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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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렸고 세상은 느려졌다. 자동차는 길을 떠나는 대신 달콤한 잠에 취했고 안부를 묻는 전화는 틈을 두고 이어진다. 동(動)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잠시나마 정(靜)으로 변화한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요란하지 않게 맞이하려 해도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눈은 이런 시를 찾게 만든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하나가 되는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42쪽)

 

 <노란 꼭대기>

 

 겨울은 머리카락들이 수선을 떨며

 돌연 사상을 전향하기 좋은 계절

 끝내 완전한 오해로 이루어진 성에 들어가

 불 지르고, 함께 타고 싶다

 나는 정오를 모르고 오후 2시를 몰라요

 노래 부르다

 뜨겁게 녹아내리리라

 

 너는 ‘나’라는 비린내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바람

 

 떨어지는 깃발

 끊기지 않는 리듬

 빨간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뛰어다니는

 시(詩)

 

 누가 내 삶의 가장자리를 따라

 푸른 실로 시침질하네

 

 비틀린 뿌리를 가진 작은 꽃들이

 비로소 편안히 시들 수 있도록 (61쪽)

 

 박연준의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시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시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당신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 방 한 쪽에 죽은 아내의 사진과 당신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은 내 아버지는 늙었고 병들었다. 먼 훗날, 혹은 멀지 않은 날에 내 아버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허약해진다는 건 지독하고 날카로운 고통일 것이다.

 

 <뱀이 된 아버지>

 

 아버지를 병환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20~21쪽)

 

 <물빛, 정오>

 

 12시라는 찻잔 안에서

 애벌레처럼 꿈틀, 피어나는 아버지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밤새 줄어들고 줄어들어

 찻잔 속 노란 애벌레가 되었다

 아버지는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아버지는 100년 전

 자신이 화분 속에 심어진 고양이었다는 걸 기억할까?

 

 찻잔 속에서 늘어지게 자다

 가끔 구름이 되기도

 가끔 허공이 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버지는 성실하다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30쪽)

 

 어린왕자가 뱀에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별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만의 꽃과 나무가 기다리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니 박연준의 다른 시에 뱀, 나무, 꽃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원래는 팔이 있었다 / 어느 날 이유 없이 두 팔이 잘리자 / 온몸으로 한을 품어 나무의 정수리에서 (나무의 약력 중에서, 31쪽), 너는 나의 캔버스에 / 낯선 초록과 / 열두 마리 키스를 데려왔지 (나무 중에서, 80쪽) 껍질을 벗어놓고 잠든 뱀은 모른다 / 자신이 털어낸 그림자 속에 / 누가 들어가 잠드는지 (가벼운 숲 중에서, 86쪽), 때문에 그녀의 시는 지극히 몽환적이며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연애의 그늘>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짓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고라니,

 누군가 봄을 꺼버렸다

 

 동공 없이 뻥 뚤린 눈 알 속에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알들은 곧 썩는다

 식탁 위 음식들은 왜 모두 죽어 있을까?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긴,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

 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톡, 톡,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

 오래 생각하면 어둠도 늙는다 (74~75쪽)

 

 <기억은 청동빛으로 굳는다>

 

 거울 속에서 너는 내 얼굴을 침범하고

 네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권태,

 라고 말한다 코끝으로

 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코끝이나 무딘 이마 중앙으로 표현한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치지만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도리질 치는 건

 너다 그런데 나는 왜 눈 속에서

 날 바라보는 네 눈을 봐야 하는 걸까?

 

 거울,

 거울 속에서

 너는 몸이 아니라 시간으로 나타난다

 너는 악보의 끝세로줄처럼 서 있다

 너는 한쪽 팔이 잘렸고 그것은 유래 깊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곳에 바다는 없었지만 너는 바닷물에 화상을 입었고

 내가 불탔고, 기억은 팔이 세 개가 되었다

 거울 밖에서 돋아난 겨울 속엔 지렁이 세 마리가 산다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자란다

 

 거울 속에서 나를 뒤집어쓴 너는

 끊어지는 허밍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밤의 치마를 들친 벌을 받는다 (52~53쪽)

 

 박연준의 시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다. 부모, 형제, 연인, 친구와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희미해진 사진 속에 갇힌 얼굴을 발견한다. 잊고 있던 이름들,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들을 불러온다. 어쩌면 12월이라서, 연말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볼 핑계를 찾으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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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안 곳곳에 있는 달력은 몇 일 전부터 12월의 시간을 살고 있다.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고 성탄절이 있고 아이의 방학이 있고 이별이 있다. 12월엔 눈 다운 눈이 내릴 것이고, 게으름의 날들은 늘어날 것이다. 12월이 되면 Camel의  Long Goodbyes와 Club 8의 Love in December 를 들을 것이다. 12월의 첫 주문으로 이혜경의 너 없는 그 자리와 김성중의 『개그맨』을, 읽게 될 책으로는 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니 학교』제스민 워드『바람의 잔해를 줍다가 될 것이다. 사실은, 읽겠다고 사들인 책들이 많지만 차마 그 제목들을 나열할 수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올 해의 책에 대한 투표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작가, 인상 깊었던 책에 투표를 했다. 해마다 그렇듯 돌아보면 시간은 왜 이리 빠른지, 지난 1월에 내가 했던 다짐과 생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제외하고는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뭐, 나라도 나를 칭찬해줘야지 어쩌겠는가.

 

 두꺼운 커튼을 주문해야 한다. 착용감이 좋은 내의도 골라야 한다.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는 서로가 더 높이 오르겠다고 경주를 하는 듯 거침없이 오른다. 작년에 쓰지 못한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를 보내야 한다. 카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문자가 아닌 짧은 손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눈이 내리는 12월, 예고없이 도착하는 편지와 산타의 선물을 받고 싶기도 하다. 산타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긴 하다. 그래도 산타 할아버지 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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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3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내일이면 12월이 시작되네요.
행복하게 마무리 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해요.^^
'너 없는 그 자리' 담아갑니다.^^

자목련 2012-12-01 21:16   좋아요 0 | URL
차분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많이 추워졌어요.
프레이야님의 12월,건강하고 평온한 바라요^^*

라로 2012-11-3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엔 제 남편의 생일이 있어요. 제가 12월에 기다리는 날이지요. 그런데 올해는 19일에 레미제라블 영화가 기대를 하게 만드네요. 기대하는 12월을 맞기 위해서 부지런히 레미제라블을 읽어야 하건만,,,오늘 밤을 세워서 읽을까 하다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참 여긴 진눈깨비가 내렸어요. 12월엔 말씀하신대로 눈 다운 눈이 오겠죠??? 저도 자목련님이 읽게 될 책을 같이 읽고 싶네요. 손 따듯하게 지내세요.

자목련 2012-12-01 21:18   좋아요 0 | URL
12월이 행복한 이유가 벌써 두 가지네요.
내내 행복하면 좋겠어요.
<어머니 학교>는 지금 읽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그래서 좋아요.
 

 

 주저하다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옳았다. 미리 겁을 낼 필요도 없었다. 어떤 결과든 시작이 있어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난 것이다. 떠났다는 말은 과장된 게 아니다. 과장되었다 해도 좋았다. 그 날 나는 아침 6시 40분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커피는 마시지 않았으며 창문을 열어 맑은 하늘을 확인했다. 출발하면서 문자를 보낸 순간 이미 나는 그 도시에 도착해있었다. 허락된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욕심에는 그랬다. 그러나 충만했다.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다시 커피를 먹고 다시 길을 되돌아 집으로 오기까지 나는 내내 웃음을 지었고 피곤하지 않았다. 나의 오른발도 붓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 하루였는지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나 혼자 실컷 떠들었다. 그 날 밤에 생각해보니 묻고 싶은 이야기는 더 있었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더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보석같다. 불편할 수도 있었을 만남, 우리는(어쩌면 나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기뻤다. 그래서 즐거웠다.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았다는 말도 말이다. 더 자세한 단어로, 더 많은 문장으로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제 더 자주 만날 것이고, 더 많이 서로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새로운 11월을, 새로운 가을을 새겨준 이가 당신이라서 좋다.

 

 시집을 읽고 있고 두 권의 시집을 기다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두 창비의 시집들이다.  문성해의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처음 마주한 시는 <결이라는 말>이란 제목의 시다.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곁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 <입술을 건너간 이름, 50~51쪽>

 

 남아 있는 11월의 날들에 나는 내내 행복할 것이다. 결벽증처럼 대했던 11월에, 연두빛 애정의 싹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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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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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젊은 남자가 한 젊은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이 얼마나 눈부시고 아름다운 일인가. 한데 그 여자에겐 이미 정혼자가 있다. 부적절한 관계라 할 수 없는 삼각관계지만 18세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젊은 남자 베르터의 생은 환희와 고통의 세계를 오간다. 때문에 슬픔이 아닌 고뇌인 것이다. 로테를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기에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베르터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사랑이 전부라고,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내 사랑이 상대의 사랑에 비해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에 사랑을 강요하는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활화산 같았던 그 감정들이 지속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고통을 안다고 조금은 말할 수 있다. 한데 과연 그 고통을 아는 게 맞을까, 나는 그가 아닌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슬픔이 아니라 고뇌가 맞는지도 모른다. 한 여자를 사랑했기에 그녀를 원했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게 많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게 많지만,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버린다.’ (144쪽 - 10월 27일 저녁 일기)

 

 스물다섯살의 청춘이 쓴 글이라 그럴까. 아니면 실화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 그럴까. 괴테는 순수하면서도 여린 베르터를 온전히 책 속에 담았다. 닿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절함과 비통함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친구 빌헬름에게 보내는 편지와 일기 형식은 비밀로 존재되어야 할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로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베르터의 심경은 어땠을까. 죽음만이 그 사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은 건 분명 어리석지만 아무도 그를 탓할 수 없음이 더 슬프다.

 

 로테를 잊기 위해 그녀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 일에 몰두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지만 그에게는 단 한 사람 로테만이 필요했다. 베르터에게 로테는 천사였고, 전부였다. 로테의 약혼자 알베르트에게 어떤 결함도 없었기에 베르터는 더 좌절했는지도 모른다. 알베르트와 베르터, 그리고 로테는 한편으로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가장 안정적인 삼각구조의 형태를 보여주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하며 위태로운지 말이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변하는 베르터의 감정 묘사가 탁월하다.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이라 지금까지 사랑받는 건 아니겠지만 그만큼 강렬하게 폐부를 찌르는 소설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에게는, 사랑이라는 덫에 빠진 이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설사 그들이 죽음 그 이상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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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과 고뇌는 그 깊이가 다르게 느껴져요. 이 책으로 새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담아가요.
자목련님, 차분하게 초겨울아침 시작해요, 우리^^

자목련 2012-11-10 08:21   좋아요 0 | URL
베르터의 맑고 투명한 사랑보다는 그가 겪었을 수많은 불면의 밤들의 시간을 담고 싶은 제목이 아닐까 싶어요.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을 차분하게!!
 
우선권은 밤에게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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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낮보다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때문에 밤은 새로운 세상의 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밤을 소유하며 즐길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누군가는 밤에도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밤을 지켜야 하며 누군가는 밤의 그늘에 속해 숨어버린다. 소설 『우선권은 밤에게』의 스물 두 살의 주인공에게 밤은 거대한 안식처이자 불안의 공간이다.  

 

 주인공 나는, 미혼모였던 엄마 대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의 재혼으로 잠깐 아빠가 존재했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스물 두 살의 나는 서울의 어느 전문대 근처의 한 부동산에 근무한다. 할아버지와 할어니가 차례로 죽고 혼자 남은 나를 그가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다. 죽은 엄마의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계부가 아닌 전 계부가 운영하는 부동산에서 매물로 나온 집들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1년 넘게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 뚱뚱해진 몸은 계절마다 같은 옷, 같은 신발로 지낸다.

 

 작은 읍에서 혼자 지낸 나에게 서울은 연극무대와 같았다. 나의 감정을 숨긴 채 다른 나로 사는 것이다. 누군가 남기고 간 먼지 가득한 살림살이, 당장이라도 들어와 살 수 있는 최신 유행의 원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속내를 읽는다. 밤은 나에게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불면의 밤은 나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 나는 주인을 찾지 못한 집들을 청소하고 들의 이야기를 듣다 그곳에서 잠들기도 한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외투를 입고, 그 외투에 달린 커다란 검은 모자를 덮어 쓰고 밤의 거리를 걷는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편의점의 음식들. 그것들을 만지작거려 차갑거나 따뜻하거나 끈적이거나 가슬가슬한 손가락. 그저 하나의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 까닭인지, 밤의 거대한 반죽에서 떨어져 나온 한 점 부스러기로 보이는 때문인지, 반년쯤 이어진 밤의 산책길에서 내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5쪽

 

 소설은 단조롭다. 나의 일상이 단조롭기 때문이다. 부동산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거나 편의점에서 사온 단 음식들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 되면 매물로 나온 빈 집을 기웃거린다. 부동산은 찾은 신입생에게 여러 집을 보여주면서 나는 그에게서 자신을 본다. 움츠러들고 두려운 모습을 숨기며 방어하는 자신을 말이다. 그러다 집을 구하러 온 쌍둥이 여사가 장독대집의 주인이 되고 그들이 운영하는 나이트룸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그 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단 한 번도 내놓지 못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혼자 외로웠던 시절에 대해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대해서 말이다. 쌍둥이 여사가 드려주는 말은 가장 기본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되는 대로 살아온 삶, 나를 돌보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따끔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인 것이다.

 

 “사람은 잘 먹지 않고 잘 입지 않고 잘 자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잘 살 수는 없어요.” 159쪽

 

 서울의 밤이라는 공간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러나 그곳의 삶이 모두 편안하지는 않을 터. 소설은 집을 보러 다니는 스물 두 살의 여자를 통해 밤을 견디는 다양한 사람들의 상처와 삶을 이야기 한다. 어둡고 깊은 밤이 지나야 밝고 환한 아침이 오듯 그 상처를 이겨내야 한다고 나즈막하게 말한다. 지친 육체와 영혼이 온전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없는 그들의 밤을 위로하고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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