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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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아무런 수고 없이 마주하는 건 행운이다. ‘추사체’로 잘 알려진 김정희에 대해 대단한 수고를 대신한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를 통해 김정희의 생과 그가 살아온 시대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김정희에 대한 방대한 기록과 사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유홍준에 대한 수고에 놀라는 마음이 앞서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더불어 기록한다는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출생부터 김정희의 일대기를 다루었고 그의 업적과 함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자료는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연구에 의한 것으로 청조 고증학과 경학의 업적을 후지쓰카 지카시가 논문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유홍준에게는 아마도 가장 고마운 사람이 아닐까.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니 내게는 한승원의 소설에서 초의와의 우정이 생각났다. 서로를 존중하며 교류하며 함께 성장하는 우정, 역시나 이 책에서도 김정희 곁에는 사람이 많았다. 스승, 선배, 제자,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생을 마주하면 그를 둘러싼 이들, 그와 이어진 이들의 생까지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유홍준의 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김정희가 박제가의 제자였고 그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 연경에 가서 그곳의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과 흥선대원군인 이하응과도 교류했다는 점은 다소 놀라웠다. 내게는 서예와 그림의 예(藝) 인으로만 알려졌던 김정희는 역사리지, 금석학, 불교학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진정한 전문인이었다.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나라, 송나라로 나룰 필요 없이, 심기(心氣)를 고르게 하고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 (107쪽)

 

 뛰어난 인물의 생에는 언제나 고초가 있기 마련일까. 김정희의 삶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끝내고 좀 편안한 생활을 하는 가 싶었는데 66세 노년의 나이에 북청으로 유배를 명 받았으니 말이다. 김정희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으니 그의 형제들에게도 고통의 시절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에게「세한도」가 탄생한 것으로 잘 알려진 제주도 유배에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접했다는 점이다. 모든 일상을 편지로 전하며 같이 생활하는 듯했던 김정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버지와 남편으로의 김정희가 아닌 학자 김정희를 살펴보면 그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것 같다. 지인들과 교류한 편지에서 책을 구해달라는 내용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그만큼 그림과 학문에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고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제자에게도 전했다. 당시의 진경산수와 문인화풍을 인정하면서도 소치에게는 청나라 화가가 원말 4대가의 그림을 방작한 그림을 모은 화첩을 주고 폭마다 열 번씩 그려보라고 했다니 한다. 어쩌면 그건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발전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지독하고 완벽한 성격은 지필묵에 대한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쓰고자 하는 글씨의 성격에 따라 붓을 골라 쓰는 섬세함 그 이상으로 예민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추사 곁에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이들이 함께였던 것이다.

 

 이 <세한도>에서 더욱 감동적인 면은 서화 자체의 순수한 조형미보다도 그 제작 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림과 글씨 모두에게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본질이다. <세한도>의 진가는 그 제작 경위와 내용, 그림에 붙은 글씨의 아름다움, 그리고 갈필과 건묵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에 있다. 즉 그림과 글씨와 문장이 고매한 문인의 높은 격조를 드러내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88~289쪽)

 

 서법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은 글씨,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괴이하나 본질을 보면 내면의 울림이 있는 글씨, 그것이 추사체이다. (412쪽) 

 

 추사 김정희를 안다는 건 비단 그 한 사람만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알고 그 시대의 문화, 역사, 외교, 풍습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수록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일도 즐겁다. 옛것의 아름다움과 그 존재의 위대함을 알아가는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 후대까지 이어져야 할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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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5-0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사 김정희도 엄청난 독서가였다죠! 서점에 디스플레이된 책 사고싶었는데 은근히 설레고 기대되는 책입니다

자목련 2018-05-09 17:31   좋아요 1 | URL
아마도 김정희는 세상의 모든 책과 지식을 습득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프레이야 2018-05-0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주 대정읍의 추사 유배지와 추사기념관의 기억이 납니다. 비오는 날이었어요.
다시 가고프네요. 이 책도 담아갑니다. 장바구니가 터질 듯하네요.
좋은 봄날 보내세요^^

자목련 2018-05-09 17:32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유배지와 기념관에 대해서도 책에서 만났어요.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수선화에 반했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프레이야 님도 환하고 반짝이는 봄날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8-05-0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에 보면 김정희가 글씨에 대한 이야길 하면서 글씨에도 독서사가 필수적이란 이야길 합니다
 
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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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성직자들은 걸핏하면 연극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연극인들이 기독교적인 시간관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연극들의 대단원도 최후의 심판과 흡사하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단절시키며 과거로부터 흘러온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돌이켜보게 한다. (262쪽)

 

 우리가 위대한 작가에게 반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아름다운 문장과 놀라운 상상력, 그리고 시대를 반영하는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순환하고 역사는 반복된다. 시대가 변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사랑하며 자신의 것을 지키려 한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을 것들. 그런 면에서 과거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문학에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는 일이 그러하니까.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첫 번째인 셰익스피어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잘 모른다. 욕심을 내 구매한 그의 작품이 몇 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도 않았거니와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린 연극도 관람한 적이 없다. 그저 잘 알려진 명성 그대로 작품 가운데 희극 정도만 기억할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모르는 독자이기에 이 책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여행하는 길에 동행하는 게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무대가 된 지역을 여행하는 여행서이기도 하다.

 

 책은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와 그가 활발하게 활동한 런던의 여정, 『햄릿』과 『끝이 다 좋으면 다 좋다』의 무대인 파리에서 중서부 유럽인 빈으로의 여정에 이어 『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인 아테네로 이어진다. 저자의 말대로 끌리는 작품과 지역을 먼저 골라 읽어도 무방하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일정을 고스란히 따라 읽었다. 내게는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가는 길, 그리고 그의 생가, 그의 아내 앤 해서웨이의 생가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다. 셰익스피어가 떠난 지 400년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고향으로 돌아와 작성한 유서가 134통이나 되었다는 것도 정말 놀라웠다. 죽음 후까지 계획한 철두철미한 셰익스피어라고 해야 할까.

 

 모든 작품에 대한 해설과 도착하는 지역에 대한 저자의 감상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다. 저자가 얼마나 셰익스피어를 사랑했고 사랑하는지 충분히 전해진다. 셰익스피어의 은유적 표현에 감춰진 다른 은밀한 부분을 통해 작품 속 인물의 갈등과 욕망을 곁들여 설명한다고나 할까. 작품마다 짤막하게 소개하는 대사를 통해 나는 연극의 한 장면을 상상하고 관객이 될 수 있다.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건 괴테가 자신의 소설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변신을 비교한 부분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인간관계의 심리적 그늘을 곤충의 이미지에 응축한 것이라면, 셰익스피어의 ‘변신’은 억압된 욕망을 동물적 이미지로 표출한 것이다. (173쪽)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위대한 거장을 한 권의 책으로 다 만나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착각이다. 겨우 이 책을 읽고 셰익스피어에 대해 뭐라 말을 꺼내기도 매우 부족하고 부끄럽다. 때문에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이미 훌륭한 독자로 셰익스피어를 잘 아는 이라면 아주 황홀한 여행서가 된다. 책에는 셰익스피어 사극의 특징과 그의 시 세계, 셰익스피어 문학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에 대한 글도 수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셰익스피어를 여행하는 이 행복한 여정이 끝나는 게 몹시 아쉬울 것이다.

 

 대중성이 풍부하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당대의 대중적 현실과 일상적 생활 감각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예술성을 담보하지 못한 대중성은 문학작품을 통속적 수준에 머물게 한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쪽도 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셰익스피어가 빚어낸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상호작용을 세계문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진폭이 크다. 그래서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 대중의 환호와 지금 비평가의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시공간이 된다! (프롤로그 중에서,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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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불지만 햇볕이 좋은 오후입니다.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고 있어요.
자목련님,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자목련 2018-05-04 17:33   좋아요 1 | URL
어른이지만 어린이날을 즐겁게 보내요 ㅎ
 
서로의 나라에서 - 젊은작가 앤솔러지 소설집
김유담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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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했지만 이별하지 않았고 이별하지 않았지만 이별의 순간을 향해 다가가는 게 삶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4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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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이 진 자리에 연두가 가득하다. 여리고 단단한 연두 물결이 눈을 맑게 밝히는 듯하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건 아닐 텐데,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만 같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공간에서 기지개를 폈을지도 모른다. 잠깐 일이 있어 떠난 그곳에서 이곳으로 온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했고 마음을 전했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그곳에서 이곳으로 마음이 전해진다는 건 아무렇지 않았던 하늘에 무지개가 뜨는 것 같은 일이다. 선생님을 뵐 수 없었지만 아쉬움도 달콤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산다. 당신이 사는 그곳의 도시 이름만 들어도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 피는 계절이 오고 있다는 게 신나고 즐겁다. 당신도 마찬가지 일 터.

 

 이번 주는 생일 주간이다. 그러니까 23일은 책의 날이었다. 책의 생일날에 축하 선물은 내가 받은 것이다. 착한 가격의 책 『서로의 나라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선물한 책은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읽고 있는 책은 책의 생일 주간에 맞게 황광수의 『셰익스피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클림트도 읽고 싶다. 잠시 주춤했던 읽고 싶은 책 목록이 늘어난다. 지인이 추천한 이갑수의 『편협의 완성』,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의 첫 시작인 편혜영의 『죽은 자로 하여금』, 곧 피어날 작약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유희경의 시집『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까지. 구매 목록으로 변경될지는 미지수다.


 

 

 

 

 

 

 

 

 

 

 얼마 남지 많은 4월의 날들을 손으로 꼽아본다. 4월에는 감정을 흔드는 일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확인 사살 같은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그리고 예상했던 일을 맞닥뜨리는 건 힘들다.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 연습하고 다짐했지만 말이다. 상상했던 것과 현실, 그 감정의 온도는 다르다.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4월, 내가 사랑하는 4월, 올해의 4월은 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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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라고 말하면 여름으로 변할 것 같은 날씨다. 날씨만 그런 게 아니라 입맛도 그렇다. 나는 벌써 냉면과 비빔면을 챙겨 먹고 있다. 하지만 커피는 아직 뜨겁게 마신다. 곧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겠지. 봄, 여름, 가울, 겨울 사계절이 있어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지 않으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대형마트에만 가면 과일, 채소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땅에서 바로 채취한 것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올봄에는 쑥개떡을 먹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바닥 반 정도의 쑥개떡을 먹은 게 전부다. 향긋한 쑥과 콩을 버무려 만든 촌스러운 모양새의 떡을 맘껏 먹지 못하고 여름을 맞을 것 같다. 항상 누군가가 내밀어 덥석 받기만 했던 것. 내 손으로 쑥을 뜯고 콩을 불려 반죽해서 먹은 기억은 없다.

 

 음식이라는 게 직접 손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서 먹어야 제맛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막상 요리를 하려면 겁부터 난다. 매일 먹는 밥과 김치, 찌개, 반찬 가운데 밥과 찌개 정도만 직접 하는 것이다. 혼자 먹을 때는 찌개를 끓이는 일도 하지 않는다. 저마다 바쁜 일상을 보내기에 가족 구성원 전부가 밥을 먹는 때도 주말 오후, 치킨이나 피자를 배달해서 먹는 야식이 전부다. 먹는다는 일이 정말 부담스러웠던 기억은 병원 식사다. 아주 정확한 시간에 맞춰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밥, 열심히 먹기를 바라는 간호하는 이의 눈빛. 가족이나 친구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건강에 좋으니 먹어야 한다고 무조건 권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정도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먹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에는 조금은 수선스러운 대화가 있고 함께 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이 있다. 음식과 요리를 테마로 한『파인 다이닝』에서도 그러하다.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에는 그것을 먹을 이를 생각하면 냄새가 기쁘고 소리도 즐겁다. 한 그릇의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정성을 들이는 일은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수녀가 된 ‘나’가 둘째 아이를 낳은 언니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서 들려주는 최은영의「선택」에는 비정규직 열차 승무원의 치열한 투쟁을 배경으로 한다. 비정규직 승무원의 파업이 시작되고 그 현장이 어땠는지,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땠는지, 언니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이야기. 곳곳의 파업과 시위 현장, 그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한다. 식탁에 모여 하루 일과를 공유하며 밥을 먹는 보통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은 섬의 카페를 배경으로 하루 동안 다양한 커피의 종류와 맛을 소개하며 커피를 주문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들려주는 이은선의「커피 다비드」는 커피를 부른다. 고단한 하루, 피곤을 덜어 줄 커피와 맞닿은 짧은 순간의 위로라고 할까. 직장에서의 업무로 인해 늦은 귀가를 하는 싱글맘의 아이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승혜와 연인 미오의 관계와 심리를 그려낸 윤이형의「승혜와 미오」에는 ‘밀푀유나베’란 음식이 등장한다. ‘밀푀유나베’를 만든 승혜는 엄마랑 같이 먹겠다는 아이와 함께 아이 엄마를 기다린다. 연인인 미오가 고기를 먹지 않기에 승혜도 자연스레 좋아하는 고기를 멀리한다.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말이다. 퇴근한 아이 엄마는 돌아가려는 승혜에게 같이 먹기를 제안하고 승혜는 주저하다 음식을 먹는다. 너무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승혜는 미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먹어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을 맛이다. 모든 음식이 상대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지 말고 물어봐야 한다. 미오에 대해 혼자 판단하고 속상해하며 거리를 느낀 승혜는 이제 미오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까.

 

 승혜는 국물을 한 숟갈 더 떠서 입에 넣었다. 이런 맛, 궁금했는데, 생각과는 달랐다. 심심하고, 슴슴하고, 대단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맛이었다. 그 아무렇지 않음 때문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그 별것 아님 때문에,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승혜와 미오」, 99쪽)

 

 같이 밥을 먹으려고 배고픔을 참으며 엄마를 기다리는 소설 속 어린아이에게서 저녁을 준비하고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올 이들을 기다리는 마음을 본다. 밥벌이를 위해 집을 나섰지만 제대로 된 밥은커녕 간편한 도시락이나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그것은 엄마의 마음일까. 갓 지은 밥에서만 취할 수 있는 냄새가 있듯 추억의 맛은 아무리 똑같이 재현해도 그 시절의 맛을 데려올 수 없다. 그 맛을 지울 수 없어 함께 먹었던 이들을 찾고 그리움에 빠져든다. 그래서 황석영의  산문『황석영의 밥도둑』에서 나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 이름도 생소한 음식이 등장하고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맛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듣는 이유다. 내가 맛있게 먹은 음식을 조카는 알지 못하고 권해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나의 맛을 조카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 역시 돌아가신 엄마가 맛있게 드시던 음식을 그때는 손에 대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지금은 먹을 수 없다거나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때의 맛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변했든지 세월이 변했든지 했을 터이기에. (83쪽)

 

 먹을거리가 충분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너무 비싼 음식은 자주 먹지 못한다. 채널을 돌리면 먹방을 마주하는 시대,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부턴가 나도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다. 비타민을 챙기기 시작했고 가을의 끝 무렵에는 겨울을 대비해 홍삼즙을 들인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처럼 친구나 가족과의 통화 끝에는 항상 밥은 잘 챙겨 먹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일까, 먹기 위해 사는 것일까. 가장 단순한 질문을 어렵게 생각하는 시대에 사는 건 아닐까. 한 그릇의 뜨거운 밥을 짓기 위한 첫 번째 과정, 모내기를 준비하는 눈에 가득한 물을 보면서 김훈의 이런 문장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봄에 새잎 돋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는 늘 마음이 아팠다. 나무들은 이파리에 엽록소가 박혀 있어서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햇빛과 물을 합쳐서 밥을 빚어낸다. 자신의 생명 속에서 스스로 밥을 빚어내는 나무는 얼마나 복 받은존재인가. 사람의 밥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굴러다닌다. 그래서 내 밥과 네 밥이 뒤엉켜 있다. 핸드폰이 필요한 것이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핸드폰을 한 개씩 차고 거리로 나아간다.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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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4-17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은 직접 자기손으로 만든 음식이라고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르네요. 리틀 포레스트에서 여주인공이 그래요.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나다는 요즘 여자들 우스개와는 달리요.

자목련 2018-04-17 18:39   좋아요 0 | URL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영화 속 요리를 해서 먹는 장면을 보면김태리처럼 직접 요리하고 싶어질 것 같아요. 저도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어요, ㅎ

서니데이 2018-04-1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날씨가 낮에 따뜻한 시간이 있긴 하지만, 바람이 차갑게 불어요.
그래도 비빔면은 맛있고, 가끔 덥다고 느껴지는 순간엔 아이스커피도 좋지만, 먹고나면 금방 추운 날씨예요.
자목련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4-19 16:48   좋아요 0 | URL
일교차가 심한 걸 보면 뒤늦은 꽃샘추위인가 싶어요. 눈에 닿은 연두가 예쁜 날들입니다. 서니데이 님도 신나는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