 사람들과 사귀는 데 지쳐버려서 애니메이션에 자꾸 빠져드는지도 모르지” (134쪽)

일상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사람일 때가 많다. 그래서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 요즘은 인공지능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많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결혼생활과 육아를 경험하기 위한 미래의 가상 서비스를 다룬「렌털 베이비」나 외로운 소녀 미쿠가 학교길에 신사에서 만난 고양이 이나리와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 「사파이어의 기적」은 언젠가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할 것 같은 이야기다.「렌털 베이비」는 말 그대로 아이를 빌려주고 직접 양육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인형이지만 보채고 울고 열이 나고 사라지는 기능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겪어야 한다는 취지다. 「사파이어의 기적」에서도 인간과 고양이의 우정만 다룬 게 아니라 고양이 뇌 이식을 다뤘다. 사고를 당한 이나리의 뇌를 다른 고양이에게 이식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쿠가 그 고양이를 알아본다는 기이한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엔 항상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놓치는 가족 관계나 인간의 심리가 있는 듯하다. 아내가 죽고 딸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복잡한 마음을 다룬 「오늘 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 가업을 잇지 않고 배우가 되겠다고 미국으로 떠난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유언과 유산인 수정 염주를 통해 심경의 변화를 느끼는 「수정 염주」는 가족에게 나는 어떤 가족인가 돌아보게 한다. 추리소설의 대가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싶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몇 편은 나쁜 점수를 받기도 하는데 이 소설집의 단편은 모두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9편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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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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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운데 마음을 움직이는 꽃은 목련이다. (12쪽)

 

가을이 시작되었고 나는 봄꽃을 잊었다. 그랬던 내게 이 첫 문장은 아득한 시간을 선물하는 것만 같았다. 목련이 환하게 피었던 봄의 기억, 그 숱한 봄의 기억을 건네는 문장이다. 여기저기 꽃들이 핀다고 요란을 떨었던 마음, 그 봄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목련나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담겨있을 시간들. 김종관의 에세이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는 이처럼 가까운 곳에 있는 그 누군가와 그 무엇에 대한 생각과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책이다. 오랜 시간 한곳을 떠나지 않고 살면서 마주한 일상에 대한 보통의 기록은 그곳을 떠나고 나면 모든 것이 특별함으로 바뀌고 만다. 책 속에서 저자가 살아온 이문동의 골목들이 그렇듯 말이다. 나는 이문동의 골목을 알지 못하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곳의 길고양이나 어떤 분위기를 상상한다. 한 장의 사진으로, 하나의 문장으로 그 골목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짧은 메모,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일기와 같은 글, 영화에 대한 애정과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시간을 나도 지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가을이라는 계절 탓일 수도 있고 어느 시절 내가 몰두했던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져 만들어지는 어떤 결과가 있기도 하니까. 결핍의 상태에서만 주어지는 긍정의 힘이라 핑계를 댄다. 후회와 미련은 언제나 부질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그 감정에 갇히고 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의 고단함을 이겼던 힘은, 가지지 못한 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지지 못한 위로야말로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으로 둔감하곤 하니까. (64쪽)

여행지에서 만나는 표정과 특유의 설렘을 소란하지 않고 담담하게 적은 문장이 오히려 이방인의 시선과 감정을 꾹꾹 담은 것 같다. 집중하고 있지만 그것을 들킬 새라 얼굴의 표정을 숨기는 모습이랄까. 김종관의 사진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낀다. 물론 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조금은 어둡고 불투명한 사진을 오래 바라본다. 그 사진에 녹아든 어떤 감정을 상상하며, 그 공간에서 오고 갔을 말들의 깊이를 상상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에서 그의 영화가 탄생했을 거라는 나만의 추측까지. 그래서 그가 보내는 편지를 꼭 받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새긴다. 설사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라도 나는 그 편지의 수신인이 되고 싶다.

 

 

 

 

영화가 가끔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고 읽히기를,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는 것. 그러한 목적이 살아 있을 때 영화는 살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고단한 여정에 아랑곳없이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무관심 속에 서서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 (131쪽)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의 꿈속 한 장면,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을 들려주는 사랑에 대한 아릿한 고백, 지하철 1호선의 풍경, 옛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노점상의 기억, 사라졌거나 사라질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애틋하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시절, 단단하게 자리를 지킬 거라 믿었던 것들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사라지기에 그것들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이 쌓여 그가 만들 영화는 어떤 빛을 낼까. 조금은 우울하고 쓸쓸한 빛을 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빛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완벽한 빛이 될 것이다. 이 책이 그러하듯이.

 

완벽하게 좋은 순간, 그것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은 스러져가는 환영을 잃어버리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136쪽)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 삶을 살고 있지만 종종 그것을 잊는다. 작은 동네지만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자주 찾던 가게는 어느 순간 업종이 바뀌었다. 그래도 친구에게는 이곳은 내가 있는 곳이며 우리가 함께 보낸 추억이 가득한 곳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 나의 울퉁불퉁한 마음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 당신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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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9-20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천천히 사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한주 한달 한해 휙 가 버려요 뭐 하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늘 들고... 세상도 빨리 바뀌고 있겠지요 그것도 어쩌다 가끔 느끼기는 하는군요 날마다 생각하는 건 그대로인 듯도 한데, 그것도 조금씩 바뀌고 있겠습니다 며칠전에 어떤 말을 듣고 나중에 그렇게 바뀌면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아직 오지 않은 날인데...

명절이 갔군요 저는 다를 거 없었지만 편안하게 보내셨기를 바라고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19-09-24 10:0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어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떤 시간은 너무 천천히 흐르지요.
답글이 늦었어요. 일교차가 심하네요. 흐선 님,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