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자격을 얻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557
이혜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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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의 첫 시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어떤 분위기. 그건 무엇일까. 아름답고도 몽환적인 글, 이혜미의 시를 더 많이 읽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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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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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분명한 목표가 생기면 힘들 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오직 목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표에 도달했을 때 삶이 달라질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게 된다. 누군가에게 목표는 취업, 결혼, 집장만이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성적이나 모아둔 돈의 금액이 된다. 민경민의 장편소설 『훌훌』의 주인공 열여덟 살 유리에게는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 입학이 목표였다. 막연하게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보통 청소년의 마음과는 다르게 확고했다.


유리에게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입양된 엄마가 자신을 버린 것이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할아버지에게 맡긴 후 떠나버렸다. 할아버지와 사는 일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공간에서 할 일만 하면 문제 될 게 없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할아버지는 2층에서 지냈고 유리는 1층을 사용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필요한 용돈도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둘 사이에 친밀감이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유리는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고 이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죽었고 엄마의 아들 연우가 오기 전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동생이면서 동생이 아닌 연우는 유리에게 돌봄의 존재였다. 할아버지는 연우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유리와 똑같이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자주 여행을 가고 아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유리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연우가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와 다투고 경찰이 찾아오고서는 달랐다.


연우에게는 가정폭력의 흔적이 있었고 엄마의 죽음에도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제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상태와 연우를 어떻게 할지, 엄마는 왜 자신을 입양하고 버렸는지 말이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렇듯 대학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했고 유리는 그 소리에 화를 냈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했다. 어떤 상처도, 어떤 부대낌도, 어떤 위태로운 기대나 상처가 되고 말 애정도 할아버지와 내게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집을 훌훌 떠나면 됐다.(중략)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연우가 들어왔다. 연우와도 거리를 둘 수 있을까. 거리를 두어야 할까. 연우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172쪽)


유리는 할아버지와 가족은커녕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 여겼다. 친구와 학교 선생님들 사이도 다르지 않았다. 입양아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만 하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니 진심이나 사정 같은 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연우는 달랐다. 연우도 자신처럼 성장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유리의 그런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걸 털고 훌훌 떠나고 싶은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은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암에 걸린 할아버지, 자꾸만 애틋한 연우를 향한 어떤 마음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때로 그럼 마음은 비밀이 되고 때로 상처가 된다.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유리의 마음을 달래주는 담임 선생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207쪽)


『훌훌』은 밝고 따뜻한 성장소설이다. 입양이라는 소재를 다루지만 입양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내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가 갖는 편견을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에서 유리를 둘러싼 친구(미희, 주봉, 세윤)와 어른인 할아버지와 담임 선생님은 있는 유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대한다. 그런 관계로 인해 유리는 조금씩 단단해진다. 아마도 연우에게 유리도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유리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부여받은 상처도 있을 것이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며 성장하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다 훌훌 털어버리는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유리는 ‘훌훌’ 털어버리고 ‘훌훌’ 가볍게 날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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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허무하게 느껴질 때 무엇을 해야 좋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이 몰려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 극단적이지만 삶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존재와 부재를 생각하면 모든 게 확실해진다. 존재의 이유 따위는 없다는 것. 나를 스스로 증명할 이유를 찾지 말고 그저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죽음과 직면한 이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그랬다. 때로 어처구니없는 경로로 찾아오는 죽음,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생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디 에센셜: 헤밍웨이』는 한 권으로 헤밍웨이의 단편과 장편에 이어 에세이까지 만날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그러니 누군가는 가장 익숙한 「노인과 바다」를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끌리는 제목의 단편을 먼저 선택할지도 모른다. 나는 에세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떠난 리옹 여행」 을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과 헤밍웨이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더욱 궁금했다. 가장 위대한 작가로 남은 두 작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스콧과 헤밍웨이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스콧은 충동적이고 헤밍웨이는 계획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감기에 걸린 스콧과 엄살이 심한 그를 돌보는 헤밍웨이. 두 사람이 리옹의 호텔에서 대립 비슷하게 의견을 조율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헤밍웨이가 스콧의 소설을 읽고 그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걸 말하는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작가와 글은 따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


그 책을 읽고 난 나는 스콧이 무슨 짓을 하든, 그가 어떻게 처신하든 그것은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이니 할 수 있는 것이니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도와주고 그의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그의 좋은 친구 중 하나가 되기로 했다. 그가 『위대한 개츠비』처럼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작품도 얼마든지 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383쪽)


그건 헤밍웨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온 그의 삶과 마찬가지로 소설에서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등장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는 삶을 마주하게 된다. 「노인과 바다」만 바도 그렇지 않은가. 망망대해에서 느끼는 고독감, 거대한 고기와의 사투, 예상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공포. 그 모든 게 담겨 있다. 김욱동 교수의 번역은 무척 섬세하다고 할까. 노인가 고기가 대치하는 장면이 하나의 생생한 수채화로 다가온다.






고기는 큼직한 꼬리만을 움직이며 무척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둥글게 맴돌면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고기를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잡아당기려고 애썼다. 한순간 고기는 약간 옆쪽으로 기우뚱했다. 그러더니 금방 다시 몸을 똑바로 하고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290쪽)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노인과 바다」에서는 희망에 대한 이런 문장이 가장 좋았다. 미풍이 다시 불어오기 시작했고, 배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고기의 앞쪽 부분만 보고 있으려니 희망이 조금 되살아났다.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305쪽)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바람처럼 희망도 그러하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 지금의 시대에 필요한 소설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더한다. 그러니까 헤밍웨이는 소설에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죽음을 말하는 듯하지만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헤밍웨이의 소설은 삶과 죽음의 균형 잡힌 사유를 던진다고 할까. 그의 소설이 많은 시간 사랑받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난산인 인디언 여자의 출산을 돕는 아주 짧은 단편 「인디언 부락」에서는 신비로운 탄생과 함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죽음을 대비시킨다.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아이에게 삶은 어떻게 다가올까. 아이가 알지 못하는 삶의 비밀은 무엇일까.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고통과 허무를 마주할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을 곁에 둔, 아닌 죽음을 경험하는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도 죽음 앞에서 아무런 존재도 아닌 인간을 만난다. 극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부재를 선택하는 남자.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 죽음을 경험하며 죽음과 하나가 되는 과정,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을 실감 나게 묘사한다. 마치 그 모든 걸 경험한 사람처럼.


그것은 여전히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제는 그것에게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말을 못 하는 것을 알자 죽음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이제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물리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그에게로 바짝 조이며 다가와 몸무게로 그 가슴을 짓눌렀다. (182쪽)


어둡고 무거운 소설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처럼 쉬지 않다. 현실이 소설처럼 무겁다면 더욱. 어쩌면 소설을 읽는 일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에 익숙해지려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소설 밖으로 나올 때 현실도 다르지 않다는 게 위안이 될 수 없겠지만 미약한 희망의 바람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버릴 수는 없다. 그 바람이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 도무지 알 수 없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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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3-16 14: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지지했고 그의 작품도 좋아했어요. 그러다보니 사생활적인 면에서 젤다 피츠제럴드에겐 가혹한 평가를 했지요. 이런 책, 종합선물세트처럼 ㅎㅎ 관심갑니다. 자목련 님 오늘 유난히 봄햇살이 따숩네요. 누리시길요.

자목련 2022-03-18 14:5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진짜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근사한 선물이에요.
오늘은 무척 춥습니다. 따뜻한 시간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2-03-16 1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는 읽을때마다 좋더라구요 ㅋ 이 책도 사보고 싶은데 중복되는거 같아 망설여지네요~! 전 헤밍웨이 작품중에 <무기여 잘있거라>가 가장 좋더라구요 ^^

자목련 2022-03-18 14:47   좋아요 1 | URL
이런 책은 헤밍웨이의 작품을 많이 읽은 분보다는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해요.
새파랑 님, 좋은 시간 보내세요^^

캐모마일 2022-03-16 19: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를 소장하고 있어서 고민했는데, 다른 작품들도 읽을 만하네요. 스콧 피츠제럴드와의 기행문이나 다른 단편들도 흥미롭습니다.

자목련 2022-03-18 14:39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다른 단편과 에세이가 있어 좋았어요.
케모마일 님,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3-16 2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늘색이 좋아서 구입한 책! ㅎㅎ

자목련 2022-03-18 14:38   좋아요 1 | URL
맞아요, 반할 수 밖에 없는 민트!!

희선 2022-03-16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 소설은 예전에 《노인과 바다》밖에 못 봤군요 다른 소설도 많은데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네요 소설을 만나는 게 괴로운 현실에 익숙해지려는 걸지도 모른다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밝은 이야기도 있지만 어두운 이야기도 많죠


희선

자목련 2022-03-18 14:38   좋아요 2 | URL
저도 대표작을 시작으로 단편을 조금 더 읽었는데 이 책으로 에세이도 만나서 좋았습니다. 요즘은 현실과 소설이 크게 차이가 없는 듯해요. 다시 추워지고 있어요. 희선 님 건강하고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2-04-0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2-04-12 08:5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새파랑 2022-04-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 너무 좋죠 ^^ 좋은 작품으로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4-12 08:56   좋아요 1 | URL
제가 알지 못했던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었어요.
감사드리며, 새파랑 님의 당선 축하드려요.
맑은 하루 보내세요^^
 
웨하스를 먹는 시간 - 제9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동시집 83
조정인 지음, 전미화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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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는 동생의 꼬맹이를 위한 선물. 그러니 정작 나는 동시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생이 전하길 아이가 무척 좋아했다니 괜히 나까지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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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의 영역 새소설 10
이수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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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70쪽)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핑계를 찾으려 한다. 그 일의 원인이 내가 아닌 주변 환경이나 인물 때문이라고. 나비효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친다. 알고 있다. 모든 일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선택과 결정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을 피하려고 누군가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니까.


제4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작 『시커의 영역』 은 타로 점을 보는 엄마 ‘이연’과 딸 ‘이단’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 뽑은 타로 카드에 답을 해주는 엄마. 사람들은 이연을 ‘마녀’라 부르고 그녀 역시 마녀임을 인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역사나 문학의 세계에서 그동안 마녀는 어땠는가. 어둡고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많았다. 마녀는 그녀 마녀의 삶을 사는 것뿐이다. 소설에서 이단이 이연을 찾아온 친구 마녀의 말처럼. 나쁜 마녀이거나 악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쁜 마녀에요?”

“세상에 나쁜 마녀는 없단다, 얘야.”

“그럼 어떤 마녀에요?”

“마녀는, 마녀의 삶을 사는 사람이지.” (93쪽)


부모를 따라 미국에 간 이연은 사고로 부모를 잃고 마녀였던 ‘키르케’를 만나 자연스럽게 마녀의 삶을 살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단과 함께 살아간다. 열두 살 이단은 그런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생물학적 아버지 ‘에이단’을 만나 단짝 로운과 함께 영어를 배운다. 에이단은 불운의 기운을 믿고 사는 사람이었는데 이단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이단와 이단,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이 설령 불운일지라도 이단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에이단은 뉴욕에서 사고를 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 과정에서 이연은 마녀의 의식을 행하고 이단은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이연과 점점 거리를 두며 이단은 뉴욕의 대학에 입학하면서도 독립한다. 뉴욕에서 이단은 류이를 만나 연인이 되고 아버지 에이단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낸다. 그리고 류이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듣고 시커의 영역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선택하는 이, 에이단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이수안의 소설은 마녀라는 인물 설정만으로도 독특한 분위기로 호기심을 유발한다. 마녀, 타로카드, 마법, 운명은 뭔가 신비롭고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인다. 이 년의 양어머니 키르케를 시작으로 이어온 마녀의 삶, 이단이 마녀의 삶을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소설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마녀의 연대는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달빛 아래서 의식을 행하는 모습마저도 성스럽다.


엄마는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 안에 마법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은 시커의 영역이라고 했다. 주술사든, 마법사든, 타로리더든 혹은 마녀라 할지라도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무작위로 뽑아낸 카드가 현실 세계를 작동시킨다는 믿음은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그래도 나는 가끔 타로점을 본다. 시커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 (247쪽)


‘시커’(seeker)는 타로점을 보러 온 사람을 뜻하지만 무엇을 찾고 갈구하는 사람이다.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 시커일까. 그건 오롯이 시커만이 결정할 수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향해 나가갈지, 무엇을 간직할지. 혼란스러운 사춘기와 에이단을 잃은 슬픔으로 방황하던 이단은 조금씩 그것을 느끼고 알아간다.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는 일, 그렇게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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