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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엄마를 우선시 한다. 두 분 모두 내게 소중한 사람이고, 두 분 모두 나를 사랑하는데도 그렇다. 다정한 모녀였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함께 보낸 시간도 짧다. 현재 살아 있는 분은 아버지 뿐이니까. 어쩌면 일부러 거리를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어떤 미움이나 원망 같은 게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 소설『남자의 자리』를 읽으면서 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슬픔에 대해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한 방송에서 중년 남자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유년 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던 것이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지만 과연 그럴까. 부모가 되었지만 잠시나마 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때란 아이가 나를 속상하게 했을 때 뿐이 아닐까.
‘그는 마흔 살이다. 사진 속에는 그가 겪은 불행, 혹은 그가 품고 있는 기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전혀 없다. 단지 약간 나온 배, 관자놀이께가 희끗희끗해져 가는 검은 머리칼 등, 세월의 명확한 흔적들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보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사회적 조건의 표지(標識)들. 몸통으로부터 헤벌어져 있는 팔들, 그리고 소시민적인 취향이라면 사진의 배경으로는 선택하지 않을 화장실과 세탁실…….’ p. 49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흔 살의 남자. 내게 남자의 마흔은 어떤 나이였던가? 학창시절 깔끔한 머리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선생님의 모습과 겹쳐지는 나이였을 뿐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들여다 보는 일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마음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언뜻 언뜻 내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의 형제들을 보았고, 오빠를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동자였기에 배움이 짧았기에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던 수많은 아버지들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 93
아주 짧고 담백한 소설이다. 짧아서 더 긴 여운을 남기고 담백해서 더 슬프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글이라 더 그렇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멀어지고 소원해진 관계, 글을 쓰면서 아니 에르노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미묘했을까.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 무심했던 지난 날을 후회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젊은 날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한 적이 없다. 흑백 사진 속 젊은 아버지가 꿈꾸던 삶이 어떤 삶인지 물어본 적이 없다.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나는 늘 이렇다. 문득, 한 남자가 내 아버지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