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에바 메이어르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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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작가, 화가, 가수, 작곡가로 예술가이자 철학자인 에바 메이어르의 에세이 『부서진 우울의 말들(그리고 기록들)』 은 우울증과 어떻게 지내왔으며 살고 있는지 들려준다. 기존의 우울증에 대해 다룬 책과는 다른 책이다. 의학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치료 방법에 대한 내용이 아닌 저자가 느낀 우울증의 현상과 상태를 솔직하게 말한다. 때로 적나라하면서도 때로 문학적 은유가 가득한 문장은 그 부분만 놓고 보면 우울하기보다는 아름답다고 여길 정도다.


사실 이 에세이를 읽는 일은 어렵다. 한 편으로는 고통스럽다. 우울증에 대해 적극적인 이해를 구하는 이에게는 색다른 접근 방식이라는 건 인정한다. 저자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울에 민감했다. 그가 우울을 구체적으로 색으로 말할 때 우울은 보다 선명해진다. 한 편으로 우울증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예술이 우울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울에 색깔이 있다면, 단연 회색이다. 그리고 때로는 흰색이다. 흰색은 침묵의 색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색이고, 패배의 색이고, 아무것도 없는 색이고, 상실의 색이다. 만약 모든 색을 함께 섞으면, 그 부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흰색은 눈의 색이기도 하고, 내 고양이 퓌시의 털색이기도 하고, 영원의 색이기도 하다. 영원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의 일부이지만, 우리가 영원 속에서 살 수는 없다. 흰 것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47쪽)


때로 해 질 녘이면, 나는 그림자 같은 옅은 검은색 층 아래에 있다. 마치 나와 다른 모든 것 위로 수채 물감이 한 겹 칠해진 것 같다. 나는 빛 속에 서 있지 않고, 그렇다고 어둠 속에 있지도 않다. 나는 빛과 어둠을 모두 볼 수 있다. (73쪽)


저자가 본격적으로 우울증을 앓았던 시절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거식증에 시달렸다. 전문병원에 입원을 해 다양한 치료를 받았다. 그가 받은 우울증 치료는 다양하다. 청소년기 상담을 시작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전문 병원에서는 다양한 치료(인지, 행동)에 대한 서술은 우울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이 우울증을 앓는 환자에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에세이가 우울증 치료기나 극복기는 아니다. 자신의 개인사를 시작으로 전방위적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기라고 하면 맞을까. 죽음에 대한 유혹, 그 안에서 마주한 사유를 통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철학자의 저서와 문학 작품을 통해 우울증에 대한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하이데거(존재에 대한 의문), 자크 데리다(우리는 모두 섬에 있다며 근본적인 실존), 버지니아 울프(시간과 씨름하며 삶의 상실과 덧없음을 말하는),누구든 곁에 우울이 존재한다는 걸 말한다. 


저자는 반복적인 우울증으로 힘들었지만 모든 우울증이 같은 증상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어떤 시기에는 숙면하지 못하는 고통, 어떤 시기에는 자살하려는 충동, 거식증의 시기에는 마른 몸으로 인한 육체적 통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생각한다. 저자의 경우 몸을 움직이는 일이 우울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달리기, 산책, 돌봐야 할 동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는 건 반대로 동물들이 저자의 감정을 알아주는 존재와의 친밀함이 좋은 영향을 주었다. 


우울증은 세상을 더욱 하얗게 만든다. 눈처럼 하얀 것은 아니다. 눈은 세상이 우리보다 크다는 것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준다. 우울증은 세상을 덮는 것이 아니라 지워버린다. 바깥세상이 더 시끄럽고 활기찰수록 그 대비는 더욱 또렷해진다. 고요함을 망토처럼 둘러쓰고 있다고 해서 우울증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습을 하면 공허함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145쪽)


어떤 일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저자는 자신과 세상을 정지하게 만드는 공허함에 대해 음악이나 밝은 색의 그림으로 대처하는 게 아니라 고요함을 택한다. 글쓰기와 명상이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요함 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세상으로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계속 만나기 위함이다. 


바다는 끝이 없고, 저 멀리서 하늘과 하나가 된다. 당신의 몸도 하나의 바다이다. 밤낮을 따라 움직이고 저절로 늙어가며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은 곧 끝날 것이고, 당신은 본래의 것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러니 지구에, 당신이 지나온 나날들에 의지하자. 내일은 다를 수 있다. (159쪽)


이 책은 그 세상을 향한 다짐이자 우울증이라는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가 전하고 싶은 건 우울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 그게 중요하다는 게 아닐까 싶다. 때로는 참고 견디고 기다리며 나를 만나기 위해 연습하고, 우울증을 삶의 일부라고 인식하는 일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진솔한 조언. 존재의 이유와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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