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책

 

 꽃이 지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 남아 있는 꽃잎들이 흔들린다. 꽃 지는 계절, 꽃 비가 아름다운 요즘 가의 계절은 봄일 것이고, 누군가는 이미 여름에 속한 날들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아직까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분명하지 않은 모호한 감정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 계절에 정확한 이름을 명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봄처럼 도착한 시집을 읽는다. 가장 먼저 읽은 시는 이런 시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언저리에 머무는 그들이 희게 시리다

 

  방금 출발한 차편에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p. 100~101)

 

 비가 오는 날이라, 끝을 달려가는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다. 봄을 보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때로 본능처럼 다가온다. 백작약이라는 말에, 나는 주책없이 가슴이 설렌다. 이별의 공간에, 영원처럼 간직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더이상 기억 나지 않는 너의 얼굴을 그려본다. 너는 알까, 가끔 네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령 네가 나를 기억한다 해도 너는 궁금해하지 않을 걸 알기에 소리를 죽인 채 속눈썹은 울부짓는다.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질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p. 68~69)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뻔 했는가. 손끝으로 꽃을 매만질 용기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비겁한 봄날에 이런 시를 읽어 흘러내리는 감정 주워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준 시가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투박한 말 뒤에 숨겨진 여리디 여린 마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간절함 외침을 대신 해 시인이 어딘가에 있을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듯하다. 

 

  <툭>

 

  빛줄기 하나 텅 비어 바닥을 향해 있다

 

  못이 박혀 있던 자리에 남은 구멍

  여백을 견디던 벽에게 못은 무엇이었을까

  한 점으로부터 출발했을 여백

  벽에 구멍을 낸 것도 막고 있던 것도 못이었다

  어떤 중심은 돌출일 뿐

  그러므로 벽과 못은 상극일까

  중심이었을 때조차 못의 허기는 허공에 닿아 있었다

  낙화가 허공에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떠 있는 것들에게 가장 불편한 이름, 허공

 

  떨어지기 직전 가장 뽀족했을 못의 촉수

  중심을 견디던 내부의 힘으로

  툭, 못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벽을 놓친다

  오래된 견딤일수록 결별의 시간을 짧고

  툭, 심장이 가까스로 잡고 있던 마음을 놓친다

  마지막 소리로 제 숨을 거두어 가는 것들

  흩날리는 꽃을 보는 나무의 그늘이 깊다

 

  지친 독이 못에 펴져 있다, 푸른 전갈

  바람 한 필 걸어둘 수 없다는 벽과

  다시는 너라는 중심에 박히지 않겠다는 다짐 사이

  닿을 소식은 닿는다 바람으로라도

  툭, 멀리서의 부음이 떨어진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없다 다만 소식이 있을 뿐

 

  푸른 전갈, 검은 눈 속으로 번지는 (p. 92~93)

 

 <놓치다, 봄날>

 

  저만치 나비 난다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흰 날개에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안자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어느 날 저 나비가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p. 62~63)

 

  <손목을 견디다>

 

  기다림의 손목을 잘라버려야 해 어떤 선언은 비인칭

 점.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할 수 있을

 까 그늘로만 향하는 발자국, 생장점을 지닌 기다림은 식물

 의 상상력과 알맞다

 

  고요 수목원 부채파초 앞에 서면 부채와 파초 사이 바람

 을 헤아리는 허공, 이 식물의 내력은 줄기에 고인 빗물로 한

 모금의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것

 

  기다림의 손목 대신 파초 줄기를 잘랐을 손에 왜 떠도는 발

 자국은 구원에 목말라 할까 그럴수록 두 눈의 수위(水位)

 만 높아질 뿐, 길 잃은 발자국에게는 나침반이 되기도 하는

 데 한 방향으로만 자라는 잎의 습성 때문이라는 것 방향을

 잃기 위해 떠도는 영혼이라면 소용없을 부채파초의 꽃말은

 흰 기다림

 

  늘 부채를 지니고 다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부채가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라는 냉정, 그는 고백과 헤어짐의 문

 장을 파초 잎에 적어 보냈다 기다림, 아무것도 잊지 않은 기

 억 속에서 망각에 동의하는 것 떠남과 기다림은 비인칭 시

 점의 선언과 감행만큼 가깝게 멀다 생장을 거듭하는 시간

 만, 그늘 쪽으로 한 뼘 더 (p. 84~85)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부적처럼 믿고 산 지 오래다. 오랜동안 소식이 닿지 않던 지인의 안부가 반갑기는 커녕 두렵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그만큼 건조한 날들을 살고 있다는 말일 터. 아니, 사실은 기다리지 않는 척 하며 언제나 내 귀는, 내 모든 촉수는 너를 향해 있다는 마음을 들키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네가 달려와 주기를, 네가 잘 지낸다는 안부를 바람에라도 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봄날에.

 

 옮기지 못한 시들이 많다. 좋은 시냐고 묻는다면, 그저 나를 울리는 시라고, 그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다정한 목소리라고, 꽃잎이 떨어질 때 속눈썹이 흔들리는 당신이라면, 반가울 시라고 답할 뿐이다.  

 

 

 

 

 

 

 

이은규 첫 시집, <다정한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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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4-2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자목련 2012-04-26 15:42   좋아요 0 | URL
함께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2-04-27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8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5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