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엄마를 우선시 한다. 두 분 모두 내게 소중한 사람이고, 두 분 모두 나를 사랑하는데도 그렇다. 다정한 모녀였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함께 보낸 시간도 짧다. 현재 살아 있는 분은 아버지 뿐이니까. 어쩌면 일부러 거리를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어떤 미움이나 원망 같은 게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 소설『남자의 자리』를 읽으면서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슬픔에 대해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한 방송에서 중년 남자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유년 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던 것이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지만 과연 그럴까. 부모가 되었지만 잠시나마 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때란 아이가 나를 속상하게 했을 때 뿐이 아닐까. 

 

 ‘그는 마흔 살이다. 사진 속에는 그가 겪은 불행, 혹은 그가 품고 있는 기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약간 나온 배, 관자놀이께가 희끗희끗해져 가는 검은 머리칼 등, 세월의 명확한 흔적들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사회적 조건의 표지(標識)들. 몸통으로부터 헤벌어져 있는 팔들, 그리고 소시민적인 취향이라면 사진의 배경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화장실과 세탁실…….’ p. 49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흔 살의 남자. 내게 남자의 마흔은 어떤 나이였던가? 학창시절 깔끔한 머리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선생님의 모습과 겹쳐지는 나이였을 뿐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들여다 보는 일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마음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언뜻 언뜻 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형제들을 보았고, 오빠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동자였기에 배움이 짧았기에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던 수많은 아버지들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93

 

 아주 짧고 담백한 소설이다. 짧아서 더 긴 여운을 남기고 담백해서 더 슬프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글이라 더 그렇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멀어지고 소원해진 관계, 글을 쓰면서 아니 에르노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미묘했을까.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 무심했던 지난 날을 후회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한 적이 없다. 흑백 사진 속 젊은 아버지가 꿈꾸던 삶이 어떤 삶인지 물어본 적이 없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나는 늘 이렇다. 문득, 한 남자가 내 아버지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2-05-21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자목련 2012-05-22 11:18   좋아요 0 | URL
어쩌면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다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바깥오리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 날을 감기와 함께 지내고 있다. 약을 계속해서 먹고 있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침대와 책상에는 코를 푼 더러운 휴지가 쌓이고 투명한 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멍한 상태로 읽고 있던 책의 앞 부분을 다시 읽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도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허연의 『내가 원하는 천사를 기다리며 그의 다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다시 읽는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

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

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

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제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p. 17)

 

 

 시인에게는 푸른색으로 남았던 그 시절, 내가 아는 한 소년에게서는 짙은 파랑색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 내가 소녀였을 시절에 내 모든 손편지의 수신인이었던 그 소년 말이다. 채송화를 좋아하고 채근담을 좋아했던 그 소년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서 파랑을 보았다. 그저 짧게 주고 받은 메일에서 간단한 안부를 전하던 목소리에서 아주 짙은 파랑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내게 있어 자신이 나쁜 소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 할 것이다.

 

 

 <검은 지층의 노래>

 

 열병 않은 머리맡에서 아주 오래전 노래가 흐른다. 지층

의 흉터를 따라 흐르던 노래. 지층이 파 놓은 아주 미세한

홈을 따라 흐르던 노래. 가끔씩 상처 난 지층의 절개면에

서 불협한 소리를 내곤 하던 노래. 돌고 돌았던 검은 지충

의 노래. 누구의 뼈를 깎아서 만든 노래. 그 뼈를 기억하고

있는 검은 노래.

 

 판판이 깨진 노래. 한 시대와 또 다른 시대가 장중하게

죽어 갔던 노래. 모닥불에 던지면 한 줌도 안 됐던 노래.

애저녁에 영원할 수 없었던 노래. 손쓸 수 없는 파멸을 담

았던 노래. 차마 칼을 뽑지 못했던 그 봄밤에 들렸던 노래.

일몰 후에는 단조로 변했던 세월의 노래.

 

 세로로 서 버린 노래. 문자가 되어 버린 노래. (p. 47)

 

 

 허연의 시집에서 자꾸만 그 소년이 보인다. 문득, 지금은 어떤 색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 모습으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면 좋겠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고 있다면, 원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면 더 좋겠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

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

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

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

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

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

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오늘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p. 23>

 

 

 여전히 이 시에 멈춘다. 여전히 치열한 삶을 살고 있을 나쁜 소년을 위한 시 같아서, 여전히 사랑하는 일에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나쁜 소년에게 보내는 시 같아서, 그 나쁜 소년을 바라보는 나쁜 소녀를 위한 시 같아서, 굳은 살은 늘어날 것이고, 상스러운 오늘을 살고 있을 수많은 나쁜 소년과 나쁜 소녀에게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아서, 반복해서 읽고 읽는다.

 

 5월인데 어떤 날은 춥고, 어떤 날은 덥다. 나쁜 소년이 원하는 천사는 어떤 천사일까.

 

 

 

 

 

 


댓글(4) 먼댓글(1)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지긋지긋한 어떤 날들 중의 하루 뿐인 오늘도 서글프게 흘러간다
    from 識案 2012-05-22 10:44 
    밤에 읽은 시와 아침에 읽은 시는 분명 같았다. 시를 읽는 눈과 마음이 달랐을 뿐이다. 차례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차분하게 읽는 대신 눈에 닿는 순서대로 시를 읽다가, 다시 차례대로 읽는다. 그러니 시라는 건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고 안다고 아는 게 아니며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
 
 
이진 2012-05-1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쿵, 늦은 감기에 걸리셨군요. 하긴 요새 온도 차이가 너무 심하게 벌어진다 했어요.
자목련님 많이 아프신건 아니죠? 많이 아프시면 안되요.
허연의 시들은 참 예쁘네요.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고 딱딱 들어맞는게 정말 예뻐요.
저도 좋은 시를 고를 능력이 생기면 좋을텐데. 음.

자목련 2012-05-16 12:19   좋아요 0 | URL
소이님의 마음을 감기가 알아서 곧 사라질 것 같아요. 고마워요.

시들에게 예쁘다라고 말하는 그 마음이 좋은 시를 알아보는 거 아닐까요?
지금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일까 싶어요.^^

아이리시스 2012-05-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졸려요ㅠㅠ
시 너무 좋은데 못 읽고 꾸벅꾸벅 (이러면서 댓글쓰고있다-_-;)

오오, 이 좋은 날들에 감기라니. 오늘 저녁은 돈가스 먹을 거예요! 자목련님도 맛난 거 많이 챙겨드시고 감기 뚝!
저도 제 천사를 좀 찾아주셔요. ^^

자목련 2012-05-16 12:17   좋아요 0 | URL
반짝이는 날을 감기가 시샘하는 것 같아요. 전 어제 노란 카레를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해서 남은 건, 점심에도 먹어야 할 것 같아요.ㅎㅎ

감기는 나아지고 있는데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아요. 아이리시스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님의 천사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기다리는 책

 

 꽃이 지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 남아 있는 꽃잎들이 흔들린다. 꽃 지는 계절, 꽃 비가 아름다운 요즘 가의 계절은 봄일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여름에 속한 날들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아직까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감정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 계절에 정확한 이름을 명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봄처럼 도착한 시집을 읽는다. 가장 먼저 읽은 시는 이런 시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언저리에 머무는 그들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p. 100~101)

 

 비가 오는 날이라, 끝을 달려가는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다. 봄을 보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때로 본능처럼 다가온다. 백작약이라는 말에, 나는 주책없이 가슴이 설렌다. 이별의 공간에,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더이상 기억 나지 않는 너의 얼굴을 그려본다. 너는 알까, 가끔 네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령 네가 나를 기억한다 해도 너는 궁금해하지 않을 걸 알기에 소리를 죽인 채 속눈썹은 울부짓는다.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질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p. 68~69)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는가. 손끝으로 꽃을 매만질 용기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비겁한 봄날에 이런 시를 읽어 흘러내리는 감정 주워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준 시가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투박한 말 뒤에 숨겨진 여리디 여린 마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간절함 외침을 대신 해 시인이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듯하다. 

 

  <툭>

 

  빛줄기 하나 텅 비어 바닥을 향해 있다

 

  못이 박혀 있던 자리에 남은 구멍

  여백을 견디던 벽에게 못은 무엇이었을까

  한 점으로부터 출발했을 여백

  벽에 구멍을 낸 것도 막고 있던 것도 못이었다

  어떤 중심은 돌출일 뿐

  그러므로 벽과 못은 상극일까

  중심이었을 때조차 못의 허기는 허공에 닿아 있었다

  낙화가 허공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들에게 가장 불편한 이름, 허공

 

  떨어지기 직전 가장 뽀족했을 못의 촉수

  중심을 견디던 내부의 힘으로

  툭, 못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벽을 놓친다

  오래된 견딤일수록 결별의 시간을 짧고

  툭, 심장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마음을 놓친다

  마지막 소리로 제 숨을 거두어 가는 것들

  흩날리는 꽃을 보는 나무의 그늘이 깊다

 

  지친 독이 못에 펴져 있다, 푸른 전갈

  바람 한 필 걸어둘 수 없다는 벽과

  다시는 너라는 중심에 박히지 않겠다는 다짐 사이

  닿을 소식은 닿는다 바람으로라도

  툭, 멀리서의 부음이 떨어진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없다 다만 소식이 있을 뿐

 

  푸른 전갈, 검은 눈 속으로 번지는 (p. 92~93)

 

 <놓치다, 봄날>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안자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p. 62~63)

 

  <손목을 견디다>

 

  기다림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해 어떤 선언은 비인칭

 점.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까 그늘로만 향하는 발자국, 생장점을 지닌 기다림은 식물

 의 상상력과 알맞다

 

  고요 수목원 부채파초 앞에 서면 부채와 파초 사이 바람

 을 헤아리는 허공, 이 식물의 내력은 줄기에 고인 빗물로 한

 모금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

 

  기다림의 손목 대신 파초 줄기를 잘랐을 손에 왜 떠도는 발

 자국은 구원에 목말라 할까 그럴수록 두 눈의 수위(水位)

 만 높아질 뿐, 길 잃은 발자국에게는 나침반이 되기도 하는

 데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잎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 방향을

 잃기 위해 떠도는 영혼이라면 소용없을 부채파초의 꽃말은

 흰 기다림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부채가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라는 냉정, 그는 고백과 헤어짐의 문

 장을 파초 잎에 적어 보냈다 기다림,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

 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하는 것 떠남과 기다림은 비인칭 시

 점의 선언과 감행만큼 가깝게 멀다 생장을 거듭하는 시간

 만, 그늘 쪽으로 한 뼘 더 (p. 84~85)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부적처럼 믿고 산 지 오래다. 오랜동안 소식이 닿지 않던 지인의 안부가 반갑기는 커녕 두렵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건조한 날들을 살고 있다는 말일 터. 아니, 사실은 기다리지 않는 척 하며 언제나 내 귀는, 내 모든 촉수는 너를 향해 있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가 달려와 주기를, 네가 잘 지낸다는 안부를 바람에라도 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봄날에.

 

 옮기지 못한 시들이 많다. 좋은 시냐고 묻는다면, 그저 나를 울리는 시라고, 그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라고, 꽃잎이 떨어질 때 속눈썹이 흔들리는 당신이라면, 반가울 시라고 답할 뿐이다.  

 

 

 

 

 

 

 

이은규 첫 시집, <다정한 호칭>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12-04-2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2-04-26 15:42   좋아요 0 | URL
함께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2-04-27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의 날’이 있다는 걸 6년 전에는 몰랐었다. 그러니까 내가 책에 다시 애정을 갖고서야 세계 책의 날이, 4월 23일이라는 걸 안 것이다.  책의 생일인 오늘,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사과를 한 입 덥석 물고 싶게 만드는 표지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다.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책의 날 도착한 신간 알림 문자는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나왔다는 것이다. 올해의 수상 작가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 더 좋다. 게다가 대상을 거머쥔 작가, 손보미는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니, 정말 반가운 문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빠른 시일 내 내 손길이 닿을 것 같은 책은 마흔 일곱에 등단한 작가 전민식의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세계 문학상 수상작이다.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책은 이은규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제목처럼 다정하고 포근할 것만 같다.

 

 

 

 

 

 

 

 

 

 

 

 

 

 

 

 

 

 

 

 

 

 

 책의 날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책을 기다리는 일상은 즐겁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는 일도 그렇다. 그래도 책의 생일인 오늘, 책을 이야기하는 일은 한층 더 즐거운 일이다. 당신 곁엔 어떤 책이 있나요? 당신이 기다리는 책은 어떤 책인지 들려주세요.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기다리는 책
    from 존재증명, 부재증명 2012-04-24 09:31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 한 가득인데, 또 책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필요'라는 의미는 얼마나 간사한지. 에, 시리즈를 몽땅 장바구니로. 꽃 사진 찍어서, 이 꽃이 무어냐 물어볼때마다 친절하게 답해주시는 선생님에게 죄송하여, 이제사;; 꽃도감을. 내친김에 이런 책들을 우루루 주문했다. 요즘 들어 꽃키우기, 식물키우기에 재미를 붙인데다가, 다른 의미로의 '필요'도 있어서. 예전, 엄마가 화초나 난을 키우시면서,
 
 
 

 

 4월이 되었고 선거도 끝났다. 어딘서가 꽃이 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등처럼 환한 목련의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고 누군가 내게 전했다. 나는 아직 꽃을 보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작년과 비교하면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기에 길 가에 핀 꽃을 마주할 날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베란다에 작은 화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만 주면 잘 자라는 난을 비롯해 올 초 우리집에 들어온 작은 녀석들이 제법 잘 자라고 있어 기쁘다.

 

 아, 선물받은 난에 꽃이 있긴 하다. 노란(아니 선명한 노랑이 아닌 맑은 노랑) 꽃잎이 떨어지고 있지만 아직 꽃이 있다. 고운 자주빛의 히아신스의 꽃도 사라진지 오래다. 내년까지 잘 살아줘서 그 빛을 다시 보여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아직 이 봄을 노래하는 어떤 꽃도 보지 못했다.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개나리, 수줍은 분홍 진달래, 고고한 목련을 보고 싶다.

 

 꽃 대신 책을 만나야 할 봄일까.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퓰리처 상 수상작인 <깡패단의 방문>, 극명한 고독을 만날 수 있을 듯한 <소수의 고독>, 성장소설로 알고 있는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인 <와일드 펀치>, 김제동의 결혼 비용으로 쓸 꺼라는 <김제동이 어깨동무를 합니다>를 곁에 두었다.

 

 

 

 

 

 

 

 

 

 

 

 

 

 

 

 

 

 

 

 

 

 

 

 

 

 

 

 

 

 

 

 

 아직 곁에 두지는 못했지만, 읽고 싶은 시집도 많다. 장석주의 <오랫동안>,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임현정의 <꼭 같이 사는 것처럼> 그리고 곧 나올 2008년 등단한 시인 이은규의 첫 시집 <다정한 호칭>이다.

 

 

 

 

 

 

 

 

 

 

 

 

 

 

 

 

 

 

 

 

 

 

 

 

  어디선가 꽃은 지고 봄날은 이렇게 흐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4-23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3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