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검사들 - 수사도 구속도 기소도 제멋대로인 검찰의 실체를 추적하다
최정규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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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와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시청 중이다. 각각의 드라마에서 변호사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고 검사는 범인을 잡은 역할을 한다. 변호사와 검사의 좋은 점만 부각시켰을 수도 있지만 현실이 아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정의 구현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유쾌하다. 법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살면서 고소, 고발은 하지도 당하지도 않고 사는 게 일반적인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법으로 해결해야 하고 법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생긴다. 


드라마 때문인지 검사는 날카로운 칼 같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 칼이 정의를 위해 쓰인다고 여겼다. 하지만 뉴스나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검사의 모습은 무소 권력 그 자체였다. 변호사 겸 활동가로 사회적 약자의 기본권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최정규의 『얼굴 없는 검사들』 을 읽으면서 검사라는 직업과 그들만의 세계가 어떻게 단합되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사건이나 일부 검사의 일이기를 바라면서도 드라마와 달리 불편했고 화가 났다.


검찰제도의 시작이 인권보호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잊고 있었다. 죄가 확정되기 전까지 피의자를 보호해야 할 당연한 의무를 저버리고 검사라는 지위를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는 태도. 재판이 검사와 변호사의 대결이나 싸움이 아니니 검사에게는 승패가 없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는가.


검사의 객관 의무는 지키면 좋고, 안 지키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기는 검사가 유능한 검사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그런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인 진짜 검사가 아니다. (49쪽)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검사를 만나려는 이들에게 검사는 닿을 수 없는 존재라니. 여전히 법은 멀리 있다고 여기게 된다. 서면이 아닌 ‘구술 고소’제도가 법으로 규정되었어도 불구하고 검찰은 소극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게 현실이라고 한다. 국민의 신뢰를 재고하기 위해 검찰 스스로 도입한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도 재벌이나 권력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고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수사기록의 확보에 대한 어려움도 마찬가지다. 법으로는 정보공개 청구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청구를 취하하고 열람등사 신청을 하라고 하는데 이게 진행 중인 사건의 경우는 열람등사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행 중인 사건을 위해 정보가 필요한데 적용할 수 없다니.


수사 기록의 소유권은 검찰에게 있지 않다. 국민인 우리 소유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수사를 한 검찰은 그 기록을 국민에게 공개해야 한다. 수사 기록을 꽁꽁 숨기는 관행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수가 기록을 시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국민 중심 검찰의 기본적인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89쪽)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검사에게 주어진 기소권이 어떤 것인지, 그 기소권을 남용하는지 제대로 기소하는지 지켜보는 국민의 일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사회적 관심을 갖는 사건의 경우에 더욱.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소.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수술을 대리로 한 사건에서 의사는 상해죄가 아니 사기죄로만 기소하는 검찰. 검찰이 유령 대리 수술 참여자를 상해죄에 적용해서 공소 제기한 사례가 없다. 검찰에서는 상해죄를 적용하지 않는 이유를 명확하기 밝히지도 않고 있으니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나온다.


일반 시민에게는 한없이 높은 법이 검찰의 식구, 그러니까 검사들에게는 부드럽고 턱 없이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책에서 다시 접하니 어이가 없다. 김학의 동영상 사건, 길거리 성추행 부장 검사, 현직 부장검사의 교통사고, 모두 무죄이거나 가벼운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일은 재심도 있었다. 억울하게 범죄자가 된 경우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 <재심>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검찰도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검찰이 재심을 청구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 더욱 놀랐다. 한데 재심 사건 심문기일에 검사가 어떤 의견 도 내지 않고 출석도 하지 않은 기막힌 사례에 할 말을 잃었다. 지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피의자의 인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검찰이 거악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혹여나 더 중요한 시민들의 인권보호를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우리는 두 눈 부릅뜨고 관련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282쪽)


앞으로 드라마를 볼 때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검사가 유능한 게 아니라는 생각, 공익의 대표자로 진짜 검사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 이제는 재미로 보는 드라마도 다르게 보게 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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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이어진다. 속도는 느리고 집중력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성실한 토끼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거북이가 된다. 아니, 베짱이가 더 맞겠다. 그래도 그 느림이 좋다. 적정한 속도를 이룬다고 할까. 책을 들이는 일도 그에 맞게 느려진다. 가을이니까 소설을 읽어야지,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다. 가을엔 소설,이라고 하면서 곁에 둔 두 권의 소설이다. 하나는 단편집, 하나는 장편소설이다. 


요즘 출판사 1984BOOKS에서 나온 책들이 다 좋다. 직접 읽어본 책도 좋고 이웃이나 블로그의 평도 좋다. 그래서 이번에 들인 책은 안드레이 마킨의 소설 『어느 삶의 음악』과 소설 보다 시리즈다. 『소설 보다: 가을 2022』는 이서수, 위수정 작가의 단편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나오는 이 시리즈는 그냥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작가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느낌을 받아서 신중하게 구매할 생각이다.





가을에 들였으니 이 짧은 가을이 끝나기 전에 읽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런 명분은 기껍다. 조금 빠른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사진 속 책장의 책들 가운데 읽어야 할 책이 보인다. 황정은의 글을 천천히 다시 읽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아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나는 황정은의 글을 알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는 다시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세 권은 읽기에 그친 책들이다. 리뷰를 쓸 때 책은 다시 정리되고 그 책에 대한 마음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읽어야 할 책이라는 기준은 딱히 없다. 지난번에도 말한 것처럼  그저 끌리는 대로 읽는 게 즐겁다. 아마도 곧 이어 끌리는 대로 만나게 될 책은 김연수 단편집과 2022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좋은 책이 아니라 내가 좋은 책, 그뿐이다. 그리고 그런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잃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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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06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성실한 독서가가 되고
싶으나, 집중력의 저하로(핸드폰
과 너튜브 탓을...) 책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도 느림보 거북스 스타일로
꾸역꾸역 읽고 있답니다.

저도 1984BOOKS에 눈길이 가네요.

황정은 작가의 책은 어떤 책 읽고
나서 식겁해서 소장한 책도 읽을
염두를 못내고 있네요...

자목련 2022-10-07 09:10   좋아요 1 | URL
황정은의 어떤 책일까 궁금하면서도 최근에 나온 연작이나 에세이는
그에 비하면 무난해서 읽으셔도 좋을 듯해요^^

그레이스 2022-10-0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소설!
옳습니다 ~~

자목련 2022-10-07 09:09   좋아요 1 | URL
노벨문학상 발표에 힘입어 가열차게 읽어보아요!
 
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에바 메이어르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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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작가, 화가, 가수, 작곡가로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에바 메이어르의 에세이 『부서진 우울의 말들(그리고 기록들)』 은 우울증과 어떻게 지내왔으며 살고 있는지 들려준다. 기존의 우울증에 대해 다룬 책과는 다른 책이다. 의학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치료 방법에 대한 내용이 아닌 저자가 느낀 우울증의 현상과 상태를 솔직하게 말한다. 때로 적나라하면서도 때로 문학적 은유가 가득한 문장은 그 부분만 놓고 보면 우울하기보다는 아름답다고 여길 정도다.


사실 이 에세이를 읽는 일은 어렵다. 한 편으로는 고통스럽다. 우울증에 대해 적극적인 이해를 구하는 이에게는 색다른 접근 방식이라는 건 인정한다. 저자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울에 민감했다. 그가 우울을 구체적으로 색으로 말할 때 우울은 보다 선명해진다. 한 편으로 우울증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예술이 우울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울에 색깔이 있다면, 단연 회색이다. 그리고 때로는 흰색이다. 흰색은 침묵의 색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색이고, 패배의 색이고, 아무것도 없는 색이고, 상실의 색이다. 만약 모든 색을 함께 섞으면, 그 부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흰색은 눈의 색이기도 하고, 내 고양이 퓌시의 털색이기도 하고, 영원의 색이기도 하다. 영원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의 일부이지만, 우리가 영원 속에서 살 수는 없다. 흰 것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47쪽)


때로 해 질 녘이면, 나는 그림자 같은 옅은 검은색 층 아래에 있다. 마치 나와 다른 모든 것 위로 수채 물감이 한 겹 칠해진 것 같다. 나는 빛 속에 서 있지 않고, 그렇다고 어둠 속에 있지도 않다. 나는 빛과 어둠을 모두 볼 수 있다. (73쪽)


저자가 본격적으로 우울증을 앓았던 시절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거식증에 시달렸다. 전문병원에 입원을 해 다양한 치료를 받았다. 그가 받은 우울증 치료는 다양하다. 청소년기 상담을 시작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전문 병원에서는 다양한 치료(인지, 행동)에 대한 서술은 우울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이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우울증 치료기나 극복기는 아니다. 자신의 개인사를 시작으로 전방위적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기라고 하면 맞을까. 죽음에 대한 유혹, 그 안에서 마주한 사유를 통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철학자의 저서와 문학 작품을 통해 우울증에 대한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하이데거(존재에 대한 의문), 자크 데리다(우리는 모두 섬에 있다며 근본적인 실존), 버지니아 울프(시간과 씨름하며 삶의 상실과 덧없음을 말하는),누구든 곁에 우울이 존재한다는 걸 말한다. 


저자는 반복적인 우울증으로 힘들었지만 모든 우울증이 같은 증상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어떤 시기에는 숙면하지 못하는 고통, 어떤 시기에는 자살하려는 충동, 거식증의 시기에는 마른 몸으로 인한 육체적 통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생각한다. 저자의 경우 몸을 움직이는 일이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달리기, 산책, 돌봐야 할 동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는 건 반대로 동물들이 저자의 감정을 알아주는 존재와의 친밀함이 좋은 영향을 주었다. 


우울증은 세상을 더욱 하얗게 만든다. 눈처럼 하얀 것은 아니다. 눈은 세상이 우리보다 크다는 것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준다. 우울증은 세상을 덮는 것이 아니라 지워버린다. 바깥세상이 더 시끄럽고 활기찰수록 그 대비는 더욱 또렷해진다. 고요함을 망토처럼 둘러쓰고 있다고 해서 우울증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습을 하면 공허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145쪽)


어떤 일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저자는 자신과 세상을 정지하게 만드는 공허함에 대해 음악이나 밝은 색의 그림으로 대처하는 게 아니라 고요함을 택한다. 글쓰기와 명상이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요함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세상으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계속 만나기 위함이다. 


바다는 끝이 없고, 저 멀리서 하늘과 하나가 된다. 당신의 몸도 하나의 바다이다. 밤낮을 따라 움직이고 저절로 늙어가며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은 곧 끝날 것이고, 당신은 본래의 것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러니 지구에, 당신이 지나온 나날들에 의지하자. 내일은 다를 수 있다. (159쪽)


이 책은 그 세상을 향한 다짐이자 우울증이라는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가 전하고 싶은 건 우울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 그게 중요하다는 게 아닐까 싶다. 때로는 참고 견디고 기다리며 나를 만나기 위해 연습하고, 우울증을 삶의 일부라고 인식하는 일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진솔한 조언. 존재의 이유와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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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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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간직한 삶을 아름답다. 누구나 비밀이 존재한다. 그러니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다만 그 비밀의 무게에 짓눌리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아름다운 비밀은 산뜻하고 가볍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 속 ‘뤼시’의 삶은 그 자체가 비밀이다. 뤼시의 비밀은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어른의 시선에서는 그저 속임수나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뤼시에게는 뤼시만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사는 건 뤼시뿐이니까.


산문으로 이미 그 아름다움을 증명한 크리스티앙 보뱅은 소설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하는 문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부모와 함께 서커스 단에서 태어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소녀 뤼시의 첫사랑은 늑대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장의 주인공이 늑대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서커스 단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늑대는 위험한 존재였지만 소녀에게는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존재였다. 어느 누구도 늑대와 소녀만의 거리,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과 비밀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늑대가 죽고 여덟 살 소녀는 가출을 감행했다. 서커스 단의 트레일러에서 벗어나 돌봐야 할 쌍둥이 동생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간다. 길을 잃은 척, 부모를 잃어버린 척, 소녀는 뤼시가 아닌 다른 아이가 된다. 그런 연기는 너무 쉽다. 어른에게 아이들은 순수한 존재,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니까. 가출 때마다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소녀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경찰을 통해 부모에게 돌아오면 새로운 이름을 찾아 집을 나선다.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것은 비밀이자 자유였다.


부모님이 서커스 단에서 나와 무덤을 파는 묘지 일을 하고 중학생이 된 소녀는 기숙사 생활을 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소녀는 기숙사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거리가 멀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주말에 소녀는 하숙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로망’을 만나 결혼을 한다. 뤼시에게 결혼은 안전보다는 비밀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안겨주고 그녀가 괴물이라 부르는 ‘알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서로 달랐다. 서로에게 비밀스럽고 은밀한 대상이 아니었다. 


진정한 삶은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훔치는 거야. 이슬비를 맞으며 걷고, 포장도로 위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기뻐하고, 책에서 문장 하나를 뽑아내 잠시 마음에 담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는 것, 그것 역시 속이는 거야. (133쪽)


어쩌면 괴물과 헤어지는 게 뤼시에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속한 관계가 아니라 그녀는 자신에게만 속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후 우연한 계기로 배우가 되었고 성공을 했지만 뤼시에게 배우란 직업은 거짓과 비밀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뤼시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비밀과 자유를 느끼는 일은 글쓰기였다. 


그러니까 『가벼운 마음』 은 호텔에 머물며 뤼시가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늑대를 사랑했던 소녀가 자라온 이야기,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비밀과 관계들. 그녀가 붙인 이름으로 불렸을 때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사물들과 사람들이 된다. 맨 처음 관계를 맺은 늑대가 그러하듯이. 


내게는 더 이상 아버지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필요하지 않다. 그런 건 너무나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목덜미로, 피부와 블라우스 사이로 스미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이며, 내 눈을 전나무의 짙디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것뿐이다. (141쪽)


소설 속 뤼시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누구도 될 수 없는 존재다. 가벼이 날아서 사뿐 내려앉아 다시 날아갈 준비를 하는 나비 같은 삶. 잡을 수 없고 잡히지 않는 삶. 그래서 더 매혹적이고 흠뻑 빠져든다. 그저 잔망스러운 소녀가 부르는 이름의 존재, 그 안에 담긴 사랑을 흠모할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177쪽)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성장하는 삶을 택했다. 누군가 그것을 자유, 방탕, 방랑, 미성숙, 무책임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이름은 정해진 게 없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삶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나는 아름답고 내밀한 가벼움이라 부르고 싶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게 어려운 소설이다. 그러니까 직접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뤼시가 간직했던 비밀들, 그 아름다운 비밀의 알갱이를 직접 줍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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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05 0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가벼운 마음 진짜 너무 좋고 자목련님 리뷰도 너무 좋네요. 가벼운 마음 진짜 너무 좋아요 자목련님도 진짜 너무 좋고 뤼시도 너무 좋고 ㅠㅠㅠㅠㅠㅠ 가벼운마음 아직 안읽은 사람 뇌 사고싶따....

자목련 2023-07-05 11:52   좋아요 1 | URL
가벼운 마음 진짜 좋아요, 물론 은오 님의 리뷰도 좋고, 은오 님도 좋아요!!
 
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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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두렵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뉴스나 언론 보도를 통해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 같지 않다고 느낄 때. 택배나 배달 주문을 할 때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입력한다는 글을 보고 나도 이렇게 해야지 싶을 때.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공중 화장실에 가를 걸 주저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씩 무서울 때가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되었을까.


이서수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 속 주인공 수경도 자신이 성범죄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동료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위험한 일을 당한 뻔했다. 다행스럽게 피해를 면했지만 수경은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라도 그 동료를 계속 볼 수 없을 것이다. 수경은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경이 마냥 집에서 쉴 수만은 없었다. 15평 빌라에 여섯 명의 가장 역할을 하던 수경이었다. 남편은 투자 전문가지만 수익을 낸 적이 없고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부모님은 수경의 집으로 왔다. 엄마는 큰일을 당한 수경을 돌보려 청소 일을 그만둔 상태다. 거기다 남편의 조카 둘까지. 조금 색다른 가족 구성원이다.


수경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예전처럼 직장에 나가 동료들과 일할 자신은 없었다. 수경에게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였고 그래서 선택한 일이 택배였다. 택배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노동자인데 소속된 곳이 없어 노동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이상한 사업자 신분이 되었다. 수경의 택배 일을 엄마가 도왔고 남편과 아버지도 일을 찾았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수경과 같이 플랫폼 노동자였다. 수경의 일을 계기로 가족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수경 자신이 시간을 견디고 앞으로 나가는 동안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경의 다짐을 응원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러게 해보고 싶었다. (256쪽)


소설의 제목 ‘헬프 미 시스터’는 아마도 수경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서비스 앱 ‘헬프 미 시스터’는 일을 구하는 이도 일을 의뢰하는 이도 모두 여자다. 수경은 엄마 여숙과 함께 택배 배송을 그만두고 이 앱에 등록하여 일을 시작한다. 여성이 사용하는 앱이므로 여성의 마음을 대면하고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동성 연인과의 결혼식을 축제처럼 즐기고 참석하는 일, 제사 음식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음식 하러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의뢰가 많았고 수경과 여숙은 흔쾌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헬프 미 시스터’에서 요구사항은 다양하다. 그 모든 것의 핵심은 남편 우재의 말처럼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이다. 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함을 수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반드시 여자여야만 하는 절박함을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앱 가운데 이런 앱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사용자가 있을지도. 그만큼 무서운 세상이라는 게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놓고 모든 걸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든든하다.


설 속 수경의 가족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헬프 미 시스터’처럼 서로가 돕는다. 그게 참 좋았다. 그러니까 유머와 격려를 잃지 않는 것. 끝없이 무겁게 빠져들 수도 있는 상황을 타개하는 힘을 키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가족,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서툴지만 따뜻한 연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가 불러온 기적. 이서수 작가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338쪽)


상처와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부정이 아닌 긍정을 선택하는 일. 어렵고 힘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나 하는 한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마음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소설이 아닌 현실이 아름다운 기적으로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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