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의 야간열차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
다와다 요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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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한 것 투성이다. 구체적인 묘사나 설명으로 소설을 전부다 이해할 수 없다. 주인공은 계속 야간열차를 타고 낯선 도시로 떠난다. 무작정 야간열차를 타는 건 아니다. 무용수로 무대에 오르기 위해, 일을 위해 때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거다. 주인공은 야간열차를 타고 파리, 그라츠, 자브레오, 베오르라드, 베이징, 빈, 바젤, 암스테르담 등 유럽와 아시아를 여행한다. 굳이 이동 수단을 야간열차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밤에 펼쳐지는 아름답고 기이한 풍경, 기차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어떤 수상한 사건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와다 요코의『용의자의 야간열차』에 대한 이야기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역은 정착보다는 부유의 장소다.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목적지를 향해 기다리는 공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일회성일 뿐이다. 어쩌면 그런 매력 때문에 주인공은 야간열차를 타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낯선 행동을 마주하고 예기치 않게 어떤 일에 휘말리는 것이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오직 기차표와 여권뿐이다.

 

 “그래도 초초함은 없었다.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지, 목적지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고,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특히 여름방학에는 끝이 없이 차고 넘치는 액체 상태의 시간 속을 떠다니며 이유도 없이 다른 나라를 방황하면서도,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32~33쪽)

 

 나를 아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시간을 보낸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을 몰고 온다. 소설 속 주인공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즐기는 여유가 있었다고 할까. 새로운 공간과 시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은 무척 다채롭다. 주인공은 가만히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누군가는 사랑을 나누고 누군가는 밀수품을 챙기고 누군가는 낯선 이에게 말을 건다. 그 모든 것은 그곳이 야간열차라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누군가는 다음 역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났다 해도 서로를 기억할 확률은 낮다.

 

 당신은 벽이 끊긴 부분을 지나친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서 그 여자에게 길을 물어볼까 했지만, 망설임이 앞섰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우리가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느껴졌다. 그 망막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43쪽)

 

 다와다 요코의 소설은 처음이다. 악스트에서 만난 그녀의 인터뷰가 소설로 나를 이끌었다. 모호함이 주는 특별함이라고 해야 할까.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한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설명할 수 없다.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꿈속에는 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출발지에 남겨진 사람도,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버린 사람도 있어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보세요, 땅의 이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대 밑을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뺏아가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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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1-0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첨들어 보는 작가인데, 제목 때문에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조만간... 저 야간열차들이... 파리, 빈, 베이징을 거쳐 서울에도 도착할 수 있겠죠?

자목련 2019-01-07 15:48   좋아요 0 | URL
읽었을 때는 정말 수상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묘하게 자꾸 생각나는 소설이야. ㅎ
 
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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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강의 소설을 좋아한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에 가까운 목소리, 그의 소설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눈물을 머금었지만 흘러내리는 대신 눈 안쪽으로 숨기는 습관을 지닌 것 같은 문장에 마음이 기운다. 그러니 어쩌면 이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에 가까운 글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겨울의 어느 날 연인을 기다리는 벤치에서 잠깐 졸고 눈을 떴더니 눈사람이 된 한 여자의 이야기가 「작별」이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나는 그런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왜 한강이 이런 설정을 했을까, 그게 더 궁금했을 뿐이다. 그녀는 최근에 오랜 세월 근무한 직장에서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항의를 하는 대신 그 뒤로 한 달 동안 출근을 했다. 그 시간 그녀의 존재감은 제로였을 것이다.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잠시 일을 쉴 때면 그녀의 자리에서 내다보이는 플라타너스의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때로 그녀와 나무 중에 나무만 살아 있다고, 자신의 딱딱한 침묵을 주저 없이 앞질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 이전의 인턴 현수도 그랬을 것이다.

 

 연인 현수를 기다리는 시간, 눈사람이 된 그녀. 막상 내 앞에 연인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현수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녀를 맞이한다. 더 안아주고 싶지만 안아주지 못하고 더 오래 손을 잡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플 뿐이다. 같은 회사 인턴이었던 현수는 한 달 만에 퇴사를 했다. 하지만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아 월급을 받을 때까지 사물실에 나와서 사장의 방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현수는 새벽에 산책을 했고 최소한의 소비 만을 하면서 지냈다. 그것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현수와 그녀 사이를 흐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 이상의 감정,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에겐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아들이다. 이제 그녀는 이 둘과 헤어져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잠깐 졸고 일어났더니 눈사람이 된 것처럼 다시 잠깐 눈을 붙이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시간, 영원한 작별이 다가오고 있다는걸.

 

 눈사람으로 변한 엄마를 보고 아들은 놀랐지만 엄마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녹지 않을까 생각하고 냉동고에 들어가면 어떨까, 말한다. 아이다운 신선한 발상에 나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미 지난봄 유언장을 쓴 그녀는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건 아닐까. 연인과 아들, 그 둘과 이별해야 하는 그녀. 퇴사 후 어떻게 살까 적금과 통장의 잔고를 헤아려보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는 이상하게 두렵지 않다.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기계적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 고된 노동으로 충분히 지쳤고 점점 녹아드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그녀는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오빠와 남동생과 함께 회전목마를 타던 시절, 돌이 된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워서 맞이했던 여름의 새벽. 더 이상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지 않아도 괜찮고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가르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격벽 같은 것.’ (「작별」, 41쪽)

 

 유언장의 마지막 문장을 쓰며 느꼈던 그녀의 시간이 분명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그녀가 제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편안히 쉬기를 바라는 두 마음 사이를 오간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시간을 알기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의 고독과 슬픔을 알 것 같기에. 사물처럼, 정물처럼 표정 없이 살아왔을 그녀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눈사람. 소멸하는 눈사람을 붙잡을 냉동고는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걸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내게도 눈사람으로의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안녕이라 말할 수 있는 작별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대 녹지 않는 눈사람을 만든다.

 

 한강의 소설이 너무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 강화길의 「손」, 김혜진의 「동네 사람」, 정이현의 「언니」를 지나칠 수 없다. 이미 여러 소설에서 폭력에 대해 언급한 강화길은 이번 「손」에서도 폭력을 보여준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시골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통해 계획적이고 치밀한 폭력의 공포를 들려준다. 어쩌면 김혜진의 「동네 사람」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사는 동네로 유입된 낯선 이방인, 타인은 원주민과 어울릴 수 없다.「동네 사람」속 동성 커플인 ‘너’와 ‘나’는 특히 주목받는 대상이다. 무심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동네 곳곳에서 그녀들을 지켜본다.

 

 ‘너와 나에 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우리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는 생각. 기분 나쁜 추측과 짐작들이 너와 내 주변을 기웃거리고 고요한 일상을 넘겨다보고 결국엔 이 동네에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사람」, 123쪽)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의 디엔과 데런에게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이어 현재까지 레즈비언(담배를 피우는 여자, 혼자 사는 늙은 여자)을 향한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집요하지 섬뜩할 정도다. 왜 그녀들은 주목받는가? 나와 다른 삶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수라는 지위를 앞세워 이용만 당하고 모든 결과에서 제외된 조교의 일인 시위를 담담하게 그린 「언니」를 통해서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들 모두 한강의 「작별」속 그녀는 아닐까. 대단한 잘못을 한 적도 없고 묵묵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을 뿐이데. 그들이 몸을 펴고 누울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여기 내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공간을 지키려는 응원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작은 행위가 귀를 기울여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 목소리를 더하는 힘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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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3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이 2018년의 마지막 날이라 인사드리러 왔어요.
올해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인연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자목련 2018-12-31 15:56   좋아요 1 | URL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참 묘합니다.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오는데, 새해를 맞이하니까요.
언제나 다정한 이웃으로 계셔서 감사해요.
건강하고 복된 새해 맏으세요^^

뒷북소녀 2018-12-3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읽은 <작별>보다 더 멋진 리뷰였어요.<손>이랑 <동네 사람>도 좋아서, 다른 작품 찾아 읽었어요.
2018년 마무리 잘 하시구요, 언니 우리는 내년에 더 건강하고, 더 많은 책들로 만나요~^^

자목련 2018-12-31 15:55   좋아요 0 | URL
이렇게 멋진 댓글을 달아주다니!
연말에 선물을 받는 기분이야. 고마워. 강화길, 김혜진 점점 기대가 커지는 작가야. 특히 김혜진!!
건강한 새해 맞이하고 즐겁고 신나느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간 기억이 없다. 종교를 물으면 불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주변에 교회를 다니는 친구도 없었다.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 학창시절에는 막내 고모가 교회에 다니면 좋겠다고 말했다. 집을 떠나 자취를 하면서 나는 교회에 처음 나갔다. 믿음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나의 믿음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내가 자취를 하던 집에는 셋방을 사는 이들이 많았고 신기하게도 그 가운데 목사님 댁이 두 가정이나 있었다. 함께 자취를 하던 친구와 나는 각각 다른 교회에 다녔다. 당시를 떠올리면 웃음만 난다. 찬송을 잘 부르던 교회 오빠가 있었고 기도를 잘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냥 그들이 부러웠다. 성탄 축하 연극을 했고 새벽 송을 부르며 늦은 시각까지 그들과 어울렸다. 그 후로 다시 교회에 가고 예배를 드리기까지 많은 공백이 있었다. 올해,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보고 싶다. 선물 교환의 시간도 있었다. 작고 소소한 물건을 교환하고 카드를 전하던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던 나는 이제 없다. 성탄 예배를 드리고 특선 영화를 보는 정도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떠올린다. 어린 시절 동생들의 산타 할아버지가 되었던 큰언니.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많지 않은 용돈을 모아서 동생들의 선물을 준비했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그 시절이 몹시 그립다. 추억을 먹는 나이가 된 것일까. 

 사랑을 나누고 평화를 전하는 성탄절. 모두 건강하고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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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2-2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보니 저는 어렸을 때 아이들과 교회 다니기는 했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는군요 성탄절이라고 다를 것 없는 날이지만, 어제 라디오 방송에서 캐럴을 듣고 영화 이야기 들으니 조금 그 분위기가 나기도 하더군요 아이들은 성탄절 좋아하겠지요 산타할아버지가 올지도 모른다 생각하기도 할 테고... 자목련 님, 성탄절 편안하고 따스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18-12-26 16:20   좋아요 1 | URL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반갑고 즐겁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던 시절도 문득 떠오르네요. ㅎ 희선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연말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18-12-25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린시절 옆집 친구가 자꾸 교회 나가자고 꼬드기는 바람에 중학교때까지 열심히 다녔었던 것같아요.
지금은 신랑의 영향으로 절에 다니고 있네요??? 불교신자는 아닌데..
종교가 늘 뒤죽박죽이라^^
그래도 어린시절 교회에서 배웠던 찬송가 몇 구절들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늘 성탄절만 되면 흥얼거려 지더라구요.
그래서 이맘때면 나홀로 조용히 흥겹더군요.아마도 캐롤송에 속한 찬송가 덕분이지 싶어요.. 절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녔지만,그래도 성인이 되어도 캐롤송에 아련해지고 흥분되는 감동의 추억을 담아 주어 감사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막 들떠지진 않아도 그래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전해지는 캐롤송처럼 예쁜 크리스마스가 되길 기원합니다^^

자목련 2018-12-26 16:23   좋아요 1 | URL
저도 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를 교회에 초대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친구는 지금 성당에 다니고 있어요. 어른이 되고서는 어렸을 때만큼 캐롤을 따라 부르지 않는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님, 포근하고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모든 것을 제자리에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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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을 유지하는 건 어렵다.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알기에 아침을 맞이하며 감사함을 느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다양한 사건 사고를 경험하고 나서야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유도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 아닐까.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최정화의 소설집 『모든 것을 제자리에』를 읽으면서 산다는 건 불안을 껴안고 사는 것이며 동시에 불안을 떨쳐내려 안감힘을 다하는 것이란 걸 인식한다. 그래서 7개의 단편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불안의 감정을 발견한다. 무엇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지.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의 주홍글씨가 되기도 한다. 적절하지 않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인터뷰」의 화자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학자인 그는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를 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컸고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새 책 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아내와 장인은 과거 그 일을 언급한다. 아내와 장인이 숙소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그는 한 커플과 동석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기억하는 사건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에는 거짓과 진실이 공존한다. 사건을 왜곡하는 일이 그가 불안의 크기를 축소시키는 방법은 아닐까.

 

 그렇다면 불안의 ​시발점은 무엇일까. 화가 친구의 전시회에서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화자는 그 남자가 친구의 애인이라고 단정하는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를 보면 추측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화자는 남편의 옷장에서 푸른 코트를 발견한다. 화자는 남편이 친구와 불륜관계라 생각한다. 막연한 추측은 확신이 되고 집착으로 발전할 것이다. 아내와 다투고 밖으로 나간 남편을 찾아 거리고 나온 화자에게 보이는 건 온통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다.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남편을 찾을 수 없다. 대화가 끊어진 아내와 남편 사이에 불안이 스며든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소통의 부재로 찾아온 불안은 「전화」에서도 마주한다. 후배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아 지난 만남을 돌아보지만 딱히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화자는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그토록 전화를 하는 행동 이면에는 불안이 깔려있다.

 

 새로 이사 온 집을 방문하는 낯선 사람들 때문에 마치 자신이 누군가의 집을 빼앗을 것처럼 여겨지는 「잘못 찾아오다」​속 주인공은 처음엔 그들로 인해 불편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주인을 잃은 예술잡지와 상품권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 인양 사용한다. 조금 뻔뻔하다 할 수 있는 행동은 「인터뷰」속 거짓말처럼 불안을 위장하는 도구로 보인다. 가장 현실적으로 불안에 대응하는 태도일 수도 있다. 언제까지 불안에 끌려다닐 수는 없으니까.

 

 상황이 나빠지고 자신감이 떨어지면 불안은 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들어낸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의 화자는 현재 실직자다.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우연하게 사고를 당한 후 그는 자신이 나이에 비해 한참 늙어 보인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하고 그는 점차 노숙자처럼 변해간다. 그러니 그에게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였다.

 

 왜 어떤 일들은 구름이 모양을 바꾸는 것처럼 서서히 일어나지 않고 단 한순간에 완전히 빛깔을 바꾸어버리는 것일까. 따뜻한 기운을 품은 은은한 복숭앗빛 하늘이 왜 저토록 사나운 핏빛으로 변해버렸을까. 좀 전까지 잘 어울리던 한 쌍의 커플이 왜 이리 급작스럽게, 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끔찍한 악연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까. 왜 그런 일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갑자기 일어나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고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어떤 사람을 다시 벗어나지 못할 수렁으로 몰고 가는 걸까. (111쪽, 「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모든 것을 제자리에』란 제목은 소설 속 모든 인물이 바라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해 생긴 불안, 관계가 깨어질까 두렵고, 잘못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그런 불안을 이기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소설이었다. 내게 닥친 일은 아니지만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우리의 그것과 같았다.

 

 최정화는 불안을 포착하는 작가다. 불안을 생명이 있는 것처럼 다룬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전하고 싶었던 건 불안을 잘 알아야 달래고 잠재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불안과 대화하는 방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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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4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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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가 되지 않아도 스타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이다. 내 별이 저 우주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듯이, 내 열정도 깊은 속 어딘가에서 빛나고 있을 테다. (140쪽, 「스스로 반짝이는 별」중에서)

 

 한때는 어리석게도 짧은 글을 쓰기 쉬운 글이라 여겼다. 낙서나 메모가 아닌 주제가 있는 짧은 글의 위대함을 몰랐던 거다. 그래서 작가의 산문집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와 유머에 감탄하고 놀란다. 내게는 농촌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알려진 소설가 김종광의 『웃어라, 내 얼굴』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어떻게 이렇게 기발하게 쓰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20년 내공이라는 게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구나. 작가에게 글은 매일 먹는 밥처럼 확인할 수 없는 공기 같은 것이라는 걸 실감했다. 이 한 권의 책을 만든 산문이 1500개의 그것에서 추리고 추린 것이라니.

 

 이 책은 생활밀착형 에세이라 하겠다. 진실로 그러하다. 특히 1부 ‘가족에게 배우다’로 묶은 글에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가족을 발견하는 독자는 나뿐이 아닐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작가가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노고에 대해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쉽게 떨어진 단추에 대한 추억이나 일을 끝내고 구멍이 난 양말이나 찢어진 아이의 옷을 꿰매주던 어머니의 바늘을 이야기할 때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서로 다른 옷에서 떨어진 단추를 모아놓은 통, 체했을 때 소화제가 아닌 바늘로 손을 따주던 기억이 입체적으로 살아나 내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런가 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는 일로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에서 나는 작가의 아내처럼 은행 대출을 생각했다. 웃음이 나면서도 아, 그놈의 대출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하고 서글펐다.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그 시절을 반추하는 모습도 아련했다. 연필을 쥐고 글씨를 그리며 배우는 모습이나 나쁜 시력이 고스란히 유전되어 안경을 쓰고 힘들게 숙제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아이 덕분에 주말마다 밖으로 나와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즐겁다.

 

 2부 ​‘괴력난신과 더불어’에서는 신변잡기에 대한 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안에 경탄할 만한 사유가 담겼다.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사탕에 대한 글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사탕은 어린아이를 병원에 가게 만든다. 사탕은 청년을 사랑에 빠트린다. 사탕은 장년을 위로한다. 사탕은 늙은이의 친구가 된다.’ (「사탕」중에서) 사탕이라는 사물에 대해 한 번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 작은 사탕에 그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니. 나는 과연 사탕에 대해 뭐라고 쓸 수 있을까 궁리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3부 ‘무슨 날’​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날에 대한 글로 엮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는 투표를 실시하는 선거가 있는 날에는「벌금」이란 제목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 주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영어로 쓰인 간판, 상품에 대해 속상한 마음이 더욱 크게 와닿는 한글날에는 「우스운 날」이라는 제목으로 토로한다. 작가가 거론한 날들에 대해 읽으면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어떤 날은 그저 공휴일만 내게 다가왔고 어떤 날은 그런 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책마다 내 집착이 묻어 있다. 책 한 권을 꺼내면 그 책의 내용은 가뭇해도 그 책을 소유하게 되었을 당시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술 마시고 연애할 때는 하나도 아깝지 않던 돈이 왜 책 살 때는 그렇게도 아까웠던지 모르겠다. (211쪽, 「계륵」​중에서)

 

 소설가라면 책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4부 ‘읽고 쓰고 생각하고’​는 그런 글들이다. 이 땅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게 얼마나 고달픈지,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작가의 운명과 자신의 책이 좀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기를 바라는 솔직한 바람이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 바람이 이뤄졌다는 글을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책을 정리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나도 매번 고민하다. 읽지도 않은 책, 읽었으니까 더 소중한 책, 이러저러한 제목을 달고 내 곁에 머무는 책이 있는데 명색이 작가는 오죽할까.

 

 한 줄 한 줄 써가면서 내면의 응어리나, 자유의지를 끄집어낸다. 내면의 응어리를 분쇄하고, 자유의지를 마음껏 실현한다. 그러니까 글은 내면의 해우(解憂)인 셈이다.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칭찬을 못 받아도, 상을 못 타도, 아니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만 읽고 보아도, 즐거운 일이다. 누구를 위해서 아니라, 자신을 위해 쓴 것이고, 쓰는 자체가 즐거웠던 것이다. (290쪽, 「글쓰기로 스트레스를 푸는 세상」​중에서)

 

 나는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읽은 책에 대한 글, 혹은 짧은 메모 비슷한 생각을 쓰기도 한다. 어느 시절에는 나만의 문장을 갖겠다고 벼르기도 했다. 이런 에세이를 읽으니 더 많이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 작가의 글처럼 어떤 보상이 없더라도, 누군가 읽어주는 이가 없더라도, 쓴다는 게 중요하다. 일기처럼, 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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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자목련 2018-12-21 15:5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해요. 진정한 서재의 달인이신 서니데이 님이 축하해주시니 더욱 기쁘네요.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채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