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동자에 건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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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는 두 가지 정도다. 책 소개나 주변 반응이 너무 좋아서 나도 읽어볼까 하는 경우와 책 읽기에 속도(읽고 있는 책이 아주 힘들 때)가 나지 않을 때 방향 전환이라고 할까. 완벽하게 맞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는다. 왜 그 작가의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을 없다. 그냥이라고 말할 뿐. 추리소설 작가로 내게 각인된 몇 안 되는 작가 중 가장 익숙한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과 단편 모두 나쁘지 않다. 이번에 읽은 『그대 눈동자에 건배』은 단편집으로 9개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9편 모두가 추리소설이라 할 수는 없고 일상의 미스터리라 부를만한 이야기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소설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역시 추리소설로「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와 「그대 눈동자에 건배」였다. 「10년 만의 밸런타인데이」는 인기 미스터리 작가가 된 미네기시에게 10년 만에 연락한 옛 연인 치리코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그것도 사랑고백하기 좋은 밸런타인데이에 만나자니 미네기시는 은근히 기대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치리코의 치밀한 계획이었고 세상을 속인 미네기시의 숨겨진 비밀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치리코는 자신의 친구의 죽음의 진실을 알기 위해 경찰이 되었고 그와 잠시 사귀었던 미네기시를 범인으로 확신했다. 자신의 죄를 감추고 버젓이 인기를 누리며 살아온 인간의 추악함과 친구를 위한 치리코의 마음이 대조를 이뤄 흥미로웠지만 씁쓸했다. 인간이 지닌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표제작인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경마장을 어슬렁거리는 우치무라가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나 단체 소개팅 자리에 나가게 된다. 상대는 모두 모델로 그 가운데 우치무라 바로 앞에 앉은 이는 모모카로 둘은 애니메이션이란 공통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계속 만남을 갖는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우치무라는 모모카가 마음을 열지 않고 애니메이션 이야기만 나누려 한다. 특이한 건 그녀가 항상 컬러 콘택트렌즈를 낀다는 점이다. 다가오는 오치무라에게 모모카는 자신이 애니메이션 속 미소녀 같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냐며 렌즈를 뺀 얼굴을 보여준다. 이 단편에게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건 모모카가 자신의 상처를 우치무라에게 들려주고 둘 사이에 애정이 깊어지는 것이었는데, 완전 허를 찌렸다는 기분이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둘 사이의 관계는 말할 수 없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둘이 나눈 대화가 무척 의미심장했다는 건 알겠다.

“글쎄, 어째서일까. 아무튼 실제 인간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제 그만,이라는 기분이 들어. 사람 얼굴은 현실 세계에서도 지겨울 만큼 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사람 얼굴이 지겨워졌구나? 하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나도 현실의 사람들과 사귀는 데 지쳐버려서 애니메이션에 자꾸 빠져드는지도 모르지” (134쪽)

일상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사람일 때가 많다. 그래서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 요즘은 인공지능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이도 많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결혼생활과 육아를 경험하기 위한 미래의 가상 서비스를 다룬「렌털 베이비」나 외로운 소녀 미쿠가 학교길에 신사에서 만난 고양이 이나리와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 「사파이어의 기적」은 언젠가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할 것 같은 이야기다.「렌털 베이비」는 말 그대로 아이를 빌려주고 직접 양육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인형이지만 보채고 울고 열이 나고 사라지는 기능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겪어야 한다는 취지다. 「사파이어의 기적」에서도 인간과 고양이의 우정만 다룬 게 아니라 고양이 뇌 이식을 다뤘다. 사고를 당한 이나리의 뇌를 다른 고양이에게 이식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쿠가 그 고양이를 알아본다는 기이한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엔 항상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놓치는 가족 관계나 인간의 심리가 있는 듯하다. 아내가 죽고 딸의 결혼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복잡한 마음을 다룬 「오늘 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 가업을 잇지 않고 배우가 되겠다고 미국으로 떠난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유언과 유산인 수정 염주를 통해 심경의 변화를 느끼는 「수정 염주」는 가족에게 나는 어떤 가족인가 돌아보게 한다. 추리소설의 대가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싶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몇 편은 나쁜 점수를 받기도 하는데 이 소설집의 단편은 모두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9편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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