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세라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것이 상대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열하게 싸우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러브록은 그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때로는, 아주 가끔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477쪽)

제목은 책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단편집의 경우 전체를 아우르는 문장을 제목으로 택하기도 하고 책에 대한 호감을 불러올 만한 문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T.M 로건의 소설 『29초』는 그런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온다. 과연 29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29초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눈 깜빡할 정도로 금방 지나갈 시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뭔가 대단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혼자 짐작했다.

 

작가에 대해서도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책 읽기 시작했다. ‘규칙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그와 단둘이 있지 말 것. 그를 부추길 수 있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말 것.’ 소설의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떤 감이 왔다. 누군가를 조심할 것, 그 누군가에게 걸려들지 말 것. 그는 아마도 권력을 지녔을 것이고, 소설의 화자는 여성이 분명했다. 그랬다. 이 소설은 그런 내용이었다. 주인공 세라는 30대로 똑똑하고 멋진 여성으로 딸 그레이스와 아들 해리를 둔 엄마이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였다. 그러나 남편 닉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닉은 집을 나갔고 다른 연인이 있었다. 세라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은 같은 대학 상사이자 교수인 러브 록으로 세라와 같은 시간 강사의 인사권을 갖고 있었다.

러브록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세라와 같은 위치의 여성 강사를 희롱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협박을 강요하는 상사였다. 전형적인 나쁜 상사, 정말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건 TV에 출연하는 유명한 스타였고 대학에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라에게도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 전임강사를 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라는 그럴 수 없었다. 러브록의 실체를 세상에 폭로하고 싶었다. 그와의 대화를 녹취하고 대학 인사과에 제출하고 공론화시키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러브록은 대학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녔고 그를 상대하려면 학교를 떠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제기랄, 욕이 절로 나왔다. 러브록이란 인물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왕따, 성희롱과 폭력에 대한 문제는 우리 주변에도 만연하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지만 현장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없기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서지현 검사가 방송에서 미투 이후의 삶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정말 놀랐다. 소설의 배경도 대학이 아니던가.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분노한다. 인격, 인성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나.

그런 러브록을 상대로 세라에게 어떤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한 계기로 여자아이를 구하고 아이의 아버지에게 황당한 제안을 받는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 한 명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마치 세라의 지금 상황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고민하고 주저하던 세라는 러브록의 이름을 택한다. 그의 말대로 러브록은 사라진 것일까. 어느 날 러브록은 실종되었다. 완벽하게 처리된 것일까. 나는 그러기를 바랐다. 범죄에 가담한 것이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소설이니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러브록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거기다 세라가 자신의 납치 과정에 관여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러브록의 악랄함은 더해지고 세라는 어쩔 줄 모르는 불안과 공포로 고통스럽다. 이렇게 끝내는 것일까. 러브록의 뜻대로 그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걸 아닐까. 끝을 향한 이야기에 조바심이 나는 건 나였다. 물론 소설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는 정도라는 것만 말하겠다.

 

통쾌한 결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힘들다. 소설에서는 시원한 한 방을 날렸지만 현실에서는 제대로 된 제도와 철저한 대책이 필요하다.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다는 게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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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9-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도 여성보다 남성이 더 힘을 가지고 그걸 쓰죠 러브록이 아주 나쁘게 나오는가 봅니다 그런 사람 말을 한번 들으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힘들더라도 그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깥에서 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도 아이를 기르고 살아야 하는 세라는 그렇게 하기 쉽지 않겠습니다 러브록 한사람만 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사람만 없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지도... 힘들다 해도 끝이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네요


희선

자목련 2019-10-04 12:16   좋아요 1 | URL
아직도 우리 사회 많은 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지 생각하니 답답했어요. 현실에서도 소설처럼 통쾌한 결말이길 바라는데, 과연 그럴까 싶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